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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산^재^^ 전경 << 신라 개국전 6부 촌장님 위패를 모신 사우 >> ^^ 성씨姓氏의 개설槪說 ^^ // 득 성 사 실 得 姓 史 實 //

오뚜기방송 2016. 3. 23. 14:09

  성지 순례(聖地 巡禮)

 


 

 新羅大祭line_characters_in_love-27 src국가 문화제 

          매년 음력 8월 23일

   양산재(楊山齋) 경내(境內) 입덕묘​(立德廟)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90-1  


​ 


양산재 입구. 양산재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의 양산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부근의 산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하지는않다.


양산재 전경


대덕문을 지나면 보이는 전경. 왼쪽이 익익재, 오른쪽이 윤적당.


정면에 보이는 문은 홍익문.



대덕문 전경



입덕묘에 신라 육촌장의 위패가 모셔짐.



 입덕묘 내부 위패 봉안 모습.


홍익문 전경​


윤적당 전경


익익재 전경


홍익문에서 바라본 전경 



양산재 안내 게시판 












성씨(姓氏)의 개설(槪說)



우리는 누구나 숙명적(宿命的)으로 성씨를(姓氏)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는 천륜(天倫)이라는 엄연(儼然)한  절대성(絶對性)의 바탕위에 이미 정(定)하여진  부조(父祖)로부터 선택(選擇)의 여지없는 혈통(血統)에 따라 계승(繼承)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姓)이란 본시(本始) 혈통(血統)의 관계(關系)를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부호(符號)로써 혈연(血緣)의 씨족중심(氏族中心)을 벗어나 부족사회(部族社會)또는 부족국가(部族​國家)로 형성(形成) 발전(發展) 되면서 서로의 가통(家統)을 호칭(呼稱)하기 위한 방법(方法)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수 있겠다.

때문에 각기(各己) 자기(自己)의 씨족(氏族)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 나름대로의 호칭(呼稱)<산,계곡(溪谷),암벽(岩壁)등>이 있었을 것으로 간주(看做)되며 그 호칭(呼稱) 자체가 성으로 발전(發展)되어 동일(同一) 씨족간(氏族間)에 서로가 화애돈목(和愛敦睦)하며 타성이족(他姓異族)과는 엄격히 구분되어 왔을 것은 상식(常識)으로 해득(解得)할 일이나 문제(問題)는 모계중심(母系中心)이 태초(太初) 원시시대 (原始時代)즉 문자(文字)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以前)부터 성씨(姓氏)에 부합(附合)되는 그 어떠한 호칭(呼稱)을 사용(使用)하여 왔을 것이라는 추리(推理)를 가능(可能)하게 한다 하겠다. 

성(姓)과 씨(氏)는 사상(史上) 중국(中國)의 삼대(三代) 즉 하.은.주(夏.殷.周)의 이전(以前)에는 남성(男性)은 씨(氏)로 여성(女性)은 성(姓)으로 부르다가 후대(後代)에 성씨(姓氏)가 합(合)하여 졌으며 씨(氏)는 신분(身分)의 귀천(貴賤)을 분별하였기 때문에 귀(貴)한 자(者)는 씨(氏)가 있으나 천(賤)한 자(者)는 씨(氏)가 없고 이름만 있었다. 

이를 대변(代辯)하는 예(例)로 염제신농(炎帝神農)씨(氏)의 모(母)는 강수(姜水)에서'황제헌원(黃帝軒轅)씨(氏)의 모(母)는 희수(姬水)에서 살았다하여 성(姓)을 모계(母系)인 강(姜)과 희(姬)로 써왔던 것이다.

중국(中國)의 문자(文字)구조(構造)의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設文解字」에 이르기를 「성인지소야姓人之所生也」라 했듯이 성(姓)은 출생(出生)의 계통(系統)을 표시하는 것으로 시대별로 부계와 모계가 다를 수 있다 하겠으며 한편 좌전(左傳)에 의하면「천자건덕인 봉생이 사성(天子建德因 封生以 賜姓)」이라 했다.

즉「천자(天子)가 유덕(有德)한 자(者)로 제후(諸侯)를 봉(封)할때 그 조상의 출생지(出生地)로써 성(姓)을 주었다 」라는뜻이다.

앞서말한 씨(氏)는 동성(同姓) 즉 동계(同系) 혈족간(血族間)에 생활권역(生活圈域)의 사정에 의하여 이거분산(移居分散)되는 경우이주지명( 移住地名)에 따라 분파(分派)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나라의 본관(本貫)에 해당(該當)된다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초기(高麗朝初期)에 이르러서야 지도층계급(指導層階級)에 차츰 성(姓)이 보급(普及)되면서부터 보편화(普遍化)되어 부조(父祖)로부터 계대(繼代)하여 사용(使用)하여 왔으며 특별(特別)한 즉 왕으로 부터 사성(賜姓)'사관(賜貫)'사명(賜名)받았을 때는 그 본성(本姓)인 김성(金姓)이 최성(崔姓)으로 되는 등 사성되는 성자(姓字)에 따라 바뀌어 졌으며 이는 훈공(勳功)의 영광(榮光)으로 받아졌던 때도 있었다.

다만 중국식(中國式) 한자(漢字)로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한자문화(漢字文化)를 받아드리면서 부터였으며  ​그 사용년대(使用年代)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씨(姓氏)에 대한 문헌(文獻)등을 살펴보면『삼국사기(三國史記)』나『삼국유사(三國遺事)』등에 고구려시조(高句麗始祖) 주몽(朱蒙)은 고구려를 건국(建國)하고 성을 고씨(高氏)로 하였으며 건국공신(建國功臣)인 재사(再思)에게는 극씨(克氏)를 무골(武骨)에게는 중실씨(仲室氏)를 묵거(默居)에게는 소실씨(少室氏)를 각각(各各) 사성(賜姓)하였다는 기록(記錄)이 있다. 한편 백제(百濟)의 시조(始祖)인 온조(溫祚)는 부여계통(扶餘系統)에서 나왔다고 하여 부여씨(氏)로' 신라(新羅)의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는 표주박 같은 알(卵) 속에서 태어났다하여 성(姓)을 박씨(朴氏)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삼대(三代) 유리왕(儒理王)九年(32)년에 육촌(六村)을 육부(六部)로 개칭하고 알천 양산촌장 (閼川  楊山村長)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를' 돌산 고허촌장 (突山 高墟村長)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 무산 대수촌장 (茂山 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취산 진지촌장 (觜山 珍支村長)지백호(智佰虎)에게는 정씨(鄭氏)' 금산 가리촌장 (金山 加利村長)지타(祗沱)에게는 배씨(裵氏)' 명활산 고야촌장 (明活山 高耶村長)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를 각각 사성(賜姓)하였다는 기록(記錄)과 함께 가락국(伽洛國)의 시조(始祖)인 수로왕(首露王)은 금관국북(金官國北)쪽 구지봉(龜旨峰)에 떨어진 황금(黃金)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씨(金氏)라 하였고' 또한 신라김씨(新羅金氏)의 시조(始祖)인 알지(閼智)도 금함(金凾)으로부터 나왔다하여 김씨(金氏)라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상(以上)의 성씨(姓氏) 등이 우리나라에 최초(最初)로 등장하는 성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서민(一般庶民)은 물론(勿論) 이상(姓氏)에서 ​밝힌 제성씨(諸姓氏)등도 성자(姓字)는 별(別)로 사용하지 않고 이름 생함(生銜) '몰휘(殁諱)만 써오다가 중국(中國)당(唐)과 교역(交易)이 활발했던 신라말옆(新羅末葉)에 이르러서야 왕족(王族)을 비롯하여 귀족(貴族)등 특정인(特定人)'즉 사신(使臣)'유학생(留學生)'무역상인 또는 국가(國家)에 공(功)을 세워 사성(賜姓)받은 자등으로부터 성자를 쓰기 시작했으며 고려조(高麗祖) 문종이후(文宗以後)에 과거제도(科擧制度)가 발달되면서 사성(賜姓)을 비롯한 제성(諸姓)등이 씨족간(氏族間)의 문벌(門閥)에 따라 자생(自生)창씨(創氏)하여 오다가 조선조말(朝鮮朝末) 개화기(開化期)의 물결을 타고 조선의 반상(班常)'서노(庶奴)할것없이 전반적으로 성자(姓字)를 쓰게 되었으며 그 성씨(姓氏)의 수요에 관하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조선(朝鮮) 영조조(英祖朝)의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의「 도곡총설(叢說)」에는 398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정조때의 이덕무(李德懋)의 『익엽기(益葉記)」에는 468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以外)에 양성지(梁誠之)의「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조종운(趙從耘)의「씨족원류(氏族源流)」정시술(丁時述)의「제성보(諸姓譜)」윤창현(尹昌鉉)의「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이창현(李昌鉉)의「성원록(姓源錄)」등에도 일관성(一貫姓) 없는 수차(數差)가 보이며 특(特)히 1930年 국세조사(國勢調査)에는 298성으로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으로 집계(集計)되던 것이 1975년도(度)조사(調査)에는 249성으로 나타났으며 지난 1985년 275성(姓) 3349관(貫)으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참고(參考)로 우리나라의 성씨(姓氏)에 대한 구별의 별칭(別稱)을 논(論)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도에 조사집계(調査集計)한 258 성씨중(姓氏中) 대성(大姓)이라 칭(稱)하는 오대성씨(五大姓氏)가 있는데 金氏' 李氏' 朴氏' 崔氏' 鄭氏이며 대성이라함은 그 세력(勢力)이 왕성(旺盛)하다는 뜻으로 1985년도(年度)국세조사에 의하면  金氏; 282 貫 8'785'341 名  李氏;  237 貫  5'985'056  名  朴氏;  127貫  3'435'858  名  崔氏;  127 貫  1'913'329  名  鄭氏;  122 관(貫)  1'780'734 명(名) 합계(合計) 21'900'318 名으로 전체 우리나라 인구(人口)의 50%로 나타나 있으며 다음은 명료(明瞭)하게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라는 뜻을 가진 저성(著姓)이 50 姓' 숭앙(崇仰)할 정도로 귀(貴)하게 여긴다는 뜻의 귀성(貴姓)이 48 姓'  희소(希少)하다 즉' 드물다라는 뜻의 희성(稀姓)이 42 姓' 아주 드물어서 珍貴하다는 뜻을 가진 진성(珍姓)이 60 姓' 둘 이상의 字가 겹치다는 뜻의 複姓)이 60 姓' 즉'남궁(南宮)' 황보(皇甫)' 사공(司空)' 선우(鮮于)' 제갈(諸葛)' 서문(西門)' 독고(獨孤)' 동방(東方)으로 나타나 있다.

이상(以上)에 말한 성씨(姓氏)의 생성과정(生成過程)에서 보아왔듯이 일가(一家)를 이루어 문벌(門閥)로 파벌(派閥)로 더 나아가 씨족중심(氏族中心)의 사회(社會)를 형성(形成)해가면서 각기 나름대로의 자기혈통(自己血統)의 가계9家系)를 중심(中心)으로 부조(父祖)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단(單)을 모아 수록(修錄)한것이 오늘날의 족보(族譜)에 관한 기초자료(基礎資料)라 할 수 있으며 이것 등이 가보(家牒) 즉 가승보(家乘譜)에서 파보(派譜)로 대동보(大同譜) 등으로 발전(發展)되었다 함은 상식(常識)이라 할 수 있겠다. 

​득 성 사 실 (得 姓 史 實)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依)하면 득성조(得性祖)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을 하늘에서 하강(下降)한듯이 기록(記錄)하고 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는 천강설(天降說)은 없고 진한(辰韓)의 고허촌장(高墟村長)이라고만 하였으며 어디서어떻게 살아 왔는지  상세(詳細)한 기록(記錄)은 없고 다만 『조선유민(朝鮮遺民)이 동해빈(東海嬪) 산곡간(山谷間)에 산재(散在) 분거(分居)하여 육촌(六村)을 이루었으니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 취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라』하였다.

그 조선유민(朝鮮遺民)이란 고대(古代) 단군(檀君) 조선(朝鮮)을 말함이요' 동해빈(東海嬪)이란 지금의 강원도(江原道) 일부(一部)와 경상도(慶尙道)등 동해(東海)의 해변지역(海邊地域)을 말한듯 하다. 당시(當時)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등 삼한(三韓)이 우리나라의 남부(南部) 즉 한수(漢水) 이남(以南)에 정립(鼎立)하여 백성(百姓)을 다스려 오던 중 마한(馬韓)은 국가(國家)의 형태(形態)를 이루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하였지만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군주국가(君主國家)를 세우지 못하고 부락단위(部落單位)의 촌장(村長)들이 그의 일부족(一部族)들을 이끌어 오면서 마한(馬韓)의 지배(支配)를 받아오던 때였다.

이에 진한(辰韓)의 부족(部族)들은 국가(國家)를 건설(建設)하여 남의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自主的)인 정치(政治)를 바라고 있었다.

이무렵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은 여​세추이(與世推移)에 부응(副應)하여 단기(檀紀) 2265(BC69)年 임자(壬子) 3月 삭일(朔日)에 양산촌장(楊山村長) 알평(謁平)' 대수촌장(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佰虎)' 가리촌장(加利村長) 지타(祗沱)' 고야촌장(高耶村長) 호진(虎珍)' 등 오부촌장(五部村長)들과 더불어 건국(建國)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爲)하여 회의(會議)를 소집(召集)하고 공(公)께서 발의(發議)하되 『우리 모두 상당수의 인민(人民)이 모여 살기 좋은 지역(地域)에 각기(各己) 부락(部落)을 이루어 태평(泰平)스럽게 살아가고 있으나 위로는 군주(君主)가 없어 백성(百姓)모두는 국가(國家)를 세워 군주(君主)를 모시고 남의 나라의 부당(不當)한 간섭(干涉)이나 제어(制御)를 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오' 더우기 인접(隣接)한 변한(弁韓)은 우리에게 침해(侵害)를 하는 일이 적지 않으며 멀리 북(北)으로는 한(漢)의 사군(四郡)이 머리를 누르고 있어 언제나 그것들이 우리의 진전(進展)에 크게 방해(妨害)가 되는바  우리는 이제 새로이 군주(君主)를 받들어 모시고 국가정사(國家政事)를 일신(一新)할 때가 온것 같소' 우리 모두가 힘을 합(合)하여 국가(國家)를 세우고 정사(政事)를 바로하면 자손후대(自孫後代)를 위하는 만년대계(萬年大計)가 될 것인즉 모름지기  이를 위(爲)하여  총력(總力)을 다할 것을 바라는 바요』한즉 일당(一堂)에 모인 촌장(村長)들은 물론(勿論) 구경차 나왔던 일반백성(一般百姓)들까지 모두가 찬동(贊同)하는지라  촌장(村長)들과 의논(議論)하여 군주(君主)로 추대(推戴))할 적당(適當)한 인물(人物)을 찾기에 고심(苦心)하던중 공(公)은 답답하여 바람을 쏘일겸 높은 언덕에 올라보니 남쪽으로 양산(楊山)의 나정(蘿井)계림부근(鷄林附近) 숲 사이로 서광(瑞光)이 비치는지라 이상(異常)히 여겨 모두들 달려가 본즉 왠 말 한마리가 무릅을 구부리고 울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커다란 알(卵)한개가 남아 있었다.

공(公)은 그 알을 주어 깨어보니 알 속애서 뜻밖에 어린 동자(童子)가 나오는데 의용(儀容)이 단정(端正)하고 출중(出衆)하므로 한편 놀라면서 기이(奇異)하여 서둘러 품에 안고 멀지않은 동천(東泉)(東泉寺우물)으로 가 목욕(沐浴)을 시키니 동자(童子)의 몸에서 광채(光彩)가 나고 향취(香臭)가 그윽하였다. 이에 심상치 않게 생각한 공(公)께서 집으로 데려가 당시(當時)의 광경(光景)을 상징(象徵)하여 혁거세(赫居世)라 이름하고 잘 보살펴 귀히 길렀다.

그 후 혁거세(赫居世)가 13 歲가 되던 해 단기 2277 年 한선제오봉원년(漢宣帝五鳳元年)갑자(甲子) 하(夏) 사월(四月)에 소벌공(蘇伐公)은 각촌장(各村長)들을 불러 회합(會合)하고 혁거세(赫居世)의 비범(非凡)한 자질(資質)을 말한 후 군주(君主)로 모실 것을 논의(論議)한즉 여러 촌장(村長)들은 이의(異義)없이 찬동(贊同)하였다.

이어 곧바로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고 국호(國號)를 서라벌(徐那伐)이라 하니 이는 신라(新羅)의 일명(一名)으로 진한(辰韓)의 옛땅에 새로이 국가(國家)가 세워진 것이다.

혁거세(赫居世)를 개국시조(開國始祖)로 한 신라(新羅)는 장차(將次)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을 통일(統一)하여 해동(海東)의 대국(大國)으로 성장(成長)한 기업(基業)을 조성(肇成)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는 오로지 소벌공(蘇伐公)의 국가건설(國家建設)에 대(對)한 집념(執念)의 공(功)이라 할수 있을 것이며 더우기 혁거세(赫居世)가 탄생(嘆生)한 커다란 알(卵)을 얻어 어린 동자(童子)를 13년 동안 수양(收養)하여 군주(君主)인 왕(王)으로 모시고 정사(政事)를 보필(輔弼)하여 국기(國基)를 확고히 다져놓았으니 가히 신라건국(新羅建國)의 제일인자(第一人者)라 할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건국(新羅 建國)후 88년이 지난 제3대 유리왕(儒理王)9년 (서기32)년 임진(壬辰)에 옛 진한(辰韓) 6촌의 지명(地名)을 개칭(改稱)하고 6부촌장에게 개국좌명(開國佐命)의 공(功)이 있다 하여 각기(各己) 성(姓)을 쓰게 하여 사성(賜姓)하여 주었다 한다.

이는 유사이래(有史以來) 전대(前代)에 없었던 우리 나라의 씨족(氏族)에 관(關)한 창성(創姓)의 효시(嚆矢)인 것이다.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을급양부(及梁部)로 하고 성(姓)을 이(李)로'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로 하고 성(姓)을 최(崔)로'  취산 진지촌(觜山 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로 하고 성(姓)을 정(鄭)으로'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로 하고 성(姓)을 손(孫)으로'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을 한기부(漢祇部)로 하고 성(姓)을 배(裵)로'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을 습비부(習比部)로 하고 성(姓)을 설(薛)로 하여 주었다.

이상과 같이 우리 최씨(崔氏)의 성(姓)은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으로부터 득시성(得始姓)되었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3年(516)년 병신(丙申)에 공(公)에게 충의군(忠宜君)에 봉군(封君) 하였으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3年(656)년 병진(丙辰)에 문열왕(文烈王)에 추존(追尊) 하다. ​

 

                        서기 1977년 5월 12일 발행                         

 범 최 씨 통 사 (汎 崔 氏 通 史) 중에서

발행인  최 형 우

 발 행 처   최씨전국대종연합회

경북 경주시 황​오동 326-1(태종로6)

 054-749-0526​
편 저 자   최 원 희

 편 집 인   한국씨족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