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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 기념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550 (독정로 성지1길34)<아랫마을>송산(松山)어래산,御來山

오뚜기방송 2016. 3. 23. 14:50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src=http://mini-files.thinkpool.com/files/mini/2013/05/04/niyee_2013.05.04.swf
  https://www.youtube.com/watch?v=oZoRW1_w9yE&feature=player_embedded


  


孤雲 崔致遠 先生 記念館 建立工事 現況

                                                               

안녕하세요! 2013년3월4일 공사를 시작하여 2013년 6월28일 본관과 삼문 공사를 마무리 하는 1차와 2차 2014년11월26일 서재,화장실,삼문및 전통 한식담장 완공『낙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속 공사는 재원이 마련되는 대로 동재와 조경,관리사옥 3차공사를 착수할 계획입니다. 종, 형제님들께서 적극적인 성원과 풍성한 도움 주실것을  믿습니다. 우리모두 너와 나가아닌 하나되고 합심하여 이러 한 내용을 서로서로 홍보하여 주시고 헌미헌금의 자세로 가족 1인당 1만원의 정성을 담는다면 목표를 달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다사다난 하였던 을미년(乙未年)도  저물어 가고 있군요. 닥아오는 성탄절과 병신년(丙申年) 새해에도 변함없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복 많이 받으시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들의 정성;    농협 계좌번호( 351 - 06131999 - 13 )            

예      금     주;    경주최씨 관가정공파 종중회

                 문              의;    경주최씨 관가정공  (휘)청파 대종회                  

  (031)573-5274 / 팩스(031)573-5273 

   


※기념관 건립 공동 위원회

<< 관가정공파 대종회, 야수공파 종중회, 참판공파 종중회 >> 

공동위원장


 


고운 최치원 선생 기념관 조감도  

 


2013년 11월 8일 촬영한 전경

 

  

 



 


고운 최치원 선생의 생애


崔  旼  洪​


(안대교수.해동철학회장.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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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옛날에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위대한 문화의 업적을 더듬어보는 일은 옛날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복고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그 훌륭한 문화적 유산을 오늘 우리의 정신생활에 깊이 되새겨서 내일의 삶을 지혜롭게 꾸며보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운 선생은 무엇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서 후예들의 존경을 받는 대문호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그의 생애를 통해 한번 알아보는 일은 뜻이 있는 일로 생각된다.


고운 생은 서기 857년에 신라의 서울 사량부에서 아버지 견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풍채가 좋고 성품이 정세하여 학문을 좋아하는 천부적 재사였다고 한다. 열두 살 때 벌써 크나큰 뜻을 품고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이 유학은 자의보다 타의의 힘이 컷던 것으로 믿어진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당나라에 가서 10년 동안 공부를 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터이니 아무쪼록 열심히 공부하여 이 아버지가 소원 하는 바를 잊지 말고 꼭 명심하여 공을 세우라는 간곡한 훈계를 받았다. 한 집안에서 위대한 인재가 나오는 것이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중국의 맹자 어머니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데 이 만고불변의 교훈이 고운 선생의 아버지에게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당나라 과거가 혈연을 끊는 것도 불사한다고 하니 급제를 하지 못하면 고향도 집도 아버지도 없는 어린 소년이 된다는 무거운 짐을 지고 비상한 결심을 가지고 과거 시험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던 고운 선생이었다.


고운 선생은 그리운 고향산천을 버리고 생활 풍습이 다른 이역땅에 가서 일편단심 아버지의 엄하고 간곡한 훈계를 잊지않고 6년 동안 피나는 노력 끝에 18세 되던 해에 드디어 과거에 장원급제를 했다. 이 과거를 빈공과(賓貢科)라고 하는데 당나라 주변 국가의 사람들만이 치르는 일종의 별시였다. 천부적인 탁월한 문장으로 중원을 감동시키면서 급제한 이 과거는 선생의 생애에 있어서 특별히 큰 의의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본 시험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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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876년에 선생은 그 나라 선주률수현위(宣州溧水縣尉)로 관계에 등용되었다. 이것이 과거에 급제한 그 이듬해이다. 현위는 물론 보잘 것​ 없는 지방 행정관의 자리이기는 하지만 약관의 외국 사람으로는 예외적인 우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관직을 맡아보는 동안에도 자리와 학문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부지런히 공부하여 지은 글이 모두 다섯 권이 된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雙女墳奇談쌍녀분기담》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삼국유사의 신라《수이전》에 기재되어 있고 또 중국의《六朝事蹟육조사적》에도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중원의 많은 시인과 작가들을 울린 것이다. 이 <고사>가 생기게 된 사연을 우선 소개 하면 이 고을의 명승지를 지나다가 길가 언덕에 한 쌍의 옛 무덤을 보았는데 그것은 두 여자의 무덤이었다. 어떻게 해서 죽은 여자이기에 이렇게 쓸쓸하게 묻혔는가 자못 애련한 심정으로 애도의 시를 읊은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雙女墳奇談쌍녀분기담 §



누구 집 두 여자의 무덤이뇨誰家二女此遺墳수가이여차유분


한 많은 청춘이 쓸쓸히 묻혔네寂寂泉扃幾怨春적적천경기원춘》(中略)


꽃다운 정이 꿈에라도 통할 수 있다면芳貞儻許通幽夢방정당허통유몽


밤이 새도록 이 외로운 나그네를  달래준들 어떠리永夜何訪慰旅人영야하방위여인​》



<♣ 응수 ♣>


往來顧路傍,왕래수고로방분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 길가의 무덤


鸞鏡鴛衾盡惹塵란경원금진야진원앙 금침 고운 거울 티 끝에 묻혔으니


欲薦襄王雲雨夢욕천양왕운우몽그대 품에 안기어 자고 싶구려


千思萬憶損精神천사만억손정신천만가지 생각이 애를 태우네



이 두 여인은 장씨​ 집안의 딸로 글 재간과 미모를 겸했는데도 아버지가 소금과 차를 파는 천한 상인에게 시집을 보내 재물을 탐냈기 때문에 자결하여 여기에 묻혔다는 것이다. 외롭고 한이 많은 두 여인은 20대의 헌헌장부요 시인인 고운 선생을 만나서 그 맺힌 원한을 풀었던 것이다. 솔직이 말해서 이 고사의 내용은 환상적인 유토피아와 같은 것이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19세기 초 독일의 시인 Goethe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아 고운 선생은 천 수백 년 전에 18,9세기의 세계적인 시인들과 어깨를 같이 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 시인으로 평가된다.


이 ​쌍녀분의 기담에서 우리는 선생의 인도주의적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 외로워하는 사람, 불쌍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정을 베풀어주려고 하는 人愛心이 이 작품에 넘쳐흐르고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똑같은 운명을 타고 생겨난 것이니 신분의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으며, 진실로 자신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남의 행복을 짓밟을 수 없는 것이며, 또 자기의 목숨이나 재산이 소중한 줄 안다면 남의 목숨이나 재산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고대 휴머니즘의 정신을 중국 사람들에게 시를 통해서 가르쳐주었다. 또 이 정신은  현대 인도주의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고운 선생은 학문과 세상에 대한 포부가 컸던 것만큼  그 생애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서기 887년 겨울,률수현위라는 조그마한 지방 행정관의 자리에서는 자기 포부의 만족을 얻을 수 없어서 물러났다. 그러고 난 2년 후에 그 나라 황소 반란군이 수도를 함락시키고 그 세력을  크게 떨쳤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변을 관군의 총지휘자로 임명하여 반군을 토벌토록 했다. 이 때 고변은 평소 비범한 문필에 놀라 존경을 해오던 선생을 종사관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이역 땅에서 4년 동안 종군기자 생활까지 하게 되었다. 戰勢(전세)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나 남의 나라에 가서 군막 생활을 하는 그 남아의 용기와 기개도 높이 평가된다. 특히 문필로서 적을 항복하게 한 것은 온 천하가 다 아는 유명한 일이다.


24세가 되던 해 7월 8일 싸움에 개가를 올리기 위해 討黃巢檄文토황소격문》을 지었는데 그 한 귀절의 내용에 반군의 지휘자 황소가​ 혼비백산이 되어 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격문은 당시 당나라의 귀족  문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선생은 중원 문단에서 혜성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황소의 칼과 화살이 아무리 강해도 나의 글과 붓 끝을 딩하지 못한다고 해서 격문의 귀절이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하늘 아래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땅속의 귀신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다.


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불유천하지인 개사현륙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억역지중지귀 이의음주



이 귀절에 포악하고 무지했던 황소도 간담이 서늘하여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이국의 젊은 학도가 진지에서 격문을 써서 싸움을 끝낸 무훈은 당나라 청사에 길이 빛을 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애를 장식하는 데도 중요한 장식품이 되었다고 본다.


​고운 선생이 서기 882년에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의 상을 받은 것도 군에 종사하면서 세운 공의 표시로 생각된다. 이것은 붉은 금빛으로 꾸민 물고기 모양의 그림을 그린 주머니여서 자금어대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속에는 이름을 적은 표시가 있어서 주요기관에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외국 젊은 청년에게는 더할 수 없는 영광으로 보여진다. 선생은 어린 몸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세'가지일에 큰 공을 세웠다고 본다. 첫째는 중원의 문단에서 혜성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푸른 계림(신라)을 재인식시켰다는 것이고, 끝으로 황소 내란에 큰 무훈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점은 그의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주요한  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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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선생은 당나라에서 많은 일을 해놓고 서기 884년에 많은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회남(淮南)을 떠나 금의환가의 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이 때에 당나라의 희종 황제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가는 사신의 자격을 띠게 해주었고, 또 후견자라고 볼 수 있는 고변은 장도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의미에서 약주머니를 주었고, 그의 학문에 감탄하여 존경하던 고운(淮雲)은 다음과 같은 석별의 시를 지어주었다."푸른 계림이 있어 거기 특이한 인물이 태어나니 그는 12세에 바다를 건너와서 문장으로 중원을 감동시킨 사람으로 18세에 문단에서 마음껏 겨루어 단 한번의 화살로 금문책(金門策)<과거>을 맞추었노라,"이렇게 황제를 비롯한 그 밖의 중진 문인들이 각별한 환송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잊을 수 없는 큰 기쁨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서기 885년 3월 그리워 하던 고국에 돌아온 선생은 중원에서 10년 동안 쌓은 학식과 경험으로 이상적인 신라를 만들려고 했지만 그 실현이 어려웠던 것이다. 시기적으로 그때는 이미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고​ 또 육두품(六頭品)이라고 하는 신분으로는 신라 사회에서 그 큰 뜻을 펼 수가 없었다. 물론 헌강왕이 지서서감(知瑞書監)의 요직을 주기는 했지만 육두품으로서의 한계는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전과 마찬가지였다.


​《삼국사기》에 ' 최치원이 당나라에게 얻은 바가 많았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였다. 그는 신라 말의 그에 대한 질투와 불신에 견디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할 수 없어서 지방 장관을 자원하여 현재의 전북 태인, 충남 서산의 태수(太守)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 태수로서도 이상적인 정치 이론을 실현할 수 없어서 진성여왕 8년에는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건의하여 국정의 어지러움과 도탄에 빠진 민생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였다. 이에 왕은 육두품으로서는 초고 직위인 아찬(阿飡)의 벼슬을 주었으나 실제로 그 건의는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병든 나라를 구제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이 먹혀들어가지 않아서 관직을 떠나 산천을 소요하며 당시 지성인의 고민을 시조로 읊기도 했다. 그 중 말성많은 인간세상을 소재로 하여 해인사 입구의 홍류동(紅流洞)에서 지은 시가있다.​

 


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line_rangers2-13 src석벽제시(石壁題詩)


 

<<광분첩석후중만line_rangers2-15 src狂噴疊石吼重巒>>"물이 미친 듯 휩쓸리니"


<<인어난분지척간line_rangers2-25 src人語難分咫尺間>>"지척간의 사람들 말 소리는 듣기 어려우나"


<<상공시비성도이line_rangers2-32 src常恐是非聲到耳>>"시비 소리는 귀에 이르니"


<<교류수진롱산brown_and_conys_loveydovey_date-37 src故敎流水盡籠山>>"끝닿는 데까지 흐르고야마는 그 물에서 배워야겠구나"


이 시는 심오한 자연관을 가지고 부귀공명을 가벼이 여기고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세상만사에 외로운 구름이 된 심정을 잘 표현했다고 본다. 이렇게 그는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명산대찰과 명승지를 주로 찾아다니며 그 울적했던 마음을 달랬다.


고운 선생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생각했던 뜻은 비록 다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국내외에서 쌓아놓은 학문적 업적은 만고불멸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중산복쾌집《中山覆簣集》5권, 사육집《四六集》1권,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및 문집 30권의 문헌을 남겼다. 이 가운데서 《四六集》과 《桂苑筆耕》의 이름은 당나라 책 예문지《藝文志》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문헌에 담긴 사상은 옛날의 것이면서 오늘의 것으로 현재 우리와 같이 살고 있다. 그 많은 시는 격조가 높고 함축성과 여운이 풍부하여 고려와 조선조 그리고 오늘의 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민족의 보물로 오늘까지 계승되고 있다.


그는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정치의 경륜은 못 폈지만 유교, 불교, 도교에 정통하여 독자적 사상을 세운 사람이다.​ 또한 그 학문이 매우 심오하여 역사적 실존 인물로 많은 신화를 남겨놓았다. 그래서 선생을 주인공으로 한 고대소설 즉 《최고운전》,《최문헌전》과 또 많은 전설이 있다. 선생은 등선(登仙)을했다는 죽음설이 있는데 이것은 신화적이다. 조선조 초기의 문인인 김일손(金馹孫)이 지리산의 청학동을 답사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최치원이 아직도 청학동에 살고 있다고 했다는 말이 있다.


고운 선생의 생애에 대한 집약적 결론을 내기 위하여 편의상 선생을 연기자로 가정해보면, 두개의 무대에서 일생 동안 연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당나라 무대에서 연기를 할 때에는 많은 관중들로부터 절대적인 호평을 받았는데 우리나라 신라의 무대에서는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연기를 했는데 관중의 호평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이유는 불의가 정의를 짓밟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이 보았기 때문이다. 신분과 감투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사람을 옳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高   墟  村


1987년 11월 30일 인쇄​

1987년 12월 05일 발행

편집인   최          염

발행처   경주최씨중앙종친회​


​(우)110-350 |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6길 36, 오피스텔월드 301호

(TEL)738-3477, 732-8118  (FAX)732-8119



孤雲  崔 致 遠 先生 "詩"

              


산예狻猊"사자 탈춤"




"멀리 사막을 건너 만리길 오느라"<<遠涉流沙萬里來원섭유사만리래>>

"털은 다 빠지고 먼지 뒤집어 썼네"<<毛衣破盡看塵埃모의파진간진애>>

"머리 흔들며 소리치고 순하게 따르지만"<<搖頭掉尾馴仁德요두도미순인덕>>

"사나운 기세만은 여느 잠승들과 같으랴"<<雄氣寧同百獸才웅기영동백수재>>


慶州崔氏 中央 宗親會


社團法人 孤雲國際交流事業會


 
孤雲  崔 致 遠 先生 "詩"

"사자 탈춤"산예狻猊


<<遠涉流沙萬里來원섭유사만리래>>"멀리 사막을 건너 만리길 오느라"

<<毛衣破盡看塵埃모의파진간진애>>"털은 다 빠지고 먼지 뒤집어 썼네"

<<搖頭掉尾馴仁德요두도미순인덕>>"머리 흔들며 소리치고 순하게 따르지만"

<<雄氣寧同百獸才웅기영동백수재>>"사나운 기세만은 여느 잠승들과 같으랴"


慶州崔氏 觀稼亭公 (諱)淸派 大宗會 

 

       

두견(杜鵑)진달래



"돌 틈에 뿌리 박혀 잎 쉽게 마르고"<<石罅根危葉易乾석하근위엽이건>>

"바람서리에 자칫하면 부러지겠네."<<風霜偏覺見催殘풍상편각견최잔>>

"들국화 가을 요염한 짓은 제쳐두고"<<已饒野菊誇秋艶이요야국과추염>>

"추위에도 끄덕 없는 소나무 부러워라."<<應羨巖松保歲寒응선암송보세힌>>

"향기 머금고 푸른 바다에 왔건만 애처로워"<<可惜含芳臨碧海가석함방임벽해>>

"누군가 좋은 집 난간 앞에 옮겨 심으려나."<<誰能移植到朱欄수능이식도주란>>

"여느 풀 나무보다 다른 품격 지녔건만"<<與凡草木還殊品여범초목환수품>>

"나무꾼이 한 번 보아줄지 두렵구나."<<只恐樵夫一例看지공초부일례간>>


《계원필경집 권20


慶州崔氏 釜山 宗親會


석상왜송​<石上矮松>바위에 작은 소나무



"재목 못되어 노을과 연기 속에 늙어가며"<<不材終得老煙霞불재종득노연하>>

"시냇물 밑이 어찌 바닷가 절벽만 하오리까."<<潤低如何在海涯윤저여하재해애>>

"해 저물자 그림자 늘어 섬 나무 키 같아지며"<<日引暮陰齊島樹일인모음제도수>>

"바람은 밤중에 솔 씨 흔들어 모래밭에 떨구네."<<風敲夜子落潮沙풍고야자락조사>>


慶州崔氏 大邱 宗親


해변춘망 <海邊春望​>바닷가에서 봄 경치를 바라보며

 

<<鷗鷺分飛高復低구로분비고부저>>"갈매기와 해오라기들 높게 낮게 날아다니며"

<<遠汀幽草원정유초욕처처>>"저 멀리 물가에 풀들은 더욱 우거지려 하네."

<<此時千里萬重意차시천리만중의>>"이때에 천리 밖 만 가지들이 되풀이 되며"

<<目極暮雲翻自迷목극모은번자미>>"저 멀리 해질녘 구름 바라보니 절로 아득하네."


慶州崔氏 慶南 宗親


​東風<동풍>line_rangers-5 src봄바람


<<紙爾新縱海外來지이신종해외래>>"봄바람은 바다 건너 새로이 불어와서"
<<曉窓吟座思難裁효창음좌사난재>>"새벽 창가 시 읊는 자리를 어지럽게 구는구나."

<<堪憐時復憾書愰감련시부감서황>>"때가 오면 서재 휘장이 근심되어 가련해지니"

<<似報故園花欲開사보고원화욕개>>"고향 뜰의 꽃들이 피려는 소식을 전하려는 듯하네."


慶州崔氏 忠北 宗親


海邊閒步<해변한보>바닷가를 한가롭게 걸으며


<<潮波靜退步登沙조파정퇴보등사>>"밀물 나간 뒤 고요한 모래밭 올라 걷노라니"

<<落日山頭簇暮霞낙일산두족모하>>"지는 해는 산마루에 걸리고 저녁노을 끼여있네."

 <<春色不應長惱我춘색불응장뇌아>>"봄 빛깔도 나를 길게는 괴롭히지 못할 것이니"

<<看看卽醉故園花간간즉취고원화>>"고향 뜰 꽃향기 취하는 것 돌아가서 보고 말거네."

 


慶州崔氏 忠南 宗親

 


窄口徑<착구경>moon_mad_angry_edition-28 src채찍을 쏘다


<<濟物能廻造化心제물능화조화심>>"사물을 건짐에 능히 조화심 돌아"

<<驅山堰海立功深구산언해입공심>>"산을 몰아내고 바다를 엎어 전공을 깊게 세웠네."

 <<安南*眞得安南界안남진득안남계>>"안남 땅을 얻어 안남이 경계를 이루니"

<<縱此蠻兵不敢侵종차만병불감침>>"이제부터 남만 오랑캐 병사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리라."


 《계원필경집 권17


慶州崔氏 湖南 宗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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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 崔致遠의 生涯『시와문장』

 

최 상 범 역음


(동국대학교 대학원 농학박사, 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교수, 부총장)


 

내 고향 경기 남양주에는 나의 선조이신 경주 최씨 관가정공觀稼亭公(고운의11세손 청)의 묘소가 있고,또한 참판공參判公(14세손 광문光門), 승지공承旨公(18세손 몽윤夢尹)의 묘소도 있다.

내가 어렸을 무렵 해마다 음력 10월 상달 초 시제時祭때 전국에서 가까운 일가一家 어른들이 찾아오시어 며칠씩 사랑채에 묵으시면 이 어른들이 고운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시었기에 고운孤雲 자손子孫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딱지본 소설《최고운전》을 내게 종종 읽어 주시었고 신비한 내용이 있어 흥미로웠으며, 고운 자손임을 자랑해주시었다.

경주 최씨 문중門中에서 맏 문중이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이다. 관가정觀稼亭의 유래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태조 3년(1394)최 분을 좌찬성左贊成에 임명하고 불렀으나 거절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불사이군不事의 충절忠節을 지켰다.

조선 이 태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은거隱居하고 있던 산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정자에 관가정觀稼亭이란 편액扁額을 내린데서 기인한 것이다.

고려말 검교정승檢校政丞분은 이성계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하자 개풍開豊 광덕산廣德山 두문동杜門洞으로 도피逃避하였다가 이곳 마저 화가 미치자 양주목楊州牧 풍양현豊壤縣 (지금의 남양주 진건읍 마른개울, 송릉 아랫독정;묘소와 모송재慕松齋가있다)으로 은둔隱遁하였다. 그리하여 남양주는 조선조 초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5백 년간 나의 고향땅이 되었으며, 그 윗대 선조는 신라 천 년을 경주에서, 고려조에는 개성에서 4백여 년을 살아왔다.

나의 7대조이신 원字(고운의 23대손) 분께서는 동래부사 최명상이 수집하여 남기고 간 자료들을 그의 손자 공급公伋과 당시의 김포군수 최성진崔星鎭등 3인이 각고의 노력으로 조선 정조 원년(1777)에《경주최씨족보慶州崔氏族譜》를 발간하신 분이시다.

중국과 수교하고 나서 강택민姜澤民 중국 국가 주석이 방한하여, 이례적으로 국회 연설을 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사적 방한을 1천 년 전의 양국 간 관계에서 풀어 나갔고, 그 첫 손가락으로 민간 외교관 고운 최치원 선생을 꼽았다. 당시 세계사의 중심이며 문화 제국이던 당나라에서 신라국의 최치원이 보여준 활약과 명성은 그만큼 커다란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더욱이 강택민은 고향이 고운 선조께서 고병高騈의 막사에서 일하던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였기에 고운의 역사적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금년이 한중수교 20년이 되는 해이다. 강텍민姜澤民 주석의 후원으로 중국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에 최치원崔致遠 기념관記念館이 세워졌고, 이곳에서 경주 최씨중앙종친회崔氏中央宗親會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양주시揚州市와 공동으로 제향祭享 행사를 해오고 있다. 현재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에 관해서는 대부분 문학, 사상, 철학, 종교, 사회등 학문적으로 연구한 논문이 대부분이며, 일반인들이나 후손들이 고운에 대해서 이해할만한 자료들이 부족한 실정이다.

필자는 고운孤雲 선조先祖의 30대 손으로서 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간 봉직했던 동국대학교에서 정년을 하고 명예교수로서 학부와 대학원에서 수년간 해왔던 강의마저 끝내고 그동안 수집해 왔던 고운에 관련된 문헌들을 정리하여, 고운孤雲 선조의 생애生涯을 살펴보고, 시와 문장文章들을 시기별로 엮어서 독자가 쉽게이해 할 수 있도록 시도하였다. 또한 기존에 발표된 자료들 중에서 한자漢字는 마치 자수刺繡에서 한 땀 한 땀 바늘로 찌르듯 옥편에서 찾아 원래의 뜻을 살리고 현대 감각에 맞도록 고심하였다.

이 책을 엮으면서, 내 유년기에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쳐 주신 할아버지의 은혜恩惠에 새삼 감사드리며, 또한 내가 박사 학위를 받았고, 반평생半平生을 봉직奉職해 온 동국대학에서 익힌 불교 지식도 크게 도움이 된 것에 감사한다. 경주慶州 최가崔哥인 나로서 젊었던 시절, 경주 인근 해병 제1상륙사단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으로 근무하였고, 반평생을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경주慶州 캠퍼스에서 근무한 것은 경주慶州  최씨崔氏의 시조始祖이신 고운孤雲 할아버지의 음덕蔭德과 인연因緣이라고 본다.

고운孤雲 자손子孫들이 이 책을 통하여 선조先祖의 생애生涯와 시와 문장文章을 이해理解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무한한 영광榮光이 될 것이다.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하며

2012년 8월 24일

엮은이 최상범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