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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仕二君의 忠 臣 觀稼亭公 (諱)崔 淸님 尊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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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군의 충절을 하늘이 알고 있었다는 려말의 충신 


觀稼亭公 (諱)崔 淸님 尊影 

 


 

> 콘텐츠목차 > 인물 사전 > 최청(崔淸)


인물 사전


최청(崔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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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재(直哉)
관가정(觀稼亭)
생년 1344(충혜왕 5)
졸년 1414(태종 14)
시대 조선 전기
본관 경주(慶州)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최자운(崔子雲)
풍양조씨(豊壤趙氏)
묘소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상세내용]


최청(崔淸)에 대하여



1344년(충혜왕 5)∼1414년(태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직재(直哉), 호는 송음거사(松蔭居士)관가정(觀稼亭).

부친은 고려 후기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지낸 최자운(崔子雲)이고, 모친은 풍양조씨(豊壤趙氏)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출하였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이제현이 “후일 반드시 대학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홍건적개성에 침입하여 위태롭게 되자, 공민왕은 수도를 버리고 안동(安洞)으로 피난하였는데 그도 왕을 호종하여 보필한 공으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정당문학(政堂文學) 시랑(侍郞)에 올랐다. 1365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임명되었는데, 당시의 권력자 신돈(辛旽)이 전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였다. 이 때 신돈의 폐해를 지적한 탄핵 상소를 올려 신돈의 미움을 받았고, 공민왕의 냉대로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좌천되었으나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었다.

신돈이 귀향 간 후인 1375년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임명되어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1378년(우왕 4)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나갔고, 1384년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명(明)에 파견되었다가 홍무제(洪武帝)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1384년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임명되었으나 조정의 혼란에 실망하여 모든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여러 현인(賢人)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산야에 멀리 숨어 맹세코 세상에 나가지 않고 나무나 하고 밭을 갈면 아는 자 그 누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양주(楊州)풍양(豊壤)에서 여생을 보냈다.

1394년(태조 3) 태조좌찬성(左贊成)으로 임명하여 불렀으나 거절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태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은거하고 있는 산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정자에 관가정(觀稼亭)이란 편액을 내렸다. 그는 이를 보고 탄식하면서 “산의 이름에 임금이 왔다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곳에 거처하겠는가!”하고 조견(趙狷)과 함께 송산(松山)으로 옮겨가 살았다.

임종 시에 자손들에게 “내 비석에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써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개갈(改碣) 시에 잘못하여 조선 태조가 내린 좌찬성의 관직을 적어 넣었더니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전해진다. 묘는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에 있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成宗實錄
南楊州市誌 


[집필자]

김영진


대표명 최청(崔淸)
성명 최청(崔清)


성명 : "최청(崔清)"에 대한 용례



수정일 수정내역
2005-11-30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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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高      墟      村 

- 文昌侯 孤雲 崔先生 遺蹟保存會報 -


자는 직재(直哉),호는 관가정(觀稼亭)으로 판봉상시(判奉常侍) 자운(子雲)의 아들이며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선생의 11세손이다.


1344년(고려 충혜왕) 갑신(甲申)년에 태어나 일찌기 이익재 (李益齋)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 정당문학시랑(政堂文學侍郞)이 되고 뒤이어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올랐다.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감언을 서슴치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신돈(辛旽)의 지나친 적폐(積弊)를 과감하게 지적 이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차례 탄핵상소(彈劾上疏)를 올렸으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신천감무관(信川監務官)으로 벼슬이 좌천되어 쫓겨나기도 했다.


그후 (공민왕 23년)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우왕 8년)에는 사복정(司僕正)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이때 明나라 홍무(洪武)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궁궐 출입시 허리에 차는 장신구)를 하사 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李太祖))가 왕위에 오르자 권귀(權貴)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풍양(楊州豊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했다.


이태조(이성계)가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음으로 왕이 몸소 세번이나 송산으로 행어(幸御) 조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불사이군(不仕二君)의 충절을 끝까지 지껴 이를 거절하게 되자 태조는 그 뜻을 높이 기려 송산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공이 살고있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 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은둔 생활을 하면서 이목은(李牧隱),이행촌(李杏村),우양호당(禹養浩堂) ,길야은(吉野隱) 등 제현과 도의로서 교우 채미가(採薇歌)로 비분강계를 달래며 전조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 1414년 (태종 14년) 9월28일 향년 71세로 한어린 일생을 마쳤다. 


공이 임종때 자손들에게 내 비석(碑石)에는 반드시 려조관함(麗朝官啣)을 쓰라고유언을 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이조소함(李朝召啣)인 좌찬성(左贊成)이라고 비에 새겼드니 갑자기 천둥이 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자손들은 불효 막급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려조관함을 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세인들은 공의 려조에 대한 충절을 하늘도 알고 있었다고 높이 숭모하고 그 충의(忠義)를 영세토록 기리기 위해 이곳에 신도비를 세우고 임천(林川), 현서천에 도충사(道忠祠)와 서산(瑞山)에 모송사(慕松祀)를 창건, 공의 신위와 영정을 봉안 해마다 향례를 치루고 있다. 


 


고허촌 (글관가정공 20세손 崔 榮 夏 이사)


1985. 7. 20. 印刷 6호 13면

發行人:  崔         炎

編輯人:  崔        
   幹:  崔   學   鳳


 社團法人 文昌侯 孤雲 崔致遠 先生 遺蹟保存會

 慶尙北道 慶州市 皇吾洞 326-1(태종로6)

 054-74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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