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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이군의 충절을 하늘이 알고 있었다는 려말의 충신
觀稼亭公 (諱)崔 淸님 尊影
최청(崔淸)
[요약정보]
[상세내용]
최청(崔淸)에 대하여
[참고문헌]
[집필자]
김영진
성명 : "최청(崔清)"에 대한 용례
高 墟 村
- 文昌侯 孤雲 崔先生 遺蹟保存會報 -
자는 직재(直哉),호는 관가정(觀稼亭)으로 판봉상시(判奉常侍) 자운(子雲)의 아들이며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선생의 11세손이다.
1344년(고려 충혜왕) 갑신(甲申)년에 태어나 일찌기 이익재 (李益齋)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 정당문학시랑(政堂文學侍郞)이 되고 뒤이어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올랐다.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감언을 서슴치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신돈(辛旽)의 지나친 적폐(積弊)를 과감하게 지적 이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차례 탄핵상소(彈劾上疏)를 올렸으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신천감무관(信川監務官)으로 벼슬이 좌천되어 쫓겨나기도 했다.
그후 (공민왕 23년)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우왕 8년)에는 사복정(司僕正)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이때 明나라 홍무(洪武)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궁궐 출입시 허리에 차는 장신구)를 하사 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李太祖))가 왕위에 오르자 권귀(權貴)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풍양(楊州豊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했다.
이태조(이성계)가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음으로 왕이 몸소 세번이나 송산으로 행어(幸御) 조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불사이군(不仕二君)의 충절을 끝까지 지껴 이를 거절하게 되자 태조는 그 뜻을 높이 기려 송산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공이 살고있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 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은둔 생활을 하면서 이목은(李牧隱),이행촌(李杏村),우양호당(禹養浩堂) ,길야은(吉野隱) 등 제현과 도의로서 교우 채미가(採薇歌)로 비분강계를 달래며 전조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 1414년 (태종 14년) 9월28일 향년 71세로 한어린 일생을 마쳤다.
공이 임종때 자손들에게 내 비석(碑石)에는 반드시 려조관함(麗朝官啣)을 쓰라고유언을 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이조소함(李朝召啣)인 좌찬성(左贊成)이라고 비에 새겼드니 갑자기 천둥이 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자손들은 불효 막급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려조관함을 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세인들은 공의 려조에 대한 충절을 하늘도 알고 있었다고 높이 숭모하고 그 충의(忠義)를 영세토록 기리기 위해 이곳에 신도비를 세우고 임천(林川), 현서천에 도충사(道忠祠)와 서산(瑞山)에 모송사(慕松祀)를 창건, 공의 신위와 영정을 봉안 해마다 향례를 치루고 있다.
고허촌 (글관가정공 20세손 崔 榮 夏 이사)
1985. 7. 20. 印刷 6호 13면
發行人: 崔 炎
編輯人: 崔 植
主 幹: 崔 學 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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