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인사말씀
안녕하십니까?
30세손 창근 입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임기를 마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회유와 협박도 있었으며 고소. 고발도 당했습니다.
아직도 한 종인은 종중을 상대로 고소를 남발하여 선량한 종인들을 선동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감언이설에 속지 마시길 당부 드립니다.
종인 여러분
6년 동안 종사를 보면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오직 정도를 걸어 왔습니다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격려와 용기를 주시고 따끔한 충고도 마다하지 않으신 종인 여러분들 덕분이며 이 자리를 빌어 갑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존경하는 종인 여러분
혼란과 분열의 아픈 과거가 또 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종중의 발전을 위해 많은관심 가져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종인들과 화합하고 어우러질 수 있는자리, 정을 나누며 서로를 기억하고 우리의 옛 조상을 기리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11 월 1 8 일
경주최씨 참판공파 종중회
30세손 회장 최창근
종손 격려사
종친 여러분 반갑습니다.
30세손 준식 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종사에 관심을 갖고 참석 해 주신 종친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전 투구로 얼룩졌던 종사가 종친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회장님의 부단한 노력으로 체계적이고 안정 되었습니다.
해마다 추향제를 모시고 정기총회를 치루면서 우리 종중이 조금씩 발전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 참 뿌듯합니다.
종친 여러분
자신의 뿌리를 알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그 사람의 인생은 가치가 달라집니다.
전통을 중시하고 예의 법도를 소중히 여기신 우리 조상님들의 뜻을 받들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종중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끝으로 추향제와 정기총회를 위해 준비 하느라 고생하신 회장님과 집행부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종친들 모두 행복하시고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뵙길바라며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판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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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의 유래 《慶州崔氏의 由來》
경주(慶州)로 관(貫)한 최씨(崔氏)는 우리 나라 모든 최씨(崔氏)의 대종(大宗)으로 신라(新羅) 개국전(開國前) 돌산(突山)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을 득성(得性) 원조(元祖)로 하고 그의 후손(後孫)인 문창후(文昌侯) 휘(諱) 치원(致遠)을 시조(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있다. 비교적 다른 성씨(姓氏)에 비하여 고려이후(高麗以後)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면서 벼슬을 멀리 하고 학문(學問)에 힘써 많은 학자(學者)를 배출(輩出)하였으며 국난(國難)에 처(處)할때마다 충의(忠義) 열사(烈士)가 지방 도처에서 발기(勃起)하여 가산(家産)은 물론(勿論) 가솔(家率)까지도 돌보지 않고 활약(活躍)하였다.
이는 오직 구국(救國)의 일념(一念)에서 우러난 애정(哀情)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왔으며 두려움을 모르고 왕 (王)앞에서 직간(直諫)하는 기질(氣質)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불의(不義)에 굴(屈)할 줄 모르는 품성(稟性)에서 대변(代辯)해 주고 있다.
비단 경주(慶州) 최씨(崔氏)뿐 아닌 거의 모든 최씨(崔氏)의 기질(氣質)이요. 품성(稟性)이라 하겠으며 가위 최씨(崔氏)다운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이 아닌가 사료(思料)된다.
시조(始祖)인 문창후(文昌侯) 휘(諱) 치원(致遠)은 12세의 어린나이로 이역(異域) 수륙만리(水陸萬里)를 이웃 고을에 가듯이 당(唐)나라에 유학(留學) 길을 떠나 심신(心身)을 연마(硏磨)하고 오직 학문(學問)에만 심취(心醉)하여 6년을 하루 같이 학문탐구(學問探究)에 열중(熱中)한 끝에 당시(當時) 중원(中原)의 대국(大國)인 당(唐)나라 과거(科擧)에 단번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당(唐)나라에서 선주률수현위(宣州溧水縣尉)로 시사(始仕)하여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이르러 자금어대(紫金魚袋)≪紫金魚袋란 붉은 금(金)빛으로 수(繡)를 놓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주머니로서 천자(天子)의 대궐(大闕)을 하시(何時)라도 출입(出入)할 수 있는 하나의 신표(信標)≫를 하사(下賜) 받는 특전(特典)의 영광(榮光)을 가졌다.
당(唐) 나라에서 황소(黃巢)가 반란(叛亂)을 일으키자 병마도통(兵馬都統) 고변(高騈)이 이를 토벌(討伐)할 때 공(公)이 반적(叛賊) 황소(黃巢)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었는데 황소(黃巢)가 이 격문(檄文)을 받아보고 자신(自身)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하는 명문(名文)을 지음으로써 당(唐) 천하(天下)에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그 후 귀국(歸國)하여 신라(新羅)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의 상소(上疏)를 올려 난세((難世)의 국정(國政)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져 가는 조정(朝廷)에서 시행(施行)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산수간(山水間)을 해매며 정자(亭子)에 오르고 송죽(松竹)을 벗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세월(歲月)을 보내던 중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간 후 뒷 소식(消息)이 없어 그의 종적(蹤跡)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가 남긴 문장(文章)과 필적(筆蹟)은 오늘날 학문(學問)의 조종(祖宗)으로써 만인(萬人)의 추앙(推仰)을 받고 해동(海東)의 명현(名賢)으로 문조(文廟)에 배형(配亨)되어 전국(全國) 유림(儒林)의 행사(行事)로 춘추(春秋)에 봉향(奉享)하고 있으며 그 학문(學問)은 영세불멸(永世不滅)의 교훈(敎訓)이 되고 있다.
또 당대(當代)의 학자(學者)이었던 휘(諱) 승우(承祐)는 당(唐)나라에 유학(留學)하여 3년만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문장(文章)으로 명성(名聲)을 날렸고 휘(諱) 언휘(彦撝) 역시 당(唐)나라에 유학(留學)하여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고려(高麗)가 개국(開國)하자 태자태전(太子太傳)에 올라 고운(孤雲) 선생(先生)과 더불어 당대 (當代) 3최(崔)로 문명(文名)을 떨쳣다.
문창후(文昌侯)의 손자(孫子)인 승로(承老)는 신라(新羅) 원보(元甫) 휘(諱) 은함(殷含)의 아들로 12세에 논어(論語)를 암송(暗誦)하여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경탄(驚歎)을 받고 원봉성(元鳳省) 학사(學士)에 올랐으며 특(特)히 시무책28조(時務策28條)를 올려 고려(高麗) 왕조(王祖)의 기반(基盤)을 닦는데 커다란 공헌(貢獻)을 했다.
후손(後孫)인 관가정공(觀家亭公) 휘(諱) 청(淸)은 고려말(高麗末)에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올랐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은거(隱居)하엿다. 사성공(司成公) 휘(諱) 예(汭)는 조선조(朝鮮祖) 초(初)에 청백리(淸白吏)로 유명(有名)하였고 그의 손자(孫子)인 정무공(貞武公) 휘(諱) 진립(震立)은 조선(朝鮮) 선조조(宣祖朝)에 무과((武科)에 올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서생포(西生浦)에서 왜적(倭敵)을 격파(擊破)하고 권율(權慄) 장군(將軍)과 함께 오산(烏山) 등지에서 대승(大勝)을 거두고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험천(險川) 싸움에서 적(敵)의 대군(大軍)을 맞아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후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되었다. 그리고 사성공(司成公) 후손(後孫)으로 수운(水雲) 휘(諱) 제우(濟愚)는 동학(東學)의 창시자(創始者)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敎理)를 내세워 보국안민(保國安民)의 대도(大道)를 포교(布敎)하여 종내(終乃)는 동학혁명(東學革命)으로 승화(昇華)되었다. 또한 굴욕적(屈辱的)인 일제(日帝) 치하(治下)에서 우리 민족(民族)의 자주(自主) 독립(獨立)을 위(爲)해 남모르게 사재(私財)를 털어 독립운동(獨立運動) 자금(資金)을 아낌없이 헌금(獻金)하여 뒷 받침 하였다는 경주(慶州)의 10대(代)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輩出)하고 12대(代)에 이은 만석(萬石)꾼 최준(崔浚)이 있다. 해방(解放) 후 상해임정(上海臨政)의 주석(主席)이었던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先生)께서 조국(祖國) 땅에 첫발을 내딛고 곧바로 경주(慶州) 땅으로 달려가 손을 마주 잡고 서로 감격(感激)하였다는 바 이 역시 사성공(司成公)의 후예(後裔)로 경주시(慶州市) 교동(校洞)에 자리한 그의 저택(邸宅)은 1969년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에서「신라(新羅)의 집」으로 선정(選定)하여 관리(管理)하고 있다.
화숙공(和淑公) 휘(諱) 현우(玄祐)의 후손(後孫)으로 한국(韓國)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 제1인자(第一人者)로 추앙(推仰)받는 면암(勉庵) 휘(諱) 익현(益鉉)은 조선조말(朝鮮朝末) 철종조(哲宗朝)에 문과(文科)에 올라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재임시(在任時) 대원군(大院君)에게 경복궁(景福宮) 중수(重修)를 중지(中止)할것과 당백전(當百錢)의 폐지(廢止)등을 상소(上疏)하여 대원군(大院君)의 실정(失政)을 탄핵(彈劾)하다가 한 때 제주도(濟州島)로 유배(流配)되어 가기도 하였으나 그 후 풀려났으며 고종(高宗) 31(1894)년에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시작으로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내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내 머리카락은 못 자른다」하며 대항(對抗)하다가 투옥(投獄)되기도 하였다.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締結)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倭敵)과 혈전(血戰)중 체포(逮捕)되어 대마도(對馬島)로 유배(流配)되어 갔다. 배일(排日)의 거두(巨頭)답게 그곳에서 주는 음식물(飮食物)은 적(敵)이 주는 것이라하여 거절(拒絶)하고 단식(斷食)하던 중 마침내 세상(世上)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시신(屍身)이 부산포(釜山浦)에 운구(運柩)되자 조국(祖國)의 동포(同胞)들이 이 소식을 듣고 운집(雲集) 해 통곡(痛哭)하였는데 그 곡성(哭聲)은 산천(山川)을 진동(震動)시키고 눈물은 한(恨)으로 맺혀 온 부산(釜山) 땅을 적시었다는 기록(記錄)과 함께 선생(先生)께서 순국(殉國)하신 병오(丙午)(1906)년 11월17일 인시(寅時)에 누구보다 먼저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만사(輓詞)로 적문(吊問)했다는 그 만사(輓詞)와 원세개(袁世凱)의 만사(輓詞)가 전(傳)하기로 등재(登載)한다.
伊藤博文(이등박문) 輓詞(만사)
起拜韓王又哭供(기배한왕우곡공) 대한(大韓)왕(王)께 절올리며 님을 위해 곡(哭)하올제
臨風灑淚雨蒼空(임풍쇄려우창공) 흐르는 눈물 바람에 날려 온 하늘에 비가오네.
名山何處占幽宅(명산하처점유댁) 고국(故國)땅 그 어느곳에 님의 유택(幽宅) 정하올가
坐以夷西向魯東(좌이이서향노동) 그 좌향(坐向) 묻지 말라 백이(伯夷)의 서산(西山)에서 노중연(魯仲連)의 동해(東海)여라.
袁世凱(원세개) 輓詞(만사)
燔木沈羅兩可攀(번목심라량가반) 불타죽은 개자추(介子推) 빠져죽은 굴원(屈原) 충성(忠誠)함께 이룬님이신데
觸髏何史費東還(촉루하사비동환) 그 유해(遺骸) 무었하려 동(東)녘 고국(故國)에 옮기려나.
更無餘地葬公山(경무여지장공산) 애닲어라. 님이 묻힐 그 산(山)하나 따로 없네.
한편 광복직후(光復直後)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환국(還國)하자 당시(當時) 주석 (主席)김구 선생(先生)을 비롯하여 이시영(李始榮 선생(先生)등 임정요인(臨政要人) 다수(多數)가 참석(參席)한 가운데 1946년 4월 23일을 기(期)하여 맨먼저 면암선생(勉庵先生)의 위패(位牌)가 봉안(奉安)된 모덕사(慕德祠)에 찾아가 환국고유제(還國告由祭)를 올렸다 하니 이는 분명(分明) 민족사(民族史)의 정통성(正統性)을 밝히는 증언(證言)의 현장(現場)으로서 앞으로 거국적(擧國的) 추모(追慕)의 기향화(其香火)가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끊임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고유제문(告由祭文)에 의하면 「민족(民族)의 이름으로 정성(精誠)을 다하여 간략하게 제(祭)를 올리고 있아오나 차후(次後) 우리 정부(政府)가 수립(樹立)되는데로 다시 국가적(國家的)인 공식행사(公式行事)로서 예(禮)를 갖추어 올리겠습니다」라고 고유(告由)한지 43년이 지난 지난 1989년 4월 23일자(字)로 우리 정부(政府)가 새로히 중건(重建) 단장(丹粧)한 모덕사(慕德祠)에 국가(國家)에서 정(定)한 표준영정(標準影幀)을 봉안(奉安)하고 정부요인(政府要人)이 참석參席)하여 국가(國家)의 대제(大祭)를 올렸으니 이또한 우리 민족사(民族史)의 일관(一貫)된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불러 일으킨 쾌거(快擧)의 장(場)이었다 할 것이다.
충열공(忠烈公) 휘(諱) 광위(光位)는 초휘(初諱)가 광훈(光勳)으로 고려 명종조(明宗朝)에 왜적(倭賊)을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광위(光位)로 사명(賜名)되고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내사령(內史令)에 이르러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그의 후손(後孫) 휘(諱) 형한(亨漢)은 호(號)가 영사정(永思亭)으로 연산군조(燕山君朝)에 군(君)에게 왕도(王道)가 무너지는 것을 한탄(恨歎)하면서 백관(百官)의 법도(法道)와 질서(秩序)를 바로 잡으려고 직간(直諫)을 거듭하며 계하(階下)에서 부복(俯服)하여 충간(忠諫)하였으나 가납(嘉納)되지 않자 그 자리에서 자진(自盡)하였다 하며 이 외에 고려(高麗) 정치사(政治史)에 빛나는 휘(諱) 량(亮) .휘(諱) 여해(汝諧)등을 비롯하여 문명(文名)을 떨친 휘(諱) 백윤(伯倫) 그리고 조선조(朝鮮朝)에 창의(倡義)한 절의(節義) 신하(臣下) 휘(諱) 동보(東輔)와 선조조(宣祖朝)의 선무공신(宣武功臣) 경상우후(慶尙虞侯) 휘(諱) 봉천(奉天).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된 휘(諱) 중복(仲福).한말(韓末)의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 혁혁(赫赫)한 휘(諱) 창식(昌植).휘(諱) 봉환(鳳煥)등은 경주최씨(慶州崔氏)에서 배출(輩出)한 명사(名士)들로서 그들의 기품(氣稟)은 최씨(崔氏)의 맥(脈)을 이어받은 충직(忠直)한 명문(名門)을 더욱 빛나게 하여 세인(世人)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관향지(貫鄕地)의 연혁(沿革)
慶州는 慶尙北道 東南部에 위치(位置)하며 신라(新羅)의 발상지(發祥地)로서 영일만(迎日灣)으로 들어가는 형산강(兄山江)상류(上流)에 펼쳐진 평야(平野)를 중심(中心)으로 사방(四方)이 산(山)으로 둘러 쌓인 천연(天然)의 성곽(城郭)을 이룬 지형(地形)이다.
고전(古典)에 보이는 서기전(西記前) 517년에 개국(開國)한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이 이에 해당(該當) 된다 하겠다.
사로(斯盧)는 즉(卽) 서라벌(徐羅伐)로서 혁거세간(赫居世干)이 개국(開國)한 곳이며 후(後)에 신라(新羅)로 개칭(改稱)되었으며 탈해왕(脫解王) 9(65)년에 시림(始林)에 계이(鷄異)「김알지(金閼智) 탄생(誕生) 전설(傳說)」가 있어 이를 계림(鷄林)이라 개칭(改稱)하고 국호(國號)도 계림(鷄林)이라 하였다. 그후 기임왕조(基臨王朝)에 다시 신라(新羅)로 고쳐 부르다가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신라를 병합(倂合)한 후 옛 신라(新羅) 왕도(王都)를 경주(慶州)라 이름함으로써 경주(慶州)라는 명칭(名稱)의 시초(始初)가 되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23(940)년에 안동대도독부(安東大都督府)를 두고 읍(邑)을 다스리는 관청(官廳)으로 경주사(慶州司)를 두었다. 성종(成宗) 6(987)년에는 동경(東京)이라 하여 유수(留守)를 두었고 목종조(穆宗祖)에 락랑군(樂浪郡)으로 강등(降等)되었으며 현종조(顯宗祖)에 다시 경주(慶州)라 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이어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경주목(慶州牧)으로 개칭(改稱)되었고 그 후 유수(留守) 또는 지관(知官)을 두는 등 변천(變遷)을 거듭하다가 충열왕조(忠烈王祖)에 계림부(鷄林府)라 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15년(1415)년에 다시 경주부(慶州府)로 하고 세조조(世祖朝)에 진(鎭)을 두었으며 고종(高宗) 32년(1895)에 군(郡)으로 되었다. 1955년에 경주시(慶州市)로 승격(昇格)되었으며 경주군(慶州郡)의 여타 (餘他)지역(地域)은 월성군(月城郡)으로 되었다.
서기 1977년 5월 12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