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聖地 巡禮)
교과서여행
평생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 성품처럼... 고양시 산길 끝에 소박하게 자리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 장군 존영(崔瑩 將軍 尊影)
고려공신(高麗功臣)
최영 장군 묘(崔瑩 將軍 墓)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지정종목: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경기기념물 제23호
지정일: 1975년 09월 05일
시대 고려 종류/분류 묘
최영 장군 기봉사 사당(崔瑩 將軍 奇峰祠 祠堂)
최영장군 사당(崔瑩將軍 祠堂)
041)630-1221
소재지: 충청남도 홍성군 홍복면 대인리 산39 -7 보내기
고려 말기 명장이자 공신인 최영 장군(崔瑩 將軍, 1316 ~ 1388 )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홍성 노은리는 최영이 출생한 곳으로서 삼봉산 중턱에 사당을 재건하였으며 2007년 진입로 포장과 자연석 계단을 설치하여 새롭게 정비하였다. 사당 건물에는 ‘기봉사(奇峰祠)’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내부에는 최영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홍성군에서는 1995년 제1회 최영 장군 영신제를 거행한 것을 비롯하여 2007년에도 대제를 올려 장군의 충의와 공덕을 기리고 있다.
고려시대 무신인 최영 장군, 최영 장군은 1316년 고려 충숙왕 때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나 16세 때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을 교훈 삼아 청렴결백한 관리였다. 고려의 건국 이상인 옛 고구려 땅 만주 벌판을 되찾는데 노력하였으며 홍건적을 격파하고 1360년 남쪽 지방을 괴롭히는 왜구를 섬멸하고 1375년 홍산대첩 등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조민수를 꾀어 요동 진군을 포기하고 5월에 개경으로 역진격한다. 최영은 6월에 남은 군사로 대적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한다. 곧바로 체포되어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을 가서 같은 달 합포로 갔다가 7월에 충주, 다시 12월에 개경으로 옮겨져 참수된다.
고려의 충신으로 큰 공로를 이룩했으나 직속 부하에게 배신을 당하고 참수까지 당하게 되는 억울한 생이 부각되어 한국의 무속에서는 그를 장군신으로 좌정시킨다. 최영 장군은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 및 남이(南怡, 1441~1468)장군과 함께 한국의 주요 장군신으로 모셔지지만 이 가운데 최영 장군이 가장 널리, 가장 열렬히 숭앙되고 있다.
무속적 세계관에서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저승세계에 안착하지 못하고 구중을 떠도는 것으로 나타난다. 무속은 이들 영혼을 달래고 천도하는 굿을 통해 해결한다. 그중 억울하게 죽은 왕이나 장군 및 유명한 공인 등은 무속의 신적 세계관에서 신격으로 추대되고 숭상의 대상이 된다.
최영의 활동 범위는 전국에 걸쳐 있기 때문에 관련 사당과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관련 유적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개성 덕물산의 최영장군사(崔瑩將軍祠), 강원도 철원군과 홍성군의 최영 장군 생가, 홍성문화제의 최영 장군 영신제,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 기슭의 최영장군묘, 경남 통영시의 최영장군사당, 제주도 추자면의 최영장군사당, 부산 수영구의 무민사(武愍祠), 부산 동구의 무민공 최영장군사당, 경남 남해시 미조면의 최영장군사당 무민사, 충북 충주시의 기봉영당,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최영장군당 등이다.
아버지의 유언을 평생 가슴에 품고, 정말 황금을 돌같이 여기며 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최영 장군 (1316~1388) 입니다. 그는 고려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면서도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 백성의 존경을 받았어요. 최영 장군이 살던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고려 말은 홍건적(紅巾賊)과 왜구가 침입하고, 중국에서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세워지면서 나라 안팎이 혼란하여 왕권마져 흔들리던 시기였지요. 어려서부터 체격이 좋고 용감했던 최영 장군은 왜구와 홍건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워 고려 우왕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려의 충신으로 이름 높은 정몽주를 비롯하여 훗날 조선을 세운 이성계, 정도전 등과 함께 고려를 이끌었지요.하지만 서로 생각이 달랐던 이들은 '요동 정벌' 을 계기로 갈라서고 말아요.
새로 세워진 명나라가 고려에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최영 장군은 이 기회에 명나라의 요동을 쳐서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자고 주장합니다. 이미 홍건적 등 외적을 물리친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요동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된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 합니다. 우왕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전쟁터에 나간 이성계는 위화도라는 섬에서 군사를 되돌리지요. 이 사건이 조선 건국의 발판이 된 '위화도 회군'(1388년)이에요.
개성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요동 정벌을 위해 많은 군사를 이성계에게 내준 우왕과 최영 장군은 이를 막을 도리가 없었지요. 이성계에 의해 유배를 떠난 최영 장군은 결국 1388년에 처형당하고 맙니다. 죄목은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하고,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며 권세를 탐한 죄' 였습니다. 평생 나라를 위해 강직하게 살아온 그는 자신의 죄명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내가 죄 없음은 하늘이 알고 있다. 내 평생 탐욕을 가졌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최영 장군의 묘에는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져요.
물론 600여년이 지난 지금은 풀이 무성하지요.
최영 장군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자락에 있어요. 최영 장군 묘를 찾아가는 길목에 아주 큰 묘역이 있어서 헷갈리기 쉬운데, 그곳은 조선 태종의 넷째 아들이자 이성계의 손자인 성녕대군의 묘랍니다. 성녕 대군은 우리가 잘아는 세종대왕의 동생으로, 열네살 어린 나이에 홍역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최영 장군 묘는 이곳에서부터 마을 길을 지나, 걷기 좋은 산길을 따라 올라 가야 나옵니다. 평생 황금 보기를 돌같이 여긴 장군의 성품처럼 참 소박한 모습이지요. '최영 장군 묘' 라는 비석 뒤로는 최영 장군의 아버지이자 고려 후기 문신인 최원직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임후남 여행작가
1분상식: 홍건적(紅巾賊)이란 누구를 말하나요?
중국 원나라 말기, 차별받고 가난했던 한인과 남인들이 머리에 빨간(紅) 두건(巾)을 두르고 일으킨 반란을 '홍건적의 난' 이라고 합니다. 홍건적은 한때 중국내에서 세력을 크게 키웠으나, 내부 분열을 겪으며 통일 정권을 이루지 못했어요. 원나라 군대에 쫓기던 이들은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가 최영.이성계 등 고려 장수에게 격파당해 괴멸하지요. 그러나 홍건적 장수였던 주원장은 살아남아 세력을 키운 뒤 훗날 명나라를 세웁니다. 고려는 홍건적을 크게 물리쳤지만, 두 번의 전쟁을 치르느라 나라 힘이 약해져 결국 멸망의 길을 걷고 말아요.
2014년 6월11일 28면 조선일보 기사
孤雲 崔 致 遠 先生 "詩"
"돌아갈 수도 없는 나그네의 어려움을 읊은 글" 途中作도중작
<<동표서전로기진東飄西轉路歧塵>>'동서로 떠도는 몸 먼지 이는 갈림길에'
<<독책리참기고신獨策羸驂幾苦辛>>'홀로 파리한 말 채찍질하기 얼마나 고생했는고'
<<불시불지귀거호不是不知歸去好>>'돌아감이 좋은 줄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지연귀거우가빈只緣歸去又家貧>>'돌아간댔자 집이 또한 가난한 것을'
慶州崔氏 忠毅公 (諱)夢亮 宗中會
慶州崔氏 仁川公 (諱)濟 宗親會
성지 순례(聖地 巡禮)
慶州崔氏 通政公 (諱)商哲 宗親會
<<추 향 제, 秋享祭>>
1.일 시;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 오전 09시30 분
2.장 소; 충북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산 8의1번지 이탄 선산
3.휴식및총회장소; 충북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115의5(충민로346) 봉사재(奉杞齋) 석촌가든2층
4.교 통 편; 서울 동서울터미널 괴산행승차 → 괴산터미널하차 → 검승리(이탄행)승차 배나무여울하차
총무: 최영조 (042) 584-9999 010-4528-9999
☞대중교통편; 수도권 지하철 2호선 강변역 하차 → 시외버스 동서울 터미널
☞버 스 편; 서울 동서울 터미널에서→ 괴산행 승차 → 괴산 터미널 하차
→ 괴산 터미널에서 검승리 (이탄)행 승차 → 배나무여울 하차→나그네슈퍼
☞네비게이션; 충북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이탄) 115의5번지
추향제(秋享祭)
매년 음력10월 첫째 일요일
경주최씨 통정공 상철님 묘역
관광/명소 > 묘소
봉사재(奉祀齋)
충북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115의5(충민로346) 봉사재(奉杞齋)나그네슈퍼
043-833-0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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