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창후(文昌候) 고운선조(孤雲先祖) 최치원(崔致遠)의 11세 직계 손이시고 父친은 자운(子雲)으로 고려 판봉상시사(判奉常侍事)이며, 母는 풍양조(趙)씨 광벽(光壁)의 여식으로 정경부인이시고 공민왕 甲申(1344)년에 공을 生(장자)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리 청명하고 문학을 좋아하며 이익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던바 특히 문학의 깨우침은 물론 거동 또한 뭇사람에 뛰어나 이선생께서 기특히 여기시어 증손녀 와 혼인토록 하였다.
공민왕 辛丑(1361)년 문과에 올라 보문각 학사(寶文閣 學士)가 되었는데 그해 10월에 홍건족란의 형세가 매우 급박하여 왕이 향차할 때에 왕을 호종하는 등 공적이 많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차하였다. 乙巳(1365)년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제수 되었는데 그때 신돈이 권세를 잡아 조정 신하들이 아부하여 그를 따랐으나 공은 오히려 상소를 올리어 논박을하여 신돈을 꾸짖으니 신돈의 간교에 폄강(貶降)되어 신천 땅 감무관으로 보내오니 공은 주민들에게 은의로 선정하여 3개월만에 태평을 이루었다.
乙卯년(1375) 사복시정(司僕是正)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명황제로 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고 다음 甲子(1384)년 본국에 돌아와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제수 되었다 때마침 간흉들이 정권을 전횡하자 개탄하시며 끝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들어가 은둔하시며, 조정사에 대하여 일체 듣지도 보지도 않으셨다. 그 후 이태조(이성계)가 등극하니 뇌은공(耒隱公) 전귀생(田貴生) 등 당시 제현들과 같이 두문동에 들어가 각기 자신에 뜻을 말하기를 공께서는 멀리 산야에 숨어 세상을 잊고 나무와 밭을 갈면 그 뉘라서 알리오 하고 드디어 양주땅 풍양으로 은둔했다.
조선조 甲戌(1394)년 좌찬성(左贊成)에 제수하고 수차 불렀으나 입조하지 않으니 이태조가 친히 세 차례나 찾아 왔으나 끝내 굴복(屈伏)하지 않고 문을 잠근 채 말이 없으니 이태조는 더 이상 찾지 않았다 하여 그 곳에 있는 산을 어래산(御來山)이라 하였고 그 집을 송정(松亭)이라 하였다 후 현인들은 그 문을 관가정 이라고 하고 또한 호(號)로 칭하고 있다.
공께서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산 이름이 어래산 이니 내 어찌 이곳에 살으리요 하고 송산 조견과 같이 송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스스로 송은거사(松陰居士)라고 하니 이는 송도(松都)를 잊지 못하는 정의가 아닌가 한다. 이 사실은 충의록(忠義錄)정원일기(政院日記)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 등에 수록되고 또한 고려사(高麗史)와 황명종신록(皇明從臣錄)에 기록되어있다.
공께서는 고려 충혜왕(忠惠王) 甲申(1344)년에 탄생, 조선조 태종(李朝太宗) 甲午년(1414) 9월28일 壽 71세로 卒하시니 양주 풍양 독정 요곡 축좌지원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하독정)에 장사지내고 매년(음력)10월6일 후손들이 묘제를 올리며 지금도 최정승 골이라 하며, 임천(서천) 도충사(道忠祀)와 서산 모송사(慕松祀)에 영정(影幀)을 모시고 매년 춘향제(春享祭)를 봉행하고 있다.
배위는 경주 李씨이니 좌의정(左議政)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따님이오 경서와 역사를 두루 잃어 여사풍 이었으며 공민왕 丙戌년(1346)출생하시고 태종 乙丑(1409)년4월27일 享年 64세에 卒하시니 공의 묘지에 부장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검교관제가 시행된 것은 당나라가 신라왕에게 검교태위 를 봉책하면서 부터이다. 5대를 거처 송나라 로부터 견원과 고려 태조로 부터 성종에 이르는 역대왕이 훈관의 제수를 받았다. 검교는 고위관직에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승진 대상자가 늘어나는 추세 속에 이들의 승진 의욕을 제고하고자 실직이 아닌 훈직을 주어 승진의 기회를 부여하자 는 것이었고 고려 말 조선초에 훈직으로서의 성격과는 달리 검교거관 제 (檢校去官制)였다. 즉 관리로써 장기봉사자에 대한 공훈을 기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1품에서 9 품까지의 검교거관을 두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실록 외 여러 문서에 기재된 문헌에서 알기 쉽게 간추렸다.)
관가정(觀稼亭) : 백성이 농사짖는 것을 임금이 관람하는 정자로 되어 있다.(삼국지, <이조농업기술사>에 기록)
영정
파조인 관가정공 휘청(淸)의 영정(影幀)은 국내 두 곳에 봉안되어 있다.
모송사(慕松祠) : 충남 서산시 지곡면 회천리 산114-4
당진 병석씨의 말씀에 따르면 本 영정은 누구의 작품이며, 언제 그려져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선조들의 기록에 의하면 부성사(富城祠)를 건립하여 고운 시조(始祖)만 모시고 있다가 1921년 청(淸)의 영정을 함께 모시게 되었는데 그 후 영서지방 유림들이 두문동 72현에 기록이 없다하여 1979년도 본전(本殿)이 아닌 동재, 서재로 분리하여 모시게 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도리가 아니라 하여 서산, 당진, 홍성, 태안의 후손들의 정성을 담아 모금하여 1981년 모송사를 건립하고 영정도 모시어 지금까지 음력 3월5일에 춘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도충사(道忠祠)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원산리(야인)
여기에 모셔진 영정은 누구의 그림이며, 언제 만들어 졌는지 알 길이 없다. 도충사를 건립 후에 어느 때 고운 시조님의 영정과 같이 모셔졌는지도 알수 없으며, 다만 충의공(忠毅公) 몽양(夢亮)의 영정을 함께 모신 후 지금까지 세분의 영정을 봉안 후손들이 모여 음력 3월15일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두문동72현에 명단은 없으나 고려 숭의전사(高麗崇義殿史)에 ○ 경현사지(景賢祠誌) ○ 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 ○ 산록(散錄) ○ 항절실 항절반 봉안(抗節室 抗節班 奉安) 31현 ○ 두문동 실기보유(杜門洞實記補遺) 19인에 가담된 고려충신임을 확실한 재료이다.
묘소와 재실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49번지(하독정)
묘소는 선조들에 의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1900년 이전의 사실(史實)이나 고전(古傳)은 없다. 다만 1927년에 신도비를 세운 것을 보아 묘소가 제대로 유지되어 왔다고 보아야 한다. 1981년 후손 종수 회장 재임 때에 사초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에 훼손되어 1999년5월15일에 후손 동필 회장 재임 때에 사초하고 수오씨 근찬으로 묘비를 건립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모송제(慕松齊) 와 신도비(神道碑)
정확히 기록된 고서와 고증이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관가정 대종회가 구성될 당시 총무를 보던 밀양의 용식씨가 선조들의 말씀을 전해 듣고 추정하여 기록했으며, 1900년부터는 정확한 고증을 토대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세운 신도비는 풍양(현위치)에 거주하고 있던 동네 어른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공(公)의 신도비가 개천가 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사실을 확인할 고증은 없다. 그러나 1927년 2월 권익상 근찬으로 비(碑)가 건립되었는데 한국전쟁(6,25) 때에 총탄을 맞아 파손되어 子 연지(淵止)묘소 제절 밑에 묻혀져 있던 비(碑)를 발견하였으며, 비문(碑文)의 탁본이 현재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다. 지금의 신도비는 1960년10월 후손 양해씨 근찬으로 묘지 근방에 건립했다. 파조 청(淸)이 은거하신 건물(관가정)은 위치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며, 1900년 전에 3칸짜리 초가집으로 재실이라기보다는 제물을 준비하는 가옥으로 추정되며 이름도 없고 지금의 장소도 아니었다. 다만 1958년 종회를 구성한 뒤 1960년에 후손 영범 초대회장 재임 때 후손들의 성금으로 토지를 마련하여 재실도 건립하고 신도비도 지금장소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에 건립한 재실에 모송제 현판을 달아 현재까지 보존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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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 墟 村
- 文昌侯 孤雲 崔先生 遺蹟保存會報 -
자는 직재(直哉),호는 관가정(觀稼亭)으로 판봉상시(判奉常侍) 자운(子雲)의 아들이며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선생의 11세손이다.
1344년(고려 충혜왕) 갑신(甲申)년에 태어나 일찌기 이익재 (李益齋)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 정당문학시랑(政堂文學侍郞)이 되고 뒤이어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올랐다.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감언을 서슴치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신돈(辛旽)의 지나친 적폐(積弊)를 과감하게 지적 이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차례 탄핵상소(彈劾上疏)를 올렸으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신천감무관(信川監務官)으로 벼슬이 좌천되어 쫓겨나기도 했다.
그후 (공민왕 23년)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우왕 8년)에는 사복정(司僕正)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이때 明나라 홍무(洪武)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궁궐 출입시 허리에 차는 장신구)를 하사 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李太祖))가 왕위에 오르자 권귀(權貴)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풍양(楊州豊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했다.
이태조(이성계)가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음으로 왕이 몸소 세번이나 송산으로 행어(幸御) 조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불사이군(不仕二君)의 충절을 끝까지 지껴 이를 거절하게 되자 태조는 그 뜻을 높이 기려 송산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공이 살고있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 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은둔 생활을 하면서 이목은(李牧隱),이행촌(李杏村),우양호당(禹養浩堂),길야은(吉野隱) 등 제현과 도의로서 교우 채미가(採薇歌)로 비분강계를 달래며 전조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 1414년 (태종 14년) 9월28일 향년 71세로 한어린 일생을 마쳤다.
공이 임종때 자손들에게 내 비석(碑石)에는 반드시 려조관함(麗朝官啣)을 쓰라고유언을 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이조소함(李朝召啣)인 좌찬성(左贊成)이라고 비에 새겼드니 갑자기 천둥이 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자손들은 불효 막급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려조관함을 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세인들은 공의 려조에 대한 충절을 하늘도 알고 있었다고 높이 숭모하고 그 충의(忠義)를 영세토록 기리기 위해 이곳에 신도비를 세우고 임천(林川), 현서천에 도충사(道忠祠)와 서산(瑞山)에 모송사(慕松祀)를 창건, 공의 신위와 영정을 봉안 해마다 향례를 치루고 있다.
고허촌 (글관가정공 20세손 崔 榮 夏 이사)
1985. 7. 20. 印刷 6호 13면
發行人: 崔 炎 編輯人: 崔 植 主 幹: 崔 學 鳳
社團法人 文昌侯 孤雲 崔致遠 先生 遺蹟保存會
慶尙北道 慶州市 皇吾洞 326-1(태종로6)
054-749-0526
※ 찾아 오시는 길
☞대중교통편; 수도권 지하철 7호선 상봉역 하차,<환승>→경춘선,춘천행 승차, →사능역하차,→ 시내버스 202번,165-3번,9번,9-1번,91번 승차, → 진건읍 지나서 하독정입구 하차,→ 용정1리(하독정.마을회관) 도보로 15분거리.
「프란치스코(성 최경환)의 가족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 다니면서 그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돌 자갈밭을 개간하여 연명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1851년 최양업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中)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이며 땀의 순교자라 불리는 최양업 신부와 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아버지 성 최경환. 이들 부자는 당시 유교 이외의 모든 사상이 철저히 배제된 채 사교(邪敎)로 취급받던 천주교를 받아들여 온 몸으로 전파했던 선구자였다.
최경환 성인은 충남 청양, 서울,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 안양 수리산을 거치며 교우촌을 만들었고 아들 최양업은 신부가 된 후 조선에 돌아와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는 교우촌을 일일이 방문해 성사를 주고 복음을 전파했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6개월 만에 무려 다섯 개 도 5천리를 순회하며 교우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며, 이후 장티푸스로 병사하기까지 12년간 교우촌을 일일이 찾아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북 돋우는데 힘썼다.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18세기 중엽. 최경환·양업 부자는 교우촌의 형성과 발전, 정착에 이바지하며 천주교가 조선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그 후손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끊임없는 유랑생활과 박해로 가난을 떨쳐버릴 수 없었으며 이교인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던 후손들이었지만 그들이 지켜내 온 신앙의 결실은 교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가 순교한 뒤 양업 신부의 동생 의정(야고보)과 선정(안드레아), 우정(바시리오), 신정(델네시포로)은 각각 용인과 진천, 여주, 홍천 등지로 뿔뿔이 흩어진다. 이후 산골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이들 형제들 중 둘째 의정과 넷째 우정의 후손들이 교우들이 모여 산다는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으로 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우정의 아들인 최상종
가문의 후손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최양업 신부의 셋째 동생 우정의 아들인 최상종(빈첸시오)이다. 최상종은 당시 풍수원에 모여 살던 수십 여 가구의 신자들을 한데 모아 1888년 강원도 최초의 성당인 풍수원본당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초대 사도회장을 맡은 그는 이후 50여년 간 회장직을 맡으며 풍수원이 한국의 대표적인 교우촌이자 성지로 자리잡는 데 이바지한다.
현재 풍수원에 살며 선산을 지키고 있는 최상종의 손자 현식(75)씨는 『당시 할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이 강원도의 성인(聖人)으로 부를 정도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할아버지가 항상 미사가 끝나면 교우들을 성당 마당으로 모아 신자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설명해 주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현식씨는 『할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전을 나와 성당 밖 마당에 교우들을 모았다』며 『하느님의 집을 소중히 보호하고 신부님께 대한 존경을 표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경환 성인은 전국 방방곡곡에 교우촌을 만들었고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교우촌을 가꿔나가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그 후손은 선대가 일궈놓은 노력의 결실을 교회 공동체인 본당으로 승화시켜 나간 것이다.
최상종은 또 최양업 신부 이력서, 송 아가다 이력서, 최 바시리오 이력서 등 총 세 편의 최신부 일가 이력서를 대필·저술해 한국교회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한다. 송 아가다는 최양업 신부의 넷째 동생 신정의 아내이며 최 바시리오는 최상종의 아버지이다. 이 세 편의 이력서는 최신부의 출생지를 밝혀 내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순교자와 그 후손들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기도 빼 먹으면 지옥행?
최양업 신부의 동생 의정의 증손자인 최기식 신부(원주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 천사들의 집 원장)는 풍수원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최신부는 당시 가족들은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나는 하루일과를 보냈다고 말한다.
부모님의 엄한 꾸중도 꾸중이었지만 기도를 거르면 지옥에 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제가 여섯 살 때였던가요. 저녁 무력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에 가족들이 저녁기도를 바친 겁니다. 기도를 빼 먹었으니 난 지옥에 갈 것이라며 어머니를 안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최신부는 『「신부가 된다는 것은 천리 만리 길을 가는 것」이라며 사제생활의 어려움과 중요함을 일깨워 준 할머니의 이야기를 평생 잊지 않고 있다』며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며 하루를 보내던 유년시절의 신앙생활이 사제로서 살아가는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가 1900년대 초반에 거의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인지 후손들은 한결같이 최양업 신부에 대해서는 선친에게 들은바가 없다고 증언한다. 다만 당시 복자품을 받은 최경환 성인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최현식씨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우리 집안은 순교자 특히 최경환 성인(당시 복자)의 후손이므로 다른 교우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항상 들어왔다』고 말했다. 또 할아버지 최상종은 최경환의 후손인 것은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큰 책임감이자 신자로서의 사명감이 더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행동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고 기도 때마다 강조했다고 회고한다.
원주지역 교회 이끌어
경주 최씨 관가정파인 최경환 · 양업 부자 가문의 후손들은 매년 9월 첫째 주일 강원도 풍수원 선산에서 후손모임을 갖는다. 현재 후손들은 원주지역에 대부분 거주하고 있다. 교우촌을 옮겨 다니던 후손들이 19세기 말 신앙의 자유를 얻으며 자리를 잡은 곳이 풍수원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족보를 잃어버려 가문 전체 현황을 알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매년 모임마다 100여명의 후손들이 참석하고 있다.
지난 95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새롭게 단장한 선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자가와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들어서 있다. 또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가문 선조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최경환 · 양업 부자 가문의 직계 후손 중 성직자는 최기식 신부가 유일하다. 다만 최기식 신부의 조카뻘 되는 용섭, 원섭씨가 현재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사제서품을 준비중이다.
외손 쪽으로는 최기식 신부의 조카인 김영진(원주교구)·태진(군종교구) 신부, 최경환 성인의 다섯째 아들 신정의 외가 후손인 신현만 신부(원주교구)가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5월 4일, 이승환 기자]
[인터뷰] 최양업 신부 후손 최기식 신부
몸소 신자들 찾아 다니며 하느님 사랑 보여주신 분
- 최기식 신부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최양업 신부를 기리며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기원하는 다양한 신앙적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최양업 신부의 후손 최기식 신부(원주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 천사들의 집 원장)를 만나 후손들이 기억하는 최양업 신부의 사제생활을 들어봤다. 최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동생, 최의정의 증손자다.
“최양업 신부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찾아다니며 전교하신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지요.”
최 신부는 최양업 신부가 보여준 땀의 순교 자체가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전하려 먼 거리에도 직접 찾아다니는 전교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
“최양업 신부님께서 사제생활 중 찾아다니는 전교를 몸소 실현하신 것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 자체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사랑으로 전교하셨고, 사랑의 제물이 되고자 하셨으며, 사랑의 사도가 되신 것이지요.”
이러한 최양업 신부의 사랑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통스러운 전교의 순간에도 주님을 통해 사랑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것. 이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바라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최양업 신부님은 깊은 기도 속에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 사랑을 알리기 위해 육체적인 고민과 희생을 이겨내고, 몸소 신자들을 찾아다니셨어요.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꼭 필요로 하는 덕목입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고통 중에도 사랑으로 사는 삶을 가르쳐주셨어요. 이때문에 그분께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성인품에 오르기를 바라는 것보다 이 시대에 걸맞은 성직자로서 그분을 통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신부도 선조 최양업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40년 동안 사제의 길을 걸어왔다. 최양업 신부를 따라 신앙이 전부인 집안에서 사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 신부에게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은 감히 넘을 수 없는 높은 산과 같았다. 최 신부는 후손으로서, 특히 사제로서 부끄럽기만 했다. 사제 서품 후 최양업 신부의 묘소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던 기억조차 오만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제가 최양업 신부님의 후손이라는 점을 꺼내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지금까지 사제로서 그분처럼 잘 살아오지 못했으니까요. 제 자신이 보잘 것 없고, 부끄럽고, 죄스러울 뿐입니다. 사제 서품 후 최양업 신부님 앞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며 ‘나를 위해 도와 달라’고 기도했지만 그마저도 사람들 앞에 내가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기 위함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최 신부는 최양업 신부님의 일대기를 돌아보며, 사제 생활의 덕목이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이는 후배 사제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다.
“사목 자체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활동은 고해성사 같은 성사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으니까요. 또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활동은 움직이는 걸음걸음이 온통 기도였어요. 우리는 과연 이처럼 기도해본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많은 업적을 남기는 사제보다 기도하고, 신자들을 사랑하며, 한 영혼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제상, 그리고 선교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양8경중 제5경인 수리산성지는 천주교 기해박해(1839)당시 교우촌이 있던 장소로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김대건신부와 함께 목회활동을 했던 최양업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시스코, 1805~1839)성인의 묘가 수리산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최경환성인은 우리나라의 김대건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토마스, 1821~1861)의 부친이다.
안양9동 병목안은 병의 목처럼 입구는 좁지만, 마을에 들어서면 골이 깊고 넓다하여 붙여진 자연지명이다.
조선시대에는 과천지방에 속해 있었고, 당시 ‘뒷뜸이’이라 불리던 수리산 골짜기에 혹독한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산수가 화려하고 아늑한 이곳에서 천주교신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담배농사를 짓고 거주하던 터전으로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하여 소위‘담뱃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생겨서 ‘병목골’이라 불리던 수리산은 박해를 피하기 좋은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왔다.
최경환신부는 조선조 헌종 3년인 1837년 7월 그의 일가족(아내 이성례마리아와 신학생 유학간 최양업을 제외한 어린아들 5명)과 함께 유교전통의 천주교신앙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정부의 천주교박해를 피해 수리산 골짜기에 정착,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을 모아 (순교전 3년여 간)교우촌 신앙공동체 터전을 형성하며 천주교신앙 선교활동을 펼친다.
최경환신부는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선교사로 한국에 최초 입국했던 모방신부(1803~1939)에게 신학생을 맡겨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다. 최경환은 아들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상태였고 그러던 중 1839년 천주교를 탄압하던 기해박해사건이 터진다.
하지만 그를 쫓던 발길은 깊은 산속에도 미쳐, 1839년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처형하던 기해박해 당시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된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1839년 7월 31일 일곱 식구 모두 압송되면서, 파란만장한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그의 집을 급습해온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 한명씩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공소회장인데다 아들(최양업)을 유학 보내 신학을 공부시킨다는 죄목을 추가하여 부인 이성례, 자식4명(희정, 선정, 우정, 신정), 그리고 젓먹이(스테파노)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옥에 가두는 등 남달리 혹독한 고통의 형벌이 가한다.
배교하라는 모진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 형벌을 받다가 기해박해가 일어났던 1839년 9월 12일 최경환성인은 그의 나이 34세 때 볼기매(곤장) 110대를 맞은 후휴증으로 그렇게 옥에서 장렬히 순교한다.
그리고 이듬해 1840년 1월 31일 그의 부인 이성례마리아는 용산 당고개에서 그녀의 나이 39세 때 참수된다. 이성례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서 자식들을 돌보지 않았다. 당시 망나니가 천주교인을 참수할 때는 녹슨 칼, 무딘 칼로 하여 여러 차례 목을 베어 고통을 주면서 죽인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4형제는 동냥으로 구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들고 망나니를 찾아가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고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 주세요” 눈물겨운 부탁을 하니,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간청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된 4형제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는 가슴 찡한 일화가 심금을 울린다.
순교자 최성인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였다가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졌으며, 담배촌 성역지는 2000년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가묘와 함께 예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최경환성지에는 성당과 노천예배당과 묘소가 있다. 예수께서 본디오빌라도에게 사형을 선고 받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언덕을 올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한 모습을 단계별로 형상화한 조형물과 함께 순례자들이 그 단계를 묵상하며 예수의 십자가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동산이 있다.
최경환성지는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앙적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 되어 전국 성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경환은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성인 반열에 이름을 올린다.
그는 왕과 백성, 양반과 천민, 남존여비, 장유유서, 적서차별 등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심했던 유교 전통사회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냉대, 그리고 정부의 탄압과 박해 속에 남녀노소 귀천 없이 모두가 천주신앙 안에 하나 되어 하나님을 흠숭하고 이웃끼리 절절한 사랑을 나누는 지상천국을 건설한 분이다.
최경환성인은 엄격한 신분사회에 살면서도 양반으로서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자신의 몸을 낮추어 가난하고 소외된 평민을 돌보며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균분이 실현된 참된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노력한 카톨릭신도이다.
<최경환 성지 안내>
최경환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어 9월 12일 옥사에서 순교 후 잠들어 있는 뼈아픔이 있는 곳이다.
병목안 계곡의 담배촌은 조선초 헌종3년(1837년)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와 담배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천주교인들이 숨어 살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던 이곳 담배골에는 최경환 성인을 기리는 성당과 노천예배당, 묘소(동굴성모상과 가묘)가 있다.
담배촌 성역지는 가묘와 함께 예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초기 한국교회 역사와 신앙적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 되어 전국 성지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수리산성지 경내에서 맘가짐을 경건히 하고 성인의 순교정신을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성인
-1837년 수리산 뒤뜸이에 정착하여 교우촌 신앙공동체를 형성
-1839년 프랑스 모방신부에 의해 공소회장 임명
-엄격한 신분사회를 부정, 신분질서타파, 평등사회주장, 계급 부정
-1839년 기해박해때 40여일의 참옥한 고문과 110대 곤장으로 9월 한양 포도청에서 34세 꽃다운 나이에 순교(최경환은 공소회장인데다 유학을 보낸 신학생의 아버지라 모진 형벌이 가해짐, 옥사)
-절두산 성지에 최성인의 묘소 있음
☉최양업신부(1821~1861)
-최양업(땀의 선교자, 포교)
-김대건신부(피의 선교자)와 마카오 유학
(동기생, 동갑, 최양업신부가 생일이 빠름)
-김대건신부(1822~1846)에 이어 두 번째로 신부가 된사람
-김대건신부가 ‘피의 순교자’였다면 최신부는 ‘땀의 증거자’로 알려질 만큼 이땅에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신 분이다.
☉담배촌
병목안은 병의 목처럼 입구는 좁지만 마을에 일단 들어서면 골이 깊고 넓다하여 붙여진 안양 9동의 별칭이다.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했다하여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해서 ‘병목골’이라 부리던 수리산은 박해시대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계단식 밭, 감나무(집옆에 보통 있음), 집터, 당시 40여가구 피신
-숨어산 흔적, 농사진 흔적있음
-박해시절 당시 거주지터 있음(초가집이 있던 것으로 추정)
-당시 은거하면서 교우촌 공동체를 형성
-당시 후손이 잔류(식당 등 운영)
-교우촌 뒤쪽 안산쪽으로 도망가는 퇴로를 확보
-입구에서는 않보이는 아늑한 곳에 산으로 둘러 쌓인 천혜의 은신처확보
☉고택성당
-황토로 꾸민 성당
-사무실(성지 홍보)
-예배실(미사), 300명 정도 미사와 예배
-최성인의 유해(손가락뼈)를 모시고 있음
-최성인이 거주한 집은 아니고 기념하기 위한 공간
☉순례자 성당
-평일 미사
☉성례마리아의 집
-3층 건물, 식당, 강의실, 회의실, 숙박
☉가묘
-성인의 일부 유해(팔뼈를 모심)와 진토가 포함된 무덤
☉십자가의 길(14처), 야외미사터, 묘역(가묘)
-고택성당 맞은편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최경환 성지 안내, 안양시청 자료인용>
1. 수리산 최경환성지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은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충남 청양군 화성면이 고향으로 부인 이성례(마리아 1800~1840)와 담배촌 (안양9동)에 정착,교우촌을 이루고 천주신앙을 전파하던 중 1839년 천주교를 탄압하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그 해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 온 포졸들에게 압송되었다. 최경환은 배교(背敎)하라는 고문과 회유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 형벌을 받다가 그해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부인 이성례도 그 이듬해 1월 31일 용산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 최경환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명동성당으로 천묘 후 다시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졌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랐다.수리산 성지는 2000년에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새롭게 문을 연 성지이다.
수리산 최경환 성지는 가묘와 함께 예수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며, 전국 각지에서 연중 30,000여 천주교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 최경환(崔京煥)
순조 5(1805) ∼헌종 5(1839)
성인(聖人)이며, 자는 영눌(榮訥). 일명 영환(永煥)으로도 불리우며,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본관은 경주(慶州) 경주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후예이며, 조선조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문창후 고운<17세손>최확(崔確)의 7대손인 <24세손>최한일(崔漢馹)의 손자이다.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崔良業)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서 <25세손>인주(仁柱)의 3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성격이 괄괄했으나 계명를 잘 지킴으로써 후에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다. 그 후 성장함에 따라 우상숭배에 빠진 주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는 참신앙 생활이 어렵다고 보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최초로 이주한 곳이 서울의 벙거지골 (입동笠洞)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집이 재판에 걸려 탕진하게 되어, 강원도 금성(金城)에 일시 거처한 후 이리 저리 옮겨 살다가 정착한 곳이 안양3동 뒤뜸이(후두미동後頭尾洞)였다. 이 마을은 최경환 등 일가와 천주교 교우들이 담배를 경작하며 살았다하여 '담배촌'이라 불리우는 안양에서는 구석진 마을이다. 그는 이곳에서 묵상과 독서에 잠겨 열렬한 사랑과 놀랄만한 종교지식을 얻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헌종 5년(1839)에는 뒤뜸이 마을의 전교회장으로 뽑히게 되었다. 이 해에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데다가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게되자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교우와 외인들에게 주었다. 1839년 7월 31일 기해사옥이 일어나자 포졸들이 체포하러 오자 부인 이성례와 아들(다섯명)에게 '너희들은 여기서 남아도 죽을 것이니 굶주려 죽는 이보다는 서울의 옥중에서 죽으면 훌륭한 치명자(治命)가 될 것 아니냐' 라고 말하며 격려하였다. 그 사이 아내는 먹을 것을 마련하여 날이 새기를 가다려 포졸들에게 먹이고, 교우 40명(일설에는 100명)이 함께 줄을 지어 즐거운 낯으로 마을을 떠나 서울로 발길을 옮겼다. 판관은 형리(刑吏)에게 최경환을 주리형과 꼬챙이로 살을 찌르며 배교(背敎)하겠다는 말이 나올때까지 고문하라고 명했다. 형리는 옷을 벗기고 살이 떨어져 흰 뼈가 보일 때까지 고문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모진 형벌로 1839년 9월 옥에서 사망하였다. 최경환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1930년 명동성당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양화진 성당으로 옮겨져 모셔졌습니다. 그래서 담배촌 성역지에는 수리산공소 신자들에 의해 봉분이 세워졌다. 현재의 봉묘는 그후 다시 세운 것이다. 현재 그가 묻혔던 묘자리 앞에 제대(祭臺)가 있으며, 그 옆에 1965년 9월 12일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큰 돌비석은 후손들에 의해 1984년 4월 15일에 세워졌다. 1984년 5월 6일, 순교 145년이 지나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된 한국천주교 200주년 신앙대회 및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諡聖式)에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선포되었다. [참고문헌] : <헌종실록>, <치명(治命)일기>, <최양업신부와 교우촌>, <최바실리오이력서>, <천주교장내동교회사>, <한국인명대사전전>, <안양문화>, <시흥군지>, <경기인물지>, <한국의 성지(聖地)>, <한국천주교회사>, <최양업신부와 교우촌>, <카톨릭대사전>, <천주교장내동교회사> , 안양시지(安養市誌)
3. 이성례(李聖禮)
정조 24(1800) ~ 헌종 6(1840)
순교자, 본관은 경주로 성인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최양업(토마스)신부의 어머니. 세레명은 마리아. 일성록(日省錄)에는 성례(性禮)로 표기되어 있다.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출생. 18세때 결혼하였고, 서울로 이주하였으나 외교인들의 괴롭힘으로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등지로 이주하였다가 안양시 만안구 안양3동 담배촌에 정착, 남편을 도와 교우촌(敎友村)을 이루었다. 헌종 5년(1839) 을해박해(乙亥迫害)가 일어나자 그 해 7월 31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300대이상의 곤장을 맞고 형조(刑曹)에서도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 현종 6년(1840)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신계동 감리교회자리)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의 성지(聖地)>, <한국천주교회사>, <최양업신부와 교우촌>, <카톨릭대사전>, <천주교장내동교회사> , 안양시지(安養市誌)
문의: 『 문화예술과 문화유산팀 김지석(☎ 031-8045-2474) 』
<주변을 연계한 볼거리>
☉수리산도립공원
해발 489미터 안양시, 군포시, 안산시의 경계로 정상에서 안양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병목안 시민공원
과거 폐광산(골재를 철로에 까는 데 사용)
부부테마공원, 잔디광장, 인공폭포, 웰빙 체력단련시설, 놀이터(당시, 화차 전시), 조경
-병목안 삼림욕장 석탑
최경환 성지 밑으로 내려오면 삼림욕장 입구가 보인다.
개천으로 놓인 다리를 건너 약간 경사진 10분 정도를 오르면 병의 목을 형상화하여, 1990년 5월 27일 삼림욕장 준공과 함께 세운 돌탑을 만나게 된다. 55,700개의 주변 자연석을 모아 높이 7미터 폭 3미터 무게 84톤의 큰 인공탑을 쌓아서 지명도 생각하며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마을의 지세가 병목처럼 초입은 좁고 안쪽은 골이 깊다하여 붙여진 병목안과 수리산을 상징하는 석탑은 주변 돌무더기를 이용, 자연과 인공미를 조화시킨 명물이자 만남의 장소이다. 경치가 수려해 시민들의 산행과 휴식공간으로 사랑 받는 곳이다.
1589년(선조 22) 외숙인 이축(李軸)이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있을 당시, 질병으로 온천을 하던 중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조정에 알려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봉해졌다. 그리고 어모장군(禦侮將軍)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에 임명되었다. 이후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 향년 70세로 타계했다. 사후 이조참찬(吏曹參贊)으로 증직되었다. 묘는 남양주 호평동천마산 자락에 있다.
아들 최몽량(崔夢亮)은 1612년(광해군 4) 임자식년사마시(壬子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2등으로 합격하였고, 1617년(광해군 9) 정사알성문과(丁巳謁聖文科)에 병과(丙科) 3등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南楊州市誌
[집필자]
김영진
수정일
수정내역
2005-11-30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출처:
원주교구횡성 풍수원 성당
송산사지(松山祠址)
2014.05.13 촬영한 전경
송산사(松山祠)는 조선(朝鮮)의 개국(開國)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高麗) 왕조(王祖)와의 절개를 지키며 은둔했던 조견(趙狷), 원선(元宣), 이중인(李中仁), 김양남(金揚南), 유천(兪蕆), 김주(金澍) 등 여섯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제사를 지냈던 사당이다.
조견(趙狷), 원선(元宣),정구 등 세 사람이 먼저 들어온 마을이라하여 삼귀(三歸)마을이라 했다.
조선(朝鮮)정조 22년(1798)에‘삼귀서사(三歸書社)’를 짓고, 조견(趙狷), 원선(元宣),의 위패만 모셨다. 순조 4년(1804)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불렀고, 순조11년 나머지 네 사람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그러나 고종 5년 (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건물이 전부 헐렸다가 1892년 옛 터에 위패만을 모시고 삼귀단(三歸壇)이라 불렀다.
1964년 후손들이 위패석,제단석,병풍석 등을 마련하여 여섯 충신들을 모시고 있다.
1995년의 발굴조사 결과 재실의 남쪽에서 사당터가 확인되었다. 사당터는 북향으로 자리잡고 있어 고려의 왕도인 개성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앞면에 개방된 툇간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산사지는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소규모 사당터이나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특이한 북향으로 배치를 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