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각 파조님 약전 各 派祖님 略傳 >>

오뚜기방송 2016. 3. 23. 14:16




 


관가정공(휘)청파 (觀稼亭公<諱>淸波)



공의 휘는 청(淸)이요 자는 직재(直哉)이며 호는 관가정이시다.


신라 문창후(文昌候) 고운선조(孤雲先祖) 최치원(崔致遠)의 11세 직계 손이시고 父친은 자운(子雲)으로 고려 판봉상시사(判奉常侍事)이며, 母는 풍양조(趙)씨 광벽(光壁)의 여식으로 정경부인이시고 공민왕 甲申(1344)년에 공을 生(장자)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리 청명하고 문학을 좋아하며 이익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던바 특히 문학의 깨우침은 물론 거동 또한 뭇사람에 뛰어나 이선생께서 기특히 여기시어 증손녀 와 혼인토록 하였다.


공민왕 辛丑(1361)년 문과에 올라 보문각 학사(寶文閣 學士)가 되었는데 그해 10월에 홍건족란의 형세가 매우 급박하여 왕이 향차할 때에 왕을 호종하는 등 공적이 많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차하였다. 乙巳(1365)년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제수 되었는데 그때 신돈이 권세를 잡아 조정 신하들이 아부하여 그를 따랐으나 공은 오히려 상소를 올리어 논박을하여 신돈을 꾸짖으니 신돈의 간교에 폄강(貶降)되어 신천 땅 감무관으로 보내오니 공은 주민들에게 은의로 선정하여 3개월만에 태평을 이루었다.


乙卯년(1375) 사복시정(司僕是正)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명황제로 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고 다음 甲子(1384)년 본국에 돌아와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제수 되었다 때마침 간흉들이 정권을 전횡하자 개탄하시며 끝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들어가 은둔하시며, 조정사에 대하여 일체 듣지도 보지도 않으셨다. 그 후 이태조(이성계)가 등극하니 뇌은공(隱公) 전귀생(田貴生) 등 당시 제현들과 같이 두문동에 들어가 각기 자신에 뜻을 말하기를 공께서는 멀리 산야에 숨어 세상을 잊고 나무와 밭을 갈면 그 뉘라서 알리오 하고 드디어 양주땅 풍양으로 은둔했다.


조선조 甲戌(1394)년 좌찬성(左贊成)에 제수하고 수차 불렀으나 입조하지 않으니 이태조가 친히 세 차례나 찾아 왔으나 끝내 굴복(屈伏)하지 않고 문을 잠근 채 말이 없으니 이태조는 더 이상 찾지 않았다 하여 그 곳에 있는 산을 어래산(御來山)이라 하였고 그 집을 송정(松亭)이라 하였다 후 현인들은 그 문을 관가정 이라고 하고 또한 호(號)로 칭하고 있다.


공께서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산 이름이 어래산 이니 내 어찌 이곳에 살으리요 하고 송산 조견과 같이 송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스스로 송은거사(松隱居士)라고 하니 이는 송도(松都)를 잊지 못하는 정의가 아닌가 한다. 이 사실은 충의록(忠義錄)정원일기(政院日記)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 등에 수록되고 또한 고려사(高麗史)와 황명종신록(皇明從臣錄)에 기록되어있다.


공께서는 고려 충혜왕(忠惠王) 甲申(1344)년에 탄생, 조선조 태종(李朝太宗) 甲午년(1414) 9월28일 壽 71세로 卒하시니 양주 풍양 독정 요곡 축좌지원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하독정)에 장사지내고 매년(음력)10월6일 후손들이 묘제를 올리며 지금도 최정승 골이라 하며, 임천(서천) 도충사(道忠祠)와 서산 모송사(慕松祀)에 영정(影幀)을 모시고 매년 춘향제(春享祭)를 봉행하고 있다.


배위는 경주 李씨이니 좌의정(左議政)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따님이오 경서와 역사를 두루 잃어 여사풍 이었으며 공민왕 丙戌년(1346)출생하시고 태종 乙丑(1409)년4월27일 享年 64세에 卒하시니 공의 묘지에 부장 하였다.



  ♣  야수공파 응벽 (野叟公派 應壁) 
  ♣  참판공파 광문 (參判公派 光門) 
  ♣  사천공파 숭문 (泗川公派 崇門) 
  ♣  진사공파  포   (進士公派  包) 
  ♣  매곡공파 숙정 (梅谷公派 淑淨) 
  ♣  덕산공파 흥문 (德山公派 興門) 
  ♣  사과공파 경성 (司果公派 敬誠) 
  ♣  도촌공파 경의 (桃村公派 敬義) 
  ♣  승지공파 신지 (承旨公派 信止) 
  ♣  전서공파 검지 (典書公派 儉止) 
  ♣  사직공파 한지 (司直公派 漢止) 

  상기 파 외 많은 파가 있으나 중복됨으로 기록을 생략함.



검교(檢校) : 고려, 조선시대 의 훈관(勳官) 이다.


우리나라에서 검교관제가 시행된 것은 당나라가 신라왕에게 검교태위 를 봉책하면서 부터이다. 5대를 거처 송나라 로부터 견원과 고려 태조로 부터 성종에 이르는 역대왕이 훈관의 제수를 받았다. 검교는 고위관직에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승진 대상자가 늘어나는 추세 속에 이들의 승진 의욕을 제고하고자 실직이 아닌 훈직을 주어 승진의 기회를 부여하자 는 것이었고 고려 말 조선초에 훈직으로서의 성격과는 달리 검교거관제 (檢校去官制)였다. 즉 관리로써 장기봉사자에 대한 공훈을 기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1품에서 9 품까지의 검교거관을 두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실록 외 여러 문서에 기재된 문헌에서 알기 쉽게 간추렸다.)


관가정(觀稼亭) : 백성이 농사짖는 것을 임금이 관람하는 정자로 되어 있다.(삼국지, <이조농업기술사>에 기록)


영정


파조인 관가정공 휘청(淸)의 영정(影幀)은 국내 두 곳에 봉안되어 있다.

 

모송사(慕松祠) : 충남 서산시 지곡면 회천리 산114-4


당진 병석씨의 말씀에 따르면 本 영정은 누구의 작품이며, 언제 그려져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선조들의 기록에 의하면 부성사(富城祠)를 건립하여 고운 시조(始祖)만 모시고 있다가 1921년 청(淸)의 영정을 함께 모시게 되었는데 그 후 영서지방 유림들이 두문동 72현에 기록이 없다하여 1979년도 본전(本殿)이 아닌 동재, 서재로 분리하여 모시게 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도리가 아니라 하여 서산, 당진, 홍성, 태안의 후손들의 정성을 담아 모금하여 1981년 모송사를 건립하고 영정도 모시어 지금까지 음력 3월5일에 춘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도충사(道忠祠)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야인리46


여기에 모셔진 영정은 누구의 그림이며, 언제 만들어 졌는지 알 길이 없다. 도충사를 건립 후에 어느 때 고운 시조님의 영정과 같이 모셔졌는지도 알수 없으며, 다만 충의공(忠毅公) 몽양(夢亮)의 영정을 함께 모신 후 지금까지 세분의 영정을 봉안 후손들이 모여 음력 3월15일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두문동72현에 명단은 없으나 고려 숭의전사(高麗崇義殿史)에 ○ 경현사지(景賢祠誌) ○ 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 ○ 산록(散錄 ) ○ 항절실 항절반 봉안(抗節室 抗節班 奉安) 31현 ○ 두문동 실기보유(杜門洞實記補遺) 19인에 가담된 고려충신임을 확실한 재료이다.



묘소와 재실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49번지(하독정)


묘소는 선조들에 의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1900년 이전의 사실(史實)이나 고전(古傳)은 없다. 다만 1927년에 신도비를 세운 것을 보아 묘소가 제대로 유지되어 왔다고 보아야 한다. 1981년 후손 종수 회장 재임 때에 사초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에 훼손되어 1999년5월15일에 후손 동필 회장 재임 때에 사초하고 수오씨 근찬으로 묘비를 건립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모송제(慕松齊) 와 신도비(神道碑)


정확히 기록된 고서와 고증이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관가정 대종회가 구성될 당시 총무를 보던 밀양의 용식씨가 선조들의 말씀을 전해 듣고 추정하여 기록했으며, 1900년부터는 정확한 고증을 토대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세운 신도비는 풍양(현위치)에 거주하고 있던 동네 어른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공(公)의 신도비가 개천가 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사실을 확인할 고증은 없다. 그러나 1927년 2월 권익상 근찬으로 비(碑)가 건립되었는데 한국전쟁(6,25) 때에 총탄을 맞아 파손되어 子 연지(淵止)묘소 제절 밑에 묻혀져 있던 비(碑)를 발견하였으며, 비문(碑文)의 탁본이 현재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다.
지금의 신도비는 1960년10월 후손 양해씨 근찬으로 묘지 근방에 건립했다. 파조 청(淸)이 은거하신 건물(관가정)은 위치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며, 1900년 전에 3칸짜리 초가집으로 재실이라기보다는 제물을 준비하는 가옥으로 추정되며 이름도 없고 지금의 장소도 아니었다. 다만 1958년 종회를 구성한 뒤 1960년에 후손 영범 초대회장 재임 때 후손들의 성금으로 토지를 마련하여 재실도 건립하고 신도비도 지금장소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에 건립한 재실에 모송제 현판을 달아 현재까지 보존 사용하고 있다.


 

판서공(휘)강파 (判書公<諱>江波)

 


공의 휘는 강(江)이요 일 휘 유강 (有江)이고 호는 두로(杜老)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선조 (최치원)의 11세손이시고 아버지는 子雲으로 고려판봉상시사요 어머니는 풍양 趙씨 광벽(光壁) 여로 정경부인이다 丁卯 (1357)년 공을(2子) 출생하였다.


공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보위솔(補衛率)에 음사(蔭仕)하다. 甲子(1384)년 문과에 올라 戊辰(1388)년에 비서정사(秘書正字) 중서사인(中書舍人)에 머물다가 문하시랑지제고(門下侍郞知制誥)에 승진하여 봉익대부전법판서(奉翊大夫典法判書)가 되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가 예조판서(禮曹判書)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여주 대송면 계림동에 퇴거하다가 세상을 마치니 그때 계림선생이라 불렀다. 세종 때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증직 되었다. 세종 辛酉(1441)년에 卒 하니 壽 85세이다. 묘는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수곡리 온수동 자좌 이며, 비석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광주 李씨니 랑장 천비(天備)의 딸이요 丙申(1356)년 출생 하시여 태종 乙酉(1405)년에 卒 하시니 享年  50세였다. 묘소는 남편과 같은 자좌에 쌍분이다.


  ♣  사직공파 온손 (司直公派 溫孫)
  ♣  정랑공파 계손 (正郞公派 係孫)
  ♣  생원공파 검손 (生員公派 儉孫)



판서(判書)
1. 조선시대6조(육조)의 장관 또 는 그 직에 있 는 사람 정2품 3대 태종 5년(1405)에 설 치하여 26대 고종31년(1894)에 폐지함.
2. 고려 때 전리사, 군부사, 판도사, 전법사, 예 의사, 전공사의 으뜸 벼슬 또는 그 직에 있는 사람. 이때 어사라 하였음. (정3품)
3. 고려 34대 공양왕 16년(1389)에 상서를 고친 6조의 으뜸벼 슬 또는 그 직에 있는 사람. (정3품)
 


광정공(휘)단파 (匡靖公<諱>鄲波)



공의 휘는 단 이요 호는 광정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시조 (최치원)의 12세손이시고 부(父)는 집현전학사이신 호(澔)이며 문창후 직손인 9세 유경(有慶)의 2자 수운(峀雲)의 손자이시며 출생은 미상이다.


우왕 6년(1380)판사로서 부정 안창길과 함께 서북면에 파견되어 요동의 소란한 정세를 정탐하였고 당시 우왕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 당한 문달한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진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함께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기도 하였다. 뒤에 풀여나 1384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경상도 순문사 박위와 함께 상주 중묘현에서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1388년 요동정벌(遼東征伐)을 단행할 때 안동대원수(安東大元帥)로서 좌군통도수 조민수의 휘하로 출정하여 위화도회군의 공을 세워 궁마를 하사 받기도 했다. 공양왕 2년(1390) 한양부윤(漢陽府尹)을 거처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고 회군공신에 녹훈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정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되고 이듬해 다시 무진회군의 공이 참작되어 익대개국원종공신(益戴開國原從功臣) 3등에 책록 되었고 (고려사,고려사절요 태조실록)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제수 되었으며, 현재 대구시 동구 도동에 후손들의 정성으로 제단을 건립하여 매년 추모행사를 거행한다.


배위는 정부인 李씨이며, 판서 경지(敬之)의 질녀이시다.(안포은정몽주 수필)



  ♣  참봉공파 종윤 (參奉公派 宗潤)
  ♣  진사공파 재능 (進士公派 在能)
  ♣  학생공파 동선 (學生公派 東先)
  ♣  우락제파 동보 (牛酪齊派 東輔)
  ♣  한천공파  인   (寒川公派  認)
  ♣  다천공파 동률 (茶川公派 東嵂)
  ♣  대엄공파 동집 (臺嚴公派 東集)
  ♣  향엄공파 동직 (香嚴公派 東直)
  ♣  풍계공파  호   (楓溪公派  湖)
  ♣  사직공파  식   (司直公派  湜)
  ♣  충의공파  유   (忠義公派  洧)
  ♣  판서공파  징   (判書公派  澄)
  ♣  감찰공파 중연 (監察公派 仲淵)
  ♣  정랑공파 재원 (正郞公派 在源)

 


광정대부 : 고려 때 문관의 품계 종2품 25대 충렬왕 1대년(1275)에 금자광록대부를 고친 이름으로 충렬왕 24년(1298)에 폐지, 충렬왕 34년(1310)에 종2품 의 상으로 개정 31대 공민왕 5년(1356)에 폐지, 공민왕 11년 (1362)에 다시 정2품으로 하였다가 21년 (1372)에 폐지 됨.

 


자헌대부 : 조선조 때 정2품의 문무관의 관계(官階) 기초부터 정2품의 문관 및 무관에게만 주었으나 26대 고종2년(1865)부터 문무관, 종친, 의빈도 이 관계(官階)를 썼음.

 

판서공(휘)현진파 (判書公<諱>賢進波)

 


공의 휘는 현진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선조 (최치원)의 12세손이며 문창후 직계 9세손 유경(有慶)의 2자 수운(峀雲), 수운의 손자 (호(澔)의 2자)이며 父는 집현전학사이신 호(澔) 이시다.


공은 고려 전공조판서 병마사(典工曹判書兵馬使)이시고 이조때 벼슬 판서 이시었다.


묘는 경기도 이천면 여월동에 있다.

 


병마절도사 : 조선 때 각지방에 두어 병마를 두어 지휘하던 종2품의 무관 각도에 1-2명을 두었다 병마도절제사를 7대 세조12년(1466)에 개칭 한것

 


판서공진파 (判書公諱津波)

 


공의 휘는 진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11세손이시며 직계 9세손 유경(有慶)의 2자 수운(峀雲) ,수운의 2자 이다.


父는 합문제후이신 수운 이시다 공은 고려조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시고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하며, 조정사에 일체관여하지 않았다 이 기록은 충의록에 실여 있다.

 


 ♣  원수공파 지철 (元帥公派 之哲)
 ♣  참봉공파 호남 (參奉公派 好男)

 


판도판서 : 고려 중엽의 관직의 하나 판도사의 으뜸벼슬 31대 공민왕11년(1362)부호상서를 고친 이름 뒤에 호저전서로 고침 조선 3대 태종 때에 호조판서로 됨


문하시랑 : 고려 문하성의 최고의 벼슬 종1품 나라의 정치을 도맡아 살피든 대신임 6대 성종때 두었고 25대 충렬왕1년(1275)에 원나라식으로 첨의중찬 으로 개칭하였다 좌시중,우시중이있어으며 오늘의 수상이나 국무총리 와 같음.


 

상서공(휘)연파 (尙書公<諱>淵波)

 


公의 휘(諱)는 연(淵)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선조(최치원)의 11세손이며 직계 9세손 유경(有慶)의 2자 수운(峀雲), 수운의 3자이다.


고려때 판교상서(判校尙書)이었다. ?후에 조선가 개국되자 이태조가 사조참의(祠曹參議) 벼슬을 하사하여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경기도 여주로 낙향한 후, 다시 산양(山陽)으로 옮겨 살았다.  묘는 경남 산청군 산청읍 기산 사반 곤좌이다.

  


 ♣  미암공파 (薇庵公派) 윤공 (允公)



판교상서 : 조선조 때 승문원 교서관의 정3품 벼슬 사대문서를 맡아보던 당상관으로서 실질적으로 승무원, 교서관을 통설하였다.



좌윤공(휘)해운파 (左尹公<諱>海雲波)

 


공의 휘는 해운이요 호는 좌윤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시조 (최치원)의 10세손이며 직계 9세손 유경(有慶) 의 3자이다. 父 유경은 고려문하시중 양광도 도순찰사 이시었다.


공은 고려 말에 삼사좌윤(三司左尹)의 벼슬를 하시었다.



 ♣  판관공파  제   (判官公派  濟)
 ♣  생원공파  아   (生員公派  我)
 ♣  진사공파  연   (進士公派  演)
 ♣  진사공파  유   (進士公派  游)  

 ♣  진사공파  미   (進士公派  湄)
 ♣  참판공파 성희 (參判公派 成禧)

 


삼사좌윤 : 고려 태조가 태봉의 조부위를 고친 이름 돈과 곡식을 출납과 회계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든 관아 고려삼사의 종3품 벼슬 삼사좌사의 다음 공민왕 11년(1362)에 둠.



길성군(휘)유정파 (吉城君<諱>有井波)

 


공의 휘는 유정이요 호는 길성군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시조 (최치원)의 10세손이시다. 직계 6세손 계훈(繼勳)의 3자 현진(玄進)이고 현진의 2자인 난(渜)이며, 난의 손자이시다. 父는 판사 벼슬을 한 안준(安俊)이며 고려 丙寅(1446)년에 출생하였다.


공은 고려 말 보국숭록 대부(輔國崇錄大夫)의 품계에 오르셨고 고려 중종 때 박원종 성희안과 같이 연산군 폐위를 단행하는 중종 반정에 동참하시여 중종이 즉위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훈 되었으며, 길성군으로 봉군하였다. 배위는 밀양朴씨며, 강원감사 추하(推夏)의 여식이다.

 


 ♣  판관공파 윤 (判官公派 崙)
 ♣  도사공파 호 (都事公派 浩)
 ♣  목사공파 홍 (牧使公派 泓)

 


보국승록대부 : 조선때 정1품 문무관의 벼슬 26대 고종 2년(1865)부터 문무관, 종친의 빈의 품계로도 함께 쓰였음.

 


계림군(휘)탁파 (鷄林君<諱>倬波)

 


공의 휘는 탁 이요 호는 계림군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선조 (최치원)의 8세손이며 직계 6세손 계훈(繼勳)의 2자 현진(玄進), 현진의 3자이시다. 父는 고려 삼사좌윤 현진 이시며, 丙辰(1136)년에 탄생하시었다.


공은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시고 평장사(平章事) 까지 역임하시었다. 시호는 지방이름 계림군이라 봉군 했고 묘는 기록에 충북 충주 신촌 후록 갑좌에 모셨다고 하나 부전(不傳). 후손들의 정성으로 전남 고흥읍 호동리에 설단을 모시고 매년 제향을 지내고 있다.


배위는 안동金씨이고 고려 상철(相哲)의 여식으로 정경부인이 시다. 戊午(1138)년 생이고 졸(卒)은 다만 10월14일로 되었고 묘는 공과 함께 단이다.

  


 ♣  좌윤공파  협   (左尹公派  浹)
 ♣  사성공파 삼용 (司成公派 三龍)
 ♣  부원군파 중화 (府院君派 重燁)
 

평장사 : 내사시랑평장사, 문시랑평장사, 중서시랑평장사, 중서평장사, 문하평장사, 평장정사, 정2 품벼슬


 

판서공(휘)사원파 (判書公<諱>士元波)

 


공의 휘는 사원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선조 (최치원)의 8세 손 이시며 직계 손인 제안(薺顔)의 2자문훈 (文勳)의 손자이시다. 부는 문과 판서이신 연(連) 이시다. 모(母)는 왕씨이시며, 유삼의 여식으로 정부인이시다. 공은 고려조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 하시었다.

  


 ♣  찬성공파 입팽 (贊成公派 立伻)



판도판서 : 고려 중엽의 관직의 하나, 판도사의 으뜸벼슬 31대 공민왕 11년(1362) 부호상서를 고친 이름 뒤에 호조 전서로 고침 조선 3대 태종 때에 호조판서로 됨.

 


충렬공(휘)광위파 (忠烈公<諱>光位波)

 


공의 휘는 광위요 초휘는 광훈(光勳)이며 자는 사격(四格)이고 호는 청량헌(淸凉軒)이며 시호는 충렬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9세손이시며, 직계 제안(薺顔)의 2자 문훈(文勳), 문훈의 둘째 손자 사형(士亨), 사형의 장자이시며, 父는 문하시중 좌찬성 대사을 역임한 사형이시고 母는 완산 李씨 충관(忠寬)의 여식으로 정부인이시다. 공은 공민왕 辛卯(1351)년에 출생하였다.


고려 원종조에 섬 지방의 오랑케를 토평한 공으로 광위라는 사명을 받았다. 고려 때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군 되었고 상장군벽상(上將軍 壁上) 삼한삼중대왕(三澣三重大匡) 내사령(內使令)을 역임하시고 검의정승(檢義政丞)에 이르다. 甲午 (1414)년 享年 64세로 卒하시다.


배위는 두 분이시다. 용궁 全씨 하만(可萬)의 여식이며, 정부인 이시다. 또한 경주李씨 명정(明正)의 여식이며, 역시 정부인(貞夫人)이시다.

  


 ♣  찬성공파  렴   (贊成公派  濂)
 ♣  승지공파 맹제 (承旨公派 孟濟)
 ♣  현감공파 중제 (縣監公派 仲濟)
 ♣  감사공파 계제 (監司公派 季濟)
 ♣  생원공파  정   (生員公派  瀞)
 ♣  정랑공파 경기 (正郞公派 瓊琪)



상장군 : 고려때 각 군영의 으뜸장수 정3품으로 2군 6위에 1명씩 두었다.

 


시중공(휘)상훈파 (侍中公<諱>尙勳波)

 


공의 휘는 상훈 이요.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6세손이며 직계 5세손인 제안(薺顔)의 3자이시다. 父는 고려 대광태사 문하시중 제안이시다.


공은 태자 좌론덕(太子 左論德)이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이시다. 삼중대광 내사령 (三重大匡 內史令)을 역임하시었다.

 


 ♣  찬성공파 종진 (贊成公派 宗津)


문하시중 : 고려 문하성의 최고의 벼슬 종1품 나라의 정치을 도맡아 살피든 대신임 6대 성종때 두었고 25대 충렬왕1년(1275)에 원나라식으로 첨의중찬 으로 개칭하였다 좌시중,우시중이있어으며 오늘의 수상이나 국무총리 와 같음.


삼중대광내사령 : 고려 때 9품향직 의 둘째 등급 고려조에 문무관계의 하나, 성종14년(995)에 개부의 등 삼사로 고침. 문관 의 품계로 사용 함. 고려 때 내사문하성의 종1품 벼슬 6대 성종 1년(982)에 내의령 개칭한 것 임, 1대 문종 때 다시 중서령 으로 고침.


 

성후(휘)주파 (淸城侯<諱>周波)

 


공의 휘는 주 이요, 호는 청성후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5세손 이시며, 3세손 승로(承老)의 2자의, 장남이시다. 父는 사부 상서문하시중 이시며 母는 금영 金씨 상서 겸(兼)의 여식이며 군부인 이시다.


공은 고려조 문과로 벼슬이 우복야(右僕射) 를 역임하고 청성후에 봉해지다. 성종4년 흥국 乙酉년(1985)生이며. 배위는 계림 金 씨이며, 父는 시중 순란(順難)의 여식이다.

  


 ♣  서원후파기우 (西原侯派奇遇)


우복야 : 고려때 상서도성에 속한 정2품 장관벼슬. 장관인 상서령의 버금직위였다. 25대 충렬왕1년(1275)에 폐하고 24년(1298)에 첨의부에 다시 두었다가 곧 폐하고 31대 공민왕 5년(1356)에 구제를 회복하였다가 11년(1362)에 다시 폐함 상서 우복야


 

문순공(휘)환파 (文順公<諱>渙波)



공의 휘는 환이요 호는 문순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최치원)의 6세손 이시고 2세인 은함(殷含)의 2자 윤로(胤老), 윤로의 증손자 이시다. 父는판도정랑 전주판관인 지윤(之潤)이시다.


공은 주부(主簿)의 벼슬을 하시였고 문순의 시호를 받으셨다. 묘는 경주 서문 외 자좌이다. 배위는 월성李씨 시중 원교(遠敎)의 여식이시며, 정부인(貞夫人)이다. 묘는 건위와 상하로 되어 있다.


 

 ♣  전서공파 충양 (典書公派 忠良)
 ♣  부정공파 충보 (副正公派 忠輔)
 ♣  정윤공파 충정 (正尹公派 忠貞)
 ♣  생원공파 충좌 (生員公派 忠佐)
 ♣  시중공파 정해 (侍中公派 正海)


주부 : 고려 때 선부, 사헌부, 춘추관, 전교시 및 그밖에 여러 관청에 속하는 벼슬로 품계는 6품에서 8품까지.


 

학사공(휘)림파 (學士公<諱>琳波)

 


공의 휘는 림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최치원)의 4세손 이며 2세 은함(殷含) 의 2자 윤로(胤老), 윤로의 2자 이시다. 父는 윤로이다. 母는 경주朴씨 문천(文天)의 여식이다.


공은 정헌대부(正憲大夫)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보문각학사(寶文閣 學士)에 이르다. 

 


 ♣  충의공파 운택 (忠毅公派 雲澤)



국자감 : 성균관을 예스럽게 일컫는 말.


대사성 : 고려때 조선때 성균관의 으뜸 벼슬로 대개 대제학이 겸직하였는데 지금의 대학총장과 같음 23대 순조 이후 폐지.


보문각학사 : 고려 16대 예종 11년(1116)에 설치한 관청 경련과 장서를 맡아봄. 25대 충렬왕 1년(1275)에 보문서로 24년(1298)에 동문헌으로 27대 충숙왕 1년(1332)에 보문각으로 고침. 고려 때 한림원, 문한서, 홍문관, 수문전,집헌전,숭문관의 정4품 사림원의 정3품 보문각의 정3품 벼슬.


진사공(휘)종지파 (進士公<諱>宗祗波)

 


공의 휘는 종지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4세손이며 은함(殷含)의 2자 윤로(胤老), 윤로의 3자 이시다. 父는 윤로이며 母는 경주 朴씨 문천(文天)의 여식이다.


공은 고려조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관직에 뜻이 없어 출사하지 않았다.

 


 ♣  선략공파 구정 (宣略公派 九精)


진사 : 소과의 첫 시험에 급제한 사람을 일컬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4대 광종 9년(958)에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를 실시, 부, 송, 미, 시무책으로 처음 진사를 뽑기 시작하였다. (삼사)


 

참봉공(휘)봉조파 (參奉公<諱>鳳朝波)


자는 신우


조선조에 봉상시 참봉(參奉)을 역임하시다.


 

정랑공(휘)호파 (正郞公<諱>灝派)

 


공의 휘는 호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12세손이며, 5세손선지(善之)의 직계 8세손이다. 父는 고려문과 참판이신 홍재(弘載)이시다.


공은 고려 말 정랑 외 문과참판(文科參判) 벼슬을 하시고 문장이 주옥처럼 빛나 세상에 명성을 날리시었다. 후 참의(參議)벼슬을 하였으며, 여생을 충남 공주의 동산에 들어가 정착하시었고 태종 己亥(1414)년에 卒하시다. 묘는 공주의 동산 해좌에 모시었다.

 


 ♣  부제학파 경지 (副提學派 敬止)
 ♣  참봉공파 경인 (參奉公派 敬仁)


정랑 : 고려 때 6조나 고공사 등의 중앙 관청에 속하는 정 5품의 벼슬 25대 충렬왕 1년(1275)에 낭중을 바꾸어 부른 이름으로 공민왕 18년 (1369)에 직랑으로 바꾸었다가 21년(1369)에 다시 본래의 이름으로 고쳤음.


참의: 조선 때 육조에 소속하는 정3품 벼슬 또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정원은1명


 

사성공(휘)예파 (司成公<諱>汭派)

  


공의 諱는 汭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최치원)의 12세손이시며 5세손 선지(善之)의 직계 7세손인 홍재(弘載), 홍재의 2자이시다, 父는 고려 문과 참판을 하신 홍재 이시다. 공은 공민왕 22년 癸丑(1373)에 출생하시다.
공은 이 태조 개국 2년 癸酉(139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병조좌랑(兵曹佐郞), 선공감정, 면천군수,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 등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청백리로도 명성을 날리시였고 세조 甲寅年(1434)에 壽 62세로 卒하시었다.
묘는 울주군 두남면 활전리 능주봉산 아래 건좌에 있다.
배위는 金씨인데 고려 시중이신 관의(寬毅), 의 여식이며, 숙인이시며, 세종 己未年(1439)에 卒하시니 묘는 공과 함께 부장하였으며 후손들이 매년 음력 10월10일 묘제을 지내고있으며 (재숙은 전천제(箭川齌)라고 한다.)
 

공은 태조개국(太祖開國)2년 계유(癸酉)에 문과(文科}에 등재하시고 기주 기성랑 선공정 면천군수등 내외관직(記注 騎省郞 繕工正 沔川郡守등 內外官職)을 두루 역임하시다가  천지성균관 사성(遷至成均館 司成}에 오르시고 청백(淸白)으로 현저(顯著)하시니 사재동경지 경주향안 경주선생안(事載東京誌 慶州鄕案 慶州先生案)하니 곧 본(本)사성공파 (司成公派)의 파선조(派先祖)이시다. 

 


 ♣  낙선당파 상유 ( 樂善堂派 尙柔) 
 ♣  사감공파 득하 ( 司監公派 得河)
 ♣  통예공파 득정 ( 通禮公派 得汀)
 ♣  판관공파 득경 ( 判官公派 得涇)
 ♣  선략공파 상부 ( 宣略公派 尙孚)
 ♣  부사공파 상좌 ( 府使公派 尙佐)

 성균관 : 고려,조선 때 유교의 교육을 맏아보든 관청 국학 또는 국자감으로 불리든 것을 고려25대 충렬왕34년(1308)에 개칭한 것으로 조선 때까지 계승된 최고의 교육기관임 태학,학궁.
 대사성 : 고려,조선때 성균관에 으뜸 벼슬 정3품 대개 대제학이 겸직 하였느데 지금의 대학총장과 같음 조선25대 순조 이후에 폐지됨. 


 

송오공(휘)한파 (松塢公<諱>漢派)

 


공의 휘는 한 이요, 자는 장우(章于) 이며, 호는 송오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12세손이며 5세손 선지(善之) 직계 7세손 홍재(弘載), 홍재의 3자이시다. 父는 고려문과 참판 벼슬을 한 홍재이며, 공은 공민왕 甲寅년(1374)에 출생하였다. 고려조에서 시호위 대장군(神號衛 大將軍)을 역임하고 고려가 망하여 경북 경주 서쪽 송화산 서곡에 은거하던 중 이 태조가 등극하여 벼슬길에 나오도록 권유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하며 세조 癸亥년(1442)에 享年 70세 卒하시다. (읍지에기록되다) 묘는 송화산 유좌. 현(경북경주시현곡면나원리송화유좌)배위는 월성金씨 숙인이시다. 壬申(1392)년에 출생하시고 癸亥(1443)년에 享年52세로 卒하시었다. 묘는 공의 묘지에 부장(附葬) 하다.

  


 ♣  현령공파 복동 (縣令公派 福東)


신호위대장군 : 고려 때 국방을 담당한 6위의 하나 상장군의 통솔하에 있으며 7여의 군대를 거느렸음 조선 초엽 의흥친군의 10위의 하나 상장군과 대장군의 통솔하에 있으며 5영의 군대를 거느렸음 태조4년(1395)에 용기 수위사로 고침. 고려 무관의 정3품벼슬 상장군의 다음이고 31대공민 왕 때 대호군으로 고침


 

문밀공(휘)제파 (文密公<諱>堤派)

 


공의 휘는 제 이요, 시호는 문밀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9세손이며 5세손 선지(善之) 직손 4세 인지(仁祉)의 2자이시며 父는 군기소감이신 인지이시다.


고려 때 합문지후(閤門祗侯)의 벼슬을 하시고 밀성군 으로 봉해졌다.


배위는 개성王씨 부부인 이시다. (한편 공주라는 설도 있다.)

  


 ♣  판서공파 홍기 (判書公派 弘起)


합문지후 : 고려 때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관청, 25대 충렬왕 1년(1275)에 통례문으로 고치고 후에 여러 번 고침 11대 문종이 정7품으로 정하였다가 20대 신종이 참상으로 승급시켰다.


 

성군(휘)종유파 (東城君<諱>宗楡派)

 


공의 휘는 종유 이요, 시호는 충민(忠敏)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7세손이며 5세손 선지(善之)의 2자 적립(適立)의 장자이시며, 父는 월림군 충안 적립 이시다.


고려 인종조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의 벼슬이고 중서시랑 판비서(中書侍郞 判秘書) 이며 동성군에 봉군 되시었다.

  


 ♣  부사공파 석 (府使公派 碩)
 ♣  지정공파 린 (知正公派 磷)


보문각학사 : 고려 16대 예종 11년(1116)에 설치한 관청 경련과 장서를 맡아봄. 25대 충렬왕 1년(1275)에 보문서로 24년(1298)에 동문헌으로 27대 충숙왕 1년(1332)에 보문각으로 고침. 고려 때 한림원, 문한서, 홍문관, 수문전,집헌전,숭문관의 정4품 사림원의 정3품 보문각의 정3품 벼슬.


 중서시랑판비서 : 고려 때 관직 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로 정원 1명 11대 문종15년(1061)에 내사 시랑평장사를 고친 이름. 25대 충렬왕 1년 (1275)에 첨의시랑 참성사 라고 고치었다.


 

문정공(휘)해파 (文正公(諱)瀣派)

 


공의 휘는 해 이요, 자는 언명(彦明)이며, 또는 수웅(壽翁) 이시다. 호는 졸웅 (拙翁)이며 또는 예산농은(猊山農隱) 이라고도 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12세 손이며, 5세손 선지(善之)의 3자 사직(斯直), 사직의 7세손이다. 父는 민부의랑 백윤(伯倫) 이시며, 母는 진양任씨 대호군 사환(仕緩)의 여식이며, 충렬왕 丁亥년(1287)에 탄생하시었다.


공은 계묘년(1303)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관을 거처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되었다.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예문춘추검열로 기용되었다.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된 뒤 1320년(충숙왕 7년) 안축, 이연경 등과 함께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최해 만 급제하여 1321년 요양로개주판관(療陽路蓋州判官)이 되었다가 5개월만에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예문응교 검교(藝文應敎, 檢校), 성균대사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사자갑사의 밭을 빌어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평생에 시주(詩酒)로 벗을 삼고 이제헌 민사평과 가까이 사귀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속세에 아부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남의 선악을 밝힘으로써 윗사람의 신망을 사지 못하여 출세에 파란이 많았다. 그는 독서나 창작에 있어서 스스로 깨달음을 중히 생각하였다. 그가 사제관계를 맺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고려사)에서 기술하였듯이 그의 성격이 대단히 곧고 깨끗하였음을 보여준다. 노년에 지은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은 자서전으로 책 속에서 "구차하게 편함을 추구하지 않고 떳떳이 우졸(愚拙)로 살아가겠노라"라고 한 것은 졸옹이라고 자호한 동기와 같다. 말년에 저술에 힘써 고려 명현의 명시문을 뽑아 동인지문<同人之文> 25권을 편찬하였다. 그가 남긴 문집은 졸고천백<拙藁千百> 2책으로 일본에 있으며 1930년 영인 되었다. (고려사.가정집에기록) 충혜왕 庚辰년(1340)에 享年 54세에 卒하시다. 묘는 예산동쪽에 모시고 후손들의 정성으로 제단을(경남 진주시 미천면 안가리)모시고 향사를 지낸다.


배위는 의성 潘씨 검교평리 영원(永源)의 여식이며, 군부인 이시다. 묘는 공과 합장하다.


배위는 평강蔡씨 통예문제후 여식 군부인(郡夫人) 이시다.

 


  ♣  도사공파  반   (都事公派  盤)
  ♣  학생공파 소언 (學生公派 素彦)


성균관 : 고려,조선 때 유교의 교육을 맏아보든 관청 국학 또는 국자감으로 불리든 것을 고려25대 충렬왕34년(1308)에 개칭한 것으로 조선 때까지 계승된 최고의 교육기관임 태학,학궁.


대사성 : 고려,조선때 성균관에 으뜸 벼슬 정3품 대개 대제학이 겸직 하였느데 지금의 대학총장과 같음 조선25대 순조 이후에 폐지됨.


 

영흥백(휘)지미파 (永興伯<諱>之美派)



공의 휘는 지미 이요, 이태조 선원보에는 휘 천보(天甫)라 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최치원)의 8세손이시며, 5세손 선지(善之)의 3자 사직(斯直) ,사직의 2자 종식(宗識)의 장자이시다. 父는 관지천장 증상서 종식 이시다.


공은 고려 때 쌍성총관(雙城摠官)이고 영흥백에 추증 되었고 묘는 영흥부 동쪽 덕흥사 한봉리 갑좌에 있고 유능(楡陵)으로 부르고 있다.


영흥백최씨지묘(永興伯崔氏之墓)


배위는 인동 張씨 양위(良位)의 여식이며 조선국 대부인이다. 묘는 영흥부 동쪽 이인사 지인리 손좌에 있고 덕화능(德化陵)이다.


조선국대부인장씨지능(朝鮮國大夫人張氏之陵) 조선이 개국되자 명을 내려 비석을 홍무 26년 이태조 2년(1393) 세우다.

 


  ♣  찬성공파  근   (贊成公派  斤)
  ♣  영흥백파 한기 (永興伯派 閑奇)


영 흥 백 : 함경남도 영흥군의 군청 소재지


쌍성총관 : 고려 때 원나라가, 화주 곧 지금의 영흥에둔 관청에서 제일 높은 벼슬.

 


목사공(휘)득용파 (牧使公<諱>得龍派)


공의 휘는 득용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최치원)의 7세손이시며 5세손 선지(善之)의 3자 사직(斯直), 사직의 3자이시다. 父는 중랑장 사직이시다.


공은 양주목사(楊洲牧使)를 역임하시며 모함하는 이가 있어 왕의 견책을 받아 북방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해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왔다.

  


  ♣  생원공파 유천 (生員公派 有川)



양주목사 : 경기도 의정부의 옛 이름 고려 중엽 이후와 조 선 때에 관찰사 밑에서 크고 중요한 고을의 각목을 맡아서 다스리든 정3품 외직 관직이다.


 

화숙공(휘)현우파 (和淑公<諱>玄祐波)

 


공의 휘는 현우 이요, 시호는 화숙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9세손이시다. 父는 고려 정순대부 판도판서이신 애(藹) 이시다.


공은 광정대부 삼사좌사(匡靖大夫 三司左使)을 역임하시였고 시호는 화숙이시다 충숙왕 壬戌년(1322)에 내부령 서해안렴사(內部令 西海按廉使)를 지내시기도 하시었다. 묘는 고양군 구이면 내동(백제읍 성석리)진좌에 모시다. 배위는 청주 慶씨 밀직사 사만(斯萬)의 여식이다.

 


  ♣  석계공파 첨로 (石溪公派 添老)
  ♣  참의공파 유온 (參議公派 有溫)
  ♣  승지공파 유양 (承旨公派 有良)
  ♣  사직공파 유공 (司直公派 有恭)
  ♣  상서공파 상렴 (尙書公派 尙)
  ♣  부윤공파 상겸 (府尹公派 尙謙)



삼사좌사 : 고려 삼사의 벼슬 충렬왕 때 사, 의, 정원 두 사람을 좌우사 각 한사람으로 한 것의 하나 공민왕 11년 (1362)에 정3품을 정2품으로 올림.


광정대부 : 고려 때 문관의 품계 종2품 25대 충렬왕 1대년(1275)에 금자광록대부를 고친 이름으로 충렬왕 24년(1298)에 폐지, 충렬왕 34년(1310)에 종2품 의 상으로 개정 31대 공민왕 5년(1356)에 폐지, 공민왕 11년 (1362)에 다시 정2품으로 하였다가 21년 (1372)에 폐지 됨.


 

직공(휘)광우파 (密直公<諱>光祐波)

 


공의 휘는 광우이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9세손이며 8세손 애(藹)의 2자이시다. 父는 고려 정순대부 판도판서 애 이시다.


공은 고려 때에 밀직사사 (密直司使)의 관직을 하시었다.

 


  ♣  부사공파 계정 (府使公派 繼正)


밀직사 : 고려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및 군기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밀직사사 : 고려 때 밀직사의 벼슬 25대 충렬왕 1년 (1275) 에 추밀원사를 개창 한것 임. (정3품 벼슬)


 

의공(휘)항파 (節義公<諱>波)

 


공의 휘는 항 이요, 자는 내융(內融) 이며 호는 절의 이시다. 성은 崔씨요 본관은 慶州이나 최치원을 시조로 모시지 않고 언휘(彦撝)를 시조로 하고 있다. 언휘의 3자 광원(光遠) 광원의 장자이시다.


父는 비서소감 이신 광원이시다. 공은 광종 23년(972)에 탄생. 성종 때에 20세로서 갑과에 등제하니 왕은 그 재주를 가상히 여겨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에 발탁하였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처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목종 때 거듭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훌륭한 인재를 많이 뽑아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이부시랑 중추원사(吏部侍郞, 中樞院使)를 지냈다. 김치양이 불궤를 꾀하자 채충순 등과 함께 계책을 세워 현종을 맞았다. 현종 즉위 초에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 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였고 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현종에게 청하여 성종이래 폐지된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켰다. 1012년(현종 3년) 이부상서 참지정사 감수국사<吏部尙書參知政事監修國史>를 거처 1016년에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020년 추중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 이듬해에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청하현개국자 식읍오백호<檢校太傅 守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淸河縣開國子 食邑五百戶>의 관작을 받았고 水正功臣(수정공신)이 되었다. 평소 관직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70세가 되기 전에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여 현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불교를 깊이 믿어 경주 황룡사탑의 수리를 자청하여 몸소 감독하기도 하였고, 또 자기 집에 불경과 불상을 만들어 두고 중처럼 지내다가 마침내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1025년 병이 위독 하자 왕은 친히 문병하였고 그가 죽자 몹시 애도하며 후하게 부의 하였다. 과목하고 단결력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하여 집안에 저축이 없었다고 한다. 뒤에 현종 묘정에 배향 되었고 1033년(덕종2년)정광(正匡)에 추증 되었으며 정종은 시중을 가증(加贈)하고 최항의 기일에는 유사에게 명하여 도량을 현화사에 베풀고 명복을 빌었다. 1067년(문종21)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 中書令)이 가중 되었다. 시호는 절의 이시다. (고려사.고려사절요)


현종 16년(1025)에 享年 54세로 卒 하시다. 배는 목종 묘에 배향 하시다.

  


 ♣  승지공파 숭 (承旨公派 崇)


정광 : 고려 때의 관계 태봉의 제도를 따라 정한 것으로 6대 성종 14년(995)에 특진으로 개창하고 26대 충선왕(1310)에 정2품의 하로 했다가 31대 공민왕5년(1356)에 폐하였다.


중서령 : 고려때 중서문성의 종1품의 우두머리 11대(1061)에 내사령을 고친 이름.


광주 지산재 영당 소장 회화류 [최치원 영정]

 


 

 지산재(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 '79.8.3지정)는 통일신라말 대학자인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서 영조 13년(1737)에 지은 사당이다. 원래는 영당을 세워 최치원의 초상만을 모셔왔으나, 조선 헌종 12년(1846)에 지산사를 지어 최치원을 중심으로 최운하·최향안 등을 모셨다. 그 뒤 고종 23년(188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인해 영당만 남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22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지산재는 당시 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sally_friends-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