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1821-1861년) 약전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한국의 젊은 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여 천주교회를 창설한 것은 1784년 겨울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문화나 종교를 이단으로 여겨 오랫동안 배척해 오고 있었고, 따라서 천주교회의 창설은 곧 박해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 초기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고, 첫 번째 박해(1791년)에서부터 네 번째 박해(1801년)에 이르는 동안 이미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크고 작은 박해가 일어남으로써 순교의 행렬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비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박해자의 눈을 피해 가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밀사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그곳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했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으며, 더 나아가 교황청에까지 서한을 보내 한국 천주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831년 9월 9일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성하에 의해 마침내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탄생과 성장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파견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1835년 말, 한국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즉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다음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소년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살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어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양업은 1836년 12월 3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해 6월 7일에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는 마카오로 돌아오게 되었다.
최양업은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의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한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을 기대하고 최양업과 김대건을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후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양업과 김대건은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입국로 탐색을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은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로부터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은 1844년 12월 10일경, 동료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제 서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양업 부제는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에서의 애통한 소식에 대해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며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서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양업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한국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그 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는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 즉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 여 리를 걸어다니며 신자 3,815명을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 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어진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한국 천주교회를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걸려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신부의 신심과 열심,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시 그는 최 신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 신부의 선종 후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성대하게 장례가 치루어졌고 그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Biographical Sketch of Father Thomas Choe Yang-eop
Birth and Upbringing
Father Thomas Choe Yang-eop was born on March, 1821, in the Catholic village of Saeteo, which was in the vicinity of Darakgol, Cheongyang, Chungcheong-do, as the eldest son of Saint Francis Choe Kyeong-hwan and Martyr Maria Yi Seong-rye. Thomas Choe, who spent his early childhood in this place, followed his father from place to place as he tried to avoid the persecution and, finally, moved to Surisan in Anyang, Kyeonggi-do. This village of Surisan was later transformed into a secret Faith community through the coming together of Catholics in ones and twos. Choe Sang-jong, <Personal History of Basil Choe U-jeong> (Transcript), 1939, Director, The Research Institute for Korean Church History.
At the time that the Surisan community was formed and growing,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which had been entrusted with the evangelization of the Joseon Vicarate Apostolic, was attempting to send missionaries to Korea. However, because border surveillance was strict and, in addition, there was danger of persecution, it was not easy for western missionaries to enter Korea. The very first missionary to overcome the obstacles and to enter Korea was a priest, Saint Peter Maubant, who had been born in France.
Towards the end of 1835, Father Maubant, who had been guided into the country by the secret envoys sent by the Korean Catholic Church, immediately began to travel around the Christian communities throughout the country. In the beginning of the following year, he visited the Bupyeong community and selected, as a seminarian, Thomas Choe who was a fifteen-year-old boy with bright prospects.
On February 6, 1836, the chosen seminarian, Thomas Choe, arrived at the house of Father Maubant in Seoul and began to receive Latin language lessons. Francis Xavier Choe Bang-je and Andrew Kim Dae-geon, also picked by Father Maubant as seminarians, arrived on March 14 and July 11, respectively, and they all lived together.
Studies in Macao and Order of Deacon
On December 3, 1836, Thomas Choe and his fellow seminarians placed their hands on the Bible, took an oath of Obedience and set off on the road to study in Macao. They travelled south through the mainland of China and reached the Far Eastern Headquarters of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in Macao on June 7 of the following year. From then on, they studied at the temporary seminary there.
His studies were to continue until 1842 but, in November 1837, he was stricken by the death from fever of his companion, Francis Xavier Choe. Then, in 1839, due to disturbances in Macao, he moved to Manilla and continued his studies but returned to Macao at the end of the same year.
In April, 1842, even before he had finished his studies, Thomas Choe had to leave Macao because France, which wanted a trade agreement with Korea, needed an interpreter on board its fleet. Father Napoleon Libois, superior of the Far Eastern Headquarters at that time, who was waiting for new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because contact had been broken off due to a persecution, managed to get Thomas Choe and Andrew Kim on board two different French ships. However, the French fleet, after arriving at Nanjing, did not wish to proceed any further north, so Thomas Choe and Andrew Kim disembarked and went to Liaodong in order to find a route into Korea.
Thomas Choe then went to Sopalgaja in Manchuria and continued his studies under the tutorship of Bishop John Ferreol, the Coadjutor Bishop of the Joseon Vicariate Apostolic. In 1843, through Father Libois, he joined the Paris-based French Order of the Immaculate Heart of Mary (SS. Coeur de Marie). In the midst of all of this, he heard news of the persecution and martyrdom which had occurred in his homeland. At that time, he sent a letter to his former teacher, Father Legregeois, who had returned to France, and expressed the feelings in his heart as follows :
"Since I am not able to distinguish myself like my father and brothers, my situation is very miserable. I could not get involved like them in the glorious war as a soldier of Christ. I am truly ashamed. They were my worthy compatriots, my brave fellow countrymen! Yet, I am still left languishing with feelings of much weakness and immaturity.
Most gracious God, our Father! Please hear the cries uttered by the blood of your servants! Have mercy on us. Show us your overflowing compassion and the almighty power of your embrace! Will I, O God, someday, be worthy to participate in the great challenge of the priests and the suffering of my brothers, in order to make up for what is lacking in the Passion of Christ and so complete the work of Salvation ?"
Thomas Choe, who had continued his studies, received the Order of Deacon, along with his companion Andrew Kim, from Bishop Ferreol on about December 10, 1844. After Deacon Andrew Kim received ordination to the Prieshood and left with Bishop Ferreol and Father Anthony Daveluy for Korea, Thomas Choe, while staying behind at Sopalgaja with Father Joseph Maistre, strove to discover another route to his homeland.
Ordination to the Priesthood and Return Home
While he was searching for a way to return home, Deacon Thomas Choe met with secret envoy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and heard the news of the 1846 Persecution and the martyrdom of his companion, Father Andrew Kim. He wrote the following letter to his former teacher, Father Legregeois, and conveyed to him the heartbreaking news of his motherland :
"Finally, with the feeling of being released after a long captivity and with hope of getting a welcome from my companions, I went in an elated mood to Byeonmun (fortress gate on the Korea-China border). However, when I reached Byeonmun, my hopes were shattered to pieces. I was thrown into shock by the tragic news. I and my pitiful country felt such grief that nothing could provide consolation. The news of the death of Father Andrew, my dearest companion, will be a cause of deep sadness for you also, Father."
Deacon Thomas Choe, on being restrained by the secret envoy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abandoned his intention of going home and, on reaching the Far Eastern Headquarters which had been moved to Hong-kong, he translated into Latin “The Achievements of the Korean Martyrs.” At the same time, he kept seeking for a way to return to his homeland and, in August 1847, he boarded a French warship and, although he arrived at the shores of Korea, he could not meet up with the secret envoys and so failed in the attempt to reach home.
He then moved to Shanghai and was finally ordained to the Priesthood on April 15, 1849 at Seogahoe church. The ordaining prelate was Bishop Maresca, a member of the Society of Jesus and Ordinary of the Jiang-nan Vicariate Apostolic.
After ordination, Father Thomas Choe left Shanghai in May of that year and went to the area of Liaodong where he began pastoral ministry under the direction of Bishop Saint Simeon Berneux. In November, he once again met Father Maistre and, as a result of making an attempt to go home, he met up with the secret envoy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on December 3 and managed to return to his country. Because of the danger of detection, Father Maistre was unable to enter Korea.
Pastoral Ministry and Death
As soon as he arrived in his homeland, Father Thomas Choe, after meeting with Bishop Ferreol and Father Daveluy, began to visit the Catholics who were hiding in different locations. From the beginning of 1850, during a period of six months, he walked over 5,000 lys (about 2,235. 6 km) through five provinces and visited 3,815 Catholics. After that he settled at the Baithi Christian Village, Jincheon, the centre of his pastoral ministry.
He continued this type of apostolate for about 11 years and 6 months. Not only that, he availed of resting periods to translate the Chinese catechism and prayer book into the Korean language, assisted the entry into Korea of missionaries, sent seminarians to the seminary in Penang, Malaysia and collected data on the martyrs.
It was not easy, of course, to travel around the Catholics who were scattered throughout the whole country. He was sometimes mistaken for a foreigner and chased from the villages and constantly faced the danger of death in raids by the police. once, during his journeys in 1859, he was detected and severely beaten by the police and non-believers, chased from an inn where he had been staying and, half-naked, he wandered through deep snow for the whole night. However, nothing could strip him of his Faith and his love for his country and the Catholics.
At the time of the Kyeongsin Persecution of 1860, Father Choe Thomas and several Catholics were confined to a corner of Kyeongsang-do and had to survive without contact with the Ordinary of the Vicariate Apostolic, Bishop Berneux, and other missionaries. He wrote again to his teacher, Father Legregeois, explaining his dire situation and requesting help for the Korean Church :
"Save us from distress! An awful misfortune has brutally descended upon us. The enemies are encroaching upon us. They are rushing to destroy the inheritance which has been redeemed by your Precious Blood. If you do not help us from on high, we cannot stand up to them.
Most reverend and loving Father (Legregeois), through your fervent prayers, I beg you to please obtain help for us from Almighty God and our Holy Mother.
This is, most likely, my farewell letter. No matter where I go, I have no hope of evading the encircling net which is pursuing me. I earnestly commend our poor and wretched mission field to the unceasing concern and inexhaustible love of many priests."
Fortunately, Father Thomas Choe was able to escape from the place in which he had been confined and he completed his pastoral visitation. After that, he set off to give a report on his apostolic work to Bishop Berneux. However, he contracted typhoid fever on top of exhaustion and died at Munkyeong-eup or the Baithi Christian Village, Jincheon
on June 15, 1861. He was 40 years old.
On hearing the news, Bishop Berneux sent a letter to the Rector of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s seminary, Father Albrand, in which he eulogized Father Thomas Choe's Faith, zeal and the priestly discernment which he had shown at all times, and expressed his deep feelings of loss :
"Father Thomas Choe, because of his Faith, zeal for souls which burned like a fire and his admirable sense of discernment in his ceaseless and invaluable ministry, was a person who was very precious to us. After administering the Sacraments of the bountiful fruits of Salvation, our one and only Korean priest, Father Thomas Choe, departed this life last June on his way to Seoul to give a report to me on the progress of his work.
Father Pourthie, who first heard of the danger with which this kind priest was faced, arrived early enough to give him the Last Sacraments. However, Father Choe was unable to speak. The only two words which escaped from his dying lips were the Holy Names of Jesus and Mary. Father Choe, through very assiduously carrying out the duties of a holy priest for almost 12 years, converted many people and did not cease from striving successfully to save souls.
His death leaves me at a loss. It would be very difficult for western priests to enter, without the risk of great danger, the area, which covers many villages, where he carried out his apostolate. However, the Lord who took him from our midst will provide us with what we need."
When Father Thomas Choe was on the brink of death at a place 170-180 lys (76.01-80.48 kilometers) from Baeron, Father John Pourthie, who was at the seminary in Baeron, heard the news. He immediately rushed to Father Choe's side. However, the only words he could hear were the Holy Names of Jesus and Mary spoken with great fervour. Five months after the death of Father Choe, Bishop Berneux celebrated a solemn funeral ceremony and the remains of Father Choe were laid to rest in a hill behind the Baeron seminary.
오늘날 교우들 보아라 -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열아홉 번째 서한
"모진 환난과 재난에서 저희를 구원하소서"
열아홉 번째 서한에 대하여
열아홉 번째 서한은 최양업 신부가 선종(1861년 6월 15일)하기 전 쓴 마지막 서한으로 선종 약 9개월 전에 작성된 것이다.
서한은 죽림에서 작성됐다. 죽림은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간월산중 교우촌이나 죽전, 간월산 중턱의 죽림굴 등으로 추정된다. 수신인은 ‘리브와 신부님과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신부님들’이다.
죽림에서, 1860년 9월 3일
“먼저 두 분 신부님들께 공동 서한을 보내드리는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이 작은 서한을 두 분께뿐 아니라 모든 경애하올 신부님들께 이렇게 한꺼번에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최양업은 왜 리브와 신부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동시에 편지를 썼던 것일까.
“저는 경신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그분들이 살아계신지 아닌지조차도 모릅니다.”
박해의 칼날이 휘몰아치던 때, 최양업은 불안과 초조함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관할구역에서 17명의 신자들이 체포됐다는 것, 교우들의 전답과 생활필수품을 빼앗겼다는 것 등을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대단히 많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중략) 깊은 산골짜기마다 꼭꼭 숨어 사는 천주교 신자를 모두 체포할 뜻은 없어 보입니다. 대신 포졸들을 사방에 파견해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주민들을 선동해 신자들을 핍박하도록 충동하고 있습니다.”
최양업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혹독한 매를 맞고 그 상처로 순교한 노파, 아버지와 함께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한 16세 소년, 포졸에게 잡혀 고생하다 병석에 누워 숨진 동정녀 등 신앙선조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해, 외인들 중에서 예비신자들이 속출했으므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중략)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기도경문과 교리문답을 얼마나 열성적으로 배우는지 경쟁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번 박해로 인해 외교인들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됐고 마을마다 천주교의 동조자들을 추방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최양업은 조정이나 백성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이어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시작으로 기도를 봉헌한다.
“저희를 재난에서 구원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저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저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높은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 열아홉 번째 서한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 중 하나인 간월산 중턱의 죽림굴 모습.
[가톨릭신문, 2009년 12월 20일, 오혜민 기자]
[경향 돋보기 -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업적에 비추어본 한국교회
류한영
순교와 선교의 영성으로 점철된 생애
최양업 신부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십자가의 능력이 자신의 삶에 응결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렇게 청한다.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저의 이 서원을 신부님의 기도로 굳혀주시고 완성시켜 주십시오”(세 번째 서한).
또, 순교자들의 영적 전쟁에 함께하여 목숨을 바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였다. “부모와 형제를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처럼 장렬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두 번째 서한).
최양업 토마스는 1842년 11월부터 1846년 11월경까지 소팔가자를 주거주지로 삼아 신학공부를 하고 입국로를 찾으려고 하였다.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뒤에 그는 소팔가자의 신학생들을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 1846년 12월 중국 심양에서 쓴 편지에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선교 열정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있다.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 요동의 차쿠 본당에서 베르뇌 신부(후에 제4대 조선대목구장) 밑에서 6개월 동안 중국인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귀국을 준비하면서 한국인으로 중국 선교의 첫 장을 연 것이다. 그해 12월에 귀국한 뒤, 1861년 6월 선종하기까지 1년에 7천 리 이상, 5개 도 100여 개 이상의 교우촌을 다니며 사목순방에 나섰다. 그의 삶은 선교에 대한 열망과 사명감으로 가득했다.
그는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과중한 일에 시달렸다. 메스트르 신부는 1855년 2월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 신부가 한 해에 대부분의 신자를 찾아가 4,500명의 고해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 신부의 소원은 “천상음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실컷 배불리 포식시키는 것”이었다(일곱 번째 서한).
최 신부는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신자들의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를 보면 그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자비와 연민의 마음이었다.
최 신부는 동정녀 바르바라의 죽음에 커다란 회한을 가졌다. 박해시기에는 동정을 지키려면 동정부부로 살든가 동정생활의 결심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 금지의 제재를 가하기도 하였다. 수도생활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고 박해의 위험 때문에 행한 조치였다. 동정생활을 갈망하면서도 성사 금지 처벌을 받은 바르바라는 큰 슬픔에 빠졌고 차라리 병에 걸려 천상 아버지께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그녀는 중병에 걸려 병자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 하늘나라에 갔다.
최 신부는 커다란 회한과 가책과 하느님 사랑의 감정을 느낀 채 이렇게 기록했다. “사악이 그녀의 지력을 손상할까 봐, 또 위선이 그녀의 총명을 흐리게 할까 봐 바삐 하늘로 거둠을 받았으니, 그녀의 생애는 짧은 시간에 쇠진하였으나 많은 시간을 채웠도다”(일곱 번째 편지). 최 신부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착한 목자요 바오로 사도 같은 선교사였다.
최양업 신부의 업적은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의 시복시성 추진,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 수집, 천주가사의 저술과 보급, 가톨릭 교리서와 전례서 편찬과 보급, 신학생 양성 등을 들 수 있다.
1847년 4월 20일의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고 페레올 주교님께서 프랑스어로 기록하여 보내주신 순교자들의 행적을 읽는 것은 저에게 더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고 주교님도 원하시고 이 메스트르 신부님도 권하시므로 제가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1847년 교황청 예부성에 접수된 뒤 시복절차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행적에 수록된 82명 전원이 1857년에 가경자로 선포되고 1925년도에 79명이 복자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최 신부는 바쁜 공소 순방을 마치고 휴가기간 동안 순교자 조사를 하였다. 이 일은 단순한 관심사를 넘어 하느님께 약속한 바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저는 하느님의 자비로 오랫동안 서원으로 맹세했던 대로 저의 동료들에 대하여 더욱 주의 깊게 고찰하고, 조상들의 순교 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여덟 번째 서한).
최 신부는 자신이 서원한 대로 많은 자료들을 찾아내서 스승에게 보고하려 하였으나 다블뤼 주교에게 드렸으므로 따로 보고하지 않겠다고 언급한다. “지난해에 제가 우리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 신부님께 보고드리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나 그것을 존경하올 다블뤼 주교님께 모두 드렸습니다. 안 다블뤼 주교님께서 모든 순교자들의 전반적 역사를 편찬하고 계십니다”(열세 번째 서한).
이러한 편지의 내용을 통해 보면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상당 부분이 최 신부가 수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최 신부는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로 신앙교육을 하려고 했다. 한글 서적이나 천주가사는 전교활동과 교리공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한글이 교리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어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여덟 번째 서한).
한글로 기록된 ‘천당 노래’ 또는 ‘신앙 전래 노래’를 ‘천주가사’라고 한다.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교 교리를 노래로 전수하고 가르쳤다. 박해시기의 천주가사는 21편이며 큰 제목으로는 9편으로 나눌 수 있다. 곧, 민극가 성인의 ‘삼세대의’, 이문우 성인의 ‘삼덕가’, ‘제성’, ‘행선’과 ‘옥중제성’,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사향가’,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보급되고 읽힌 천주가사가 ‘사향가’이다.
또한 최 신부는 1859년 10월에 주요 전례 기도문인 “천주성교공과”의 번역을 마쳤고, 가톨릭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최 신부의 짐을 덜어주고 순교자에 관한 기록을 보강하려고 경상도 지역 일부 교우촌의 순방을 맡았다(열일곱 번째 서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최 토마스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는 보통 일 말고도 주요한 기도서의 번역을 끝마쳐 가는 중이었고, 교리문답의 완전하고 더 정확한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한국 천주교회사” 하권, 번역본, 299)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최 신부는 진천 배티의 조선교구 신학생 3명을 지도하고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으며, 신학교가 제천 배론으로 이전되자 그곳을 방문하여 신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업적에 비추어본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찰
베르뇌 주교의 1861년 9월 4일의 편지를 보면, 신자 숫자가 18,035명으로 나온다. 그 당시 주교 2명, 신부 7명이 활동하였으며 사목구 7개, 신학교 1개가 있었다. 2009년 12월 31일 현재 한국교회 신자 수는 5,120,092명, 주교는 30명, 신부는 4,374명, 본당은 1,571개, 공소는 1,017개, 신학교는 7개이다. 남자수도회는 47개에 회원이 1,555명이고 여자수도회는 106개에 회원이 10,073명이다. 의료기관과 사회복지기관은 1,300여 개에 이른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었고, 오늘도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시작했던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의 절차는 103위 성인의 탄생으로 한 단락 마감했다. 그리고 주교회의가 추진 주체가 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 안건,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시성 안건이 지금 로마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전통은 ‘한국전쟁 순교자’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이분들의 시복 조사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 2차 시복 추진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최양업 신부의 유업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에서는 “매일미사”, 전례용 독서, 성가, “성무일도” 등을 번역하고 편찬 · 간행하고 있는데 이 역시 최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보급하고, 연중 주요 기도문을 번역한 일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에서는 “간추린 가톨릭교회교리서”나 “청년 교리서” 등을 편찬하고 있는데 이것도 교리서 편찬 작업에 참여한 최 신부의 활동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교리서 간행작업은 아직도 미완성 단계에 있다. 좀 더 다양하고 각 계층에 맞는 교리서 연구와 편찬이 과제로 남아있다.
최양업 신부가 한국에서 활동했던 시대(1850-1861년)는 선교사의 시대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방인 성직자로 양성된 2명의 한국인 사제가 조선대목구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대목구는 오늘날 16개 교구로 성장하였다. 평양교구와 함흥교구와 덕원 자치 수도원구는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토대는 선교사들이 흘린 피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교구 소속의 한국인 신부는 3,605명이고, 선교회 소속 신부는 59명, 수도회 소속 신부는 529명이다. 외국인 신부는 191명이다. 3,000명 이상이 교구신부이므로 교구와 수도회의 균형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보편교회는 초대교회의 순교자 시대를 마감하며 증거자의 시대로 넘어서면서 많은 수도회 성인들을 배출하였다. 4세기 초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그리스도의 정신과 교회 영성의 맥은 수도자들을 통하여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들어가 순교정신으로 복음삼덕을 증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와 증거자가 되었다. 미래의 한국교회가 성숙하고 아시아 선교의 중심이 되려면 수도자들이 존경받는 풍토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수도회 출신의 성인이 배출되지 않았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이 완결되지 않아 이러한 과정이 지연되는 면도 없지 않으나, 젊은이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수도생활을 하려면 수도회 창설자나 수도생활의 귀감이 되는 분들이 시복시성되어야 한다. 남자수도자와 여자수도자의 차이는 10배나 된다. 이러한 큰 차이는 교구 소속의 신부가 교회와 사회에서 인정받고 좋게 보이는 환경과 전통에 영향을 받아 수사신부의 숫자가 줄어든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해시대의 동정녀와 동정부부의 삶을 오늘날의 영성으로 표현하면 ‘재속봉헌생활’이다. 교회법 제710조는 “그리스도 신자들이세속에 살면서 애덕의 완성을 향하여 노력하고 세상의 성화를 위하여 특히 그 안에서부터 기여하기를 힘쓰는 봉헌생활회”가 재속회임을 밝히고 있다. 수도회의 봉쇄생활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나 이 세상 안에서 봉헌생활을 하려는 욕구가 우리 사회 안에서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사도직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북방선교’라는 화두가 한국교회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훌륭한 과업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실상 그러한 정신과 삶을 살려는 선교사들은 드물고 적은 듯하다. 이 점은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의 정신과 자세가 현재에 이어지지 않는 단면이기도 하다. 몇몇 교구신부들이 북방선교를 준비하려고 중국에 가서 탐색을 하고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교구사제로 양성된 신부들이 종교 박해가 교묘하게 지속되고 있는 공산정권하에 선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주교회의 선교단체로 한국외방선교회가 있다. 북방선교 또는 아시아 선교를 한국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한다면 선교사 양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후원 방법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생기는 선교회 단체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과 메리놀외방전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황석두 루카 선교회의 김동일 신부를 교구신부에서 선교회신부로 이적시켰다. 이는 시사하는 것이 크다. 증거자의 시대를 맞이하여 훌륭한 선교사들이 많이 늘어나 한국교회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소망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교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들이 있다. 가정에서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아 성소자들이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7개 교구의 신학교 신학생들이 점점 줄고 있다. 이러한 자리에 중국교회나 아시아 교회의 신학생들이 채울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생산적인 대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류한영 베드로 - 청주교구 연수동본당 주임신부.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주교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창간 23돌 특별기획] 제1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
(1) 미지의 땅 마카오로 향하다
'홍안의 소년' 최양업, 첫 신학생으로 뽑히다
- 최양업 신부 생가가 있는 청양 다락골성지 성당. 2008년 축복식 당시 성전 모습으로, 작지만 단순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계기로 한국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그리고 증거자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들 가경자 125위의 조속한 시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들의 성덕과 순교 정신을 드높이는 기도ㆍ현양운동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현재 교황청에 이들 가경자 125위에 대한 시복 안건을 접수한 상태에 머물러 있고, 후속 현양 움직임은 미흡하다. 다만 올해 선종 150주기를 맞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현양운동이 일부 교구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평화신문은 창간 23주년 기획으로 한국교회 가경자들의 조속한 시복을 열망하며 '하느님의 종 125위, 복자 반열에'시리즈를 시작한다. 1부에서는 오는 6월 12일 선종 150주기를 맞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과 삶, 신앙, 기도생활, 순례여정, 성덕, 영성을 통해 오늘을 사는 한국교회를 되돌아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를 5회에 걸쳐 싣는다. 이어 2부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삶과 영성을 새기는 기획을 연재한다.
-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로 들어가는 산 초입에 세워진 순교자 동상.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자비를 잊지 마소서. 저희 눈이 모두 당신 자비에 쏠려 있습니다. 저희의 모든 희망이 당신 자비 안에 있습니다.…'
박해의 칼날이 다시 교회를 향했다. 유일한 조선인 탁덕(鐸德, 사제의 옛말) 최양업(1821~61)은 박해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며 스승 리브와, 르그레즈와 신부 등에 급히 열아홉 번째 서한을 쓴다. 그 편지가 1860년 9월 3일자로 보낸 최 신부의 마지막 서한이었다. 한국교회 첫 번째 신학생이었고, 두 번째 사제였으며, 첫 번째 해외선교사였고, 박해의 미친 피바람 속에서도 조선 5개도를 돌며 12년간 사목한 땀의 순교자 최 신부의 기도는 그리도 애절했다.
서한에서 최 신부는 바람 앞 촛불 같은 조선교회를 주님 자비에 맡긴다. 이어 이듬해 6월 15일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끔찍한' 박해에도 무려 12년이나 조선 땅을 돌며 교우들을 사목하느라 애면글면했던 조선인 사제의 눈물겨운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1836년 2월 6일. 경기도 부평에 살던 16살 '홍안의 소년' 최양업(토마스)은 서울 후동(현 을지로 3가 인근 주교동)에 거처를 두고 사목하던 피에르 모방 신부의 집에 도착한다. 조선에 입국한 첫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인 모방 신부가 주위 조선 교우들 추천으로 선택한 첫 번째 신학생이었다. 이어 3월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7월 김대건(안드레아)이 각각 신학생으로 합류했다.
세 소년은 그해 12월 2일(종전엔 3일로 알려져왔으나 최근 2일로 확인됨) 모방 신부 앞에서 서약을 한 뒤 이튿날 조선교회 밀사 정하상(바오로)과 조신철(가롤로)ㆍ이광렬(요한)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6개월 만인 1837년 6월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조선대목구 신학교에 도착한다. 이로써 세 소년은 이국 땅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유학 생활의 첫발을 내딛는다.
새터 교우촌에서 7살까지 살아
다락골성지에 이른다. 내포교회(대전교구) 한복판 '신앙의 꽃'과도 같은 성지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성지는 크게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새터와 줄무덤 성지다. 새터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최양업 신부 부자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고, 새터에서 2㎞쯤 산속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줄무덤엔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주(현 홍성)와 공주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 줄 무덤 37기가 늘어서 있다.
2008년 11월엔 대전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아 성지에 기념성전이 세워졌다. 지상 2층에 건축 연면적 2511㎡(760평) 규모로 비교적 작지만 단순하고 질박한 성당이다.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숨결과 치열한 신심, 더불어 넉넉한 사랑이 배어나는 듯하다.
그러나 190년 전, 다락골은 전혀 달랐다. 박해 손길이 계속 뻗쳐오는 교우촌이었다. 1791년 신해박해로 수난을 당한 최경환 성인의 부친 최인주가 모친,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낙향해 자리를 잡은 뒤 1600년대 초 새터에 터전을 잡은 경주최씨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집성촌은 교우촌이 됐다.
기해박해 때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방 신부의 마지막 편지,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등에도 계속해서 다락골(혹은 다리골, 다래골)이 언급되고 있다.
이 유서깊은 교우촌에서 1821년 최양업이 태어난다. 최경환 성인과 '하느님의 종' 이성례(마리아) 사이에 맏이로 태어나 새터 교우촌에서 7살까지 살았다.
1827년께 부친을 따라 서울 낙동으로 이주한 최 신부 일가는 강원도 김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1838년 무렵에는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정착한다. 이보다 2년 앞서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최방제ㆍ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로 향한다. 뒤뜸이는 훗날 1984년 순교자 최경환이 시성되면서 묘역과 생가를 중심으로 성역화가 시작돼 순교기념비가 건립되고 십자가의 길 14처와 제단이 설치된다. 후손이 동굴성모상을 봉헌했다.
유학로 4200리 최근 새롭게 밝혀져
5개월 여에 걸쳐 중국대륙을 관통한 세 소년의 유학로는 그간 밝혀지지 않았다. 1981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준비 과정에서 나온 「성지Ⅱ」 책자엔 유학로가 아무런 근거 자료 제시 없이 '서울 → 평양 → 의주 → 중국 랴오닝성 비엔먼(邊門) → 선양(瀋陽) → 베이징(北京) → 텐진(天津) → 산둥성 지난(濟南) → 장쑤성 난징(南京) → 저장성 항저우(杭州) → 푸젠성 푸저우(福州) → 남부 항구도시 하먼(廈門) → 광뚱성 광뚱(廣東) → 마카오(澳門, 아오먼)'라고만 적혀 있다.
- 최양업 신부 유학로 지도. 서울에서 창즈까지는 각종 교회사 문헌을 통해 확인됐고, 창즈에서 마카오까지는 확인되지 못해 점선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차기진(루카) 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장은 최근 세 조선 신학생의 유학로에 주목할 만한 논문을 내놓았다. 수원교회사연구소가 펴낸 「교회사학」(통권 제7호)을 통해 발표한 '최양업 신부의 행적에 대한 재검토'라는 주제 논문에서 차 소장은 유학로로 '서울 → 평양 → 의주 → 비엔먼(邊門) → 선양(瀋陽) → 네이멍구 마치아쯔(馬架子) → 허베이성 시완쯔(西灣子) → 산시성 창즈(長治)'까지 이어지는 1690㎞(4200리)를 각종 교회사 문헌을 통해 고증했다.
하지만 이후 여정 1780㎞(4400리)는 육로를 택했다는 것 외에는 추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서울을 떠난 후 187일, 변문을 떠난 지 162일간 중국 대륙을 북에서 남으로 종단한 세 신학생의 유학로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것은 한국천주교회 사제양성사가 미개척 연구 분야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1837년 6월 7일 조선인 신학생들은 간난신고 끝에 마카오에 도착한다. 샤스탕 신부가 보낸 중국인 밀사 2명과 함께였다. 이들은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임시 설립한 조선대목구 신학교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서 라틴어와 프랑스어, 교리, 성가, 철학, 신학 등을 배운다.
세 신학생에 대한 칼르리 교장신부의 평가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그가 트송 신부에게 보낸 1837년 10월 6일자 서한을 보면 잘 드러난다. "르그레즈와 신부가 교육을 내게 전적으로 맡긴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로서 바람직스러운 덕목이나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가르치는 데 위로를 주고 그 수고를 보상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방제 신학생은 마카오에 도착한 해 11월 위열병으로 사망했고, 최양업과 김대건 신학생은 1839년 4월 마카오 소요 사태로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해야 했다. 도미니코회 롤롬보이 농장이었다. 극동대표부 부대표 리브와 신부, 칼르리 교장신부 등과 함께 피신한 이들은 다시 마카오로 귀환하기까지 7개월을 필리핀에서 지내야 했다.
롤롬보이 체류 중 최양업은 부친 최경환 성인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서한은 밀사 조신철(가롤로)을 통해 조선에 전달됐다. 조선 신학생들이 철학과정을 마치고 신학과정에 입문한 것은 1841년 11월께였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29일, 오세택 기자]
창간 23돌 특별기획] 제1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
(2) 조선땅 배티로 돌아오다
사제 최양업, 13년 만에 홀로 조선 땅을 밟다
# 1842년 7월 17일. 최양업은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난다. 1차 귀국로 탐색이었다. 당시 철학과정을 마치고 신학과정에 들어가 있던 최양업은 그해 8월 말 상하이에 도착, 5개월 앞서 조선으로 향하다가 상하이에 머무르고 있던 김대건과 반갑게 상봉한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가는 귀국 길은 여전히 막막했다. 파보리트호도, 에리곤호도 조선으로 가지 않았다. 1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이 영국측에 강화조약을 제안,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프랑스도 청과 통상조약을 맺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굳이 조선까지 항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프랑스 군은 두 신학생을 하선시켰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장난(江南)대목구장 베시 주교 주선으로 중국 배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해 랴오뚱반도 남단 타이좡허(太莊河, 현 좡허시)에 도착한다. 그곳 교우촌에서 유숙하던 최양업 일행은 가이저우(蓋州)시 양구안(陽關)을 거쳐 조바자츠(小八家子)에 이른다. 현재의 지린성 창춘시 허룽진 조바자츠향이다. 최양업은 그곳에서 신학공부에 전념하며 조선으로 떠날 날을 기다렸지만 그 기간이 무려 7년이 넘게 걸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조바자츠서 부모 순교소식 접해
"우리는 이 모든 쓰라림을 하느님을 위해 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이시요,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원의이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그분 안에서 죽습니다."(마카오에서 쓴 최 신부의 1842년 4월 26일자 서한)
스물두 살 청년 최양업의 '북방행로'를 따라간다. 옥수수로 뒤덮인 평원은 조선 청년의 '의롭고 뜨거웠던' 열정을 기억하고 있을까. 18세기 말 중국 산둥성과 허베이성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창춘(長春)으로 개칭돼 19세기 중반 만주 핵심도시으로 성장하던 지역에 최양업이 찾아들었다. 창춘시에서 서북쪽으로 28㎞ 가량 떨어진 조바자츠였다. 1842년 11월이다.
교우촌 조바자츠는 최양업이 사제성소를 지켜가는 데 더없이 따스한 울타리였다. 페레올 신부가 거처하던 교우촌인데다 인근에 성모성심회 수녀원도 있어서 더없이 편안하고 아늑했다. 당시 조바자츠본당 총회장 아들인 띵밍리(丁明禮, 안드레아) 신학생 집에 머물며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익히고 기도와 신학공부에만 오롯이 매달렸다.
조선에선 비보가 날아들었다. 1843년 3월 조바자츠에 도착한 김대건에게서 최양업은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가 1839년과 1840년에 잇따라 순교한 소식을 접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이 그를 엄습했다. 그럼에도 그 깊은 슬픔을 곱씹으며 최양업은 매일미사와 기도, 신학공부에만 몰두했다.
기쁨도 찾아왔다. 자신에게 신학을 가르쳐주던 페레올 신부가 1843년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돼 그해 12월 가이저우시 양구안 성당에서 주교서품식이 거행된 것이다. 이어 1년 뒤인 1844년 12월 조바자츠에서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그리도 원하던 부제품을 받는다. 첫 한국인 부제의 탄생이었다.
1836년 1월 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훈춘(琿春)으로 떠나기까지 조바자츠에서의 3년 3개월은 41년의 짧은 삶을 살다간 최양업에게는 드물게 행복했던 시기였다.
- 최양업이 부제품을 받은 조바자츠(오른쪽) 성당과 교우촌. 지금도 이 마을 주민 3000여 명 가운데 98%가 신자다.
2차 귀국로 탐색은 의주에서 훈춘으로 바뀌었다. 1846년 1월 만주의 칼바람을 안고 최 부제는 꺼지지 않는 선교 열망을 안고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800㎞에 이르는 '북방행로' 개척에 나섰다. 조바자츠를 출발해 창춘→쑹화쟝(松花江) 동쪽 하류 지린(吉林)시→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牧丹)강 중류 닝안(寧安)→조ㆍ중 국경 훈춘(琿春)에 이르는 한 달간 여정이었다. 때론 만주식 썰매를 타고, 때론 마차로, 때론 걸어서 혹한 삼림과 호수ㆍ사막을 거치는 여정 끝에 최양업은 훈춘에 이르렀다.
최양업 일행이 목표로 삼은 건 '경원개시'(慶源開市)였다. 조선이 허가한 동북방 공식 무역시장인 경원개시를 틈타 입국한다는 계획이었다. 훈춘 인근 마을에서 경원개시를 기다리던 일행은 그러나 만주 관헌에게 체포됐다가 사흘 만에 석방된다. 이에 낙담한 일행은 다시 조바자츠로 귀환해 신학생들을 지도한다.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번역
1년 만에 최 부제는 다시 조선에 입국하고자 그해 12월 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의주와 인접한 비엔먼(邊門)으로 향했다. '고려문' 혹은 '책문(柵門)'이라고도 불린 비엔먼은 평북 의주로부터 48㎞ 떨어진 지역으로, 대체로 명나라 말기에 조선과의 국경으로 굳어져 조선과 중국 간 교역이 이뤄졌다.
이곳 비엔먼에서 김대건 신부 순교와 함께 병오박해 소식을 들은 최 부제는 이듬해 초 홍콩으로 옮긴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출발한다. 그리고 홍콩에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기록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Acta Martyrum)」을 라틴어로 번역한다. 여기에는 기해년(1839년) 순교자 73위와 병오년(1846년) 순교자 9위 등 총 82위의 행적이 담겨졌고, 이 가운데 79위가 훗날 시성된다.
최 부제의 조선 귀국로 탐색은 계속됐다. 1847년 7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을 타고 다시 조선으로 향한다. 제4차 귀국로 탐색이자 해로로는 첫 탐색이었다. 군함은 그해 8월 고군산군도(현 군산시 옥도면)에서 난파해 섬에 상륙했다가 상하이로 돌아온다.
상하이로 돌아온 뒤 최 부제는 예수회 신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1849년 4월 15일 예수부활대축일 이후 첫 주일인 사백(捨白)주일에 상하이에서 나폴리성가회원인 장난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는다.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였지만, 김 신부가 앞서 순교했기에 다시 유일한 조선인 사제가 된다.
당시 서품식이 거행된 장소는 아직 논란이 많다. 기존엔 상하이 사쟈후이(徐家匯) 예수회신학원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조현범(토마스) 박사는 2008년 12월 「교회사학」지에 '중국 체류 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이라는 논문을 통해 창카레우(張家樓) 성당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고 밝히면서 창카레우성당이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 최양업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으로 추정되는 상하이 창카레우성당. 지금은 상하이 시내로 옮겨왔지만, 당시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인 진자샹 성당과 함께 푸둥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도 창칼레우 성당이 최 부제 사제서품식이 거행된 장소라는 데 무게를 둔다. 차 박사는 "사쟈후이 성당은 최 부제가 사제품을 받은 뒤 뒤늦게 건립됐고,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진자샹(金家巷) 성당도 마레스카 주교가 당시 주교관을 퉁자다오(董家渡) 성당으로 옮겼기에 최 부제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일 가능성이 희박해 당시 상하이 푸둥(浦東)에 있던 창카레우 성당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밝힌다.
사제품을 받자마자 그해 5월 두 번째 해로 탐색을 겸해 5차 귀국로 탐색에 나선 최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백령도를 돌아보고 상하이로 귀환한다. 이어 랴오닝성 좡허시 차쿠성당으로 가서 훗날(1854년) 주교품을 받고 조선대목구장이 되는 베르뇌 신부를 보좌, 중국인 사목에 나선다. 이로써 차쿠 지역은 한국인에 의해 이뤄진 첫 해외선교지가 됐고, 첫 번째 한국인 해외선교사는 최 신부로 기록됐다.
베르뇌 신부 도와 중국인 사목
최 신부가 차쿠에서 사목한 기간은 대략 7개월 가량이다. 1849년 5월 말에서 12월말까지다. 당시 활동상이 최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1849년) 5월에 함선을 타고 상하이를 떠나 다시 랴오뚱에 왔습니다. 이 지역에서 7개월 동안 머물며 만저우(滿洲)교구장 직무대행이신 베르뇌 신부님 명령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엔 신자들에게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대축일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모시도록 하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이 내용은 최 신부가 한국인 성직자로는 최초로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수행한 첫 번째 해외선교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 1849년 12월 말, 최양업 신부는 또 다시 '비원(悲願)의 땅' 비엔먼(邊門)에 이르렀다. 그동안 몇 차례나 힘겨운 여정을 거쳐 찾아왔던 입국 관문이었다.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였지만, 이방 사제는 국경을 지키는 조선 병사들의 이목을 피해 들어가기가 어려웠기에 매스트르 신부는 아쉽게도 입국하지 못했다. 이윽고 의주가 눈에 들어오고, 최 신부는 혼자 조선 땅에 발걸음을 내딛는다. 여섯 차례에 걸친 입국 탐색 끝에 이뤄진 결실이었다. 13년 만의 귀국이었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5일, 오세택 기자]
[창간 23돌 특별기획] 제1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
(3) 조선 5개도를 본당사목구로
'길의 사도' 최양업, 조선 5개도를 두루 다니다
1850년 1월. 최양업 신부는 드디어 서울에 도착한다. 그가 서울을 떠나던 1836년 12월은 헌종 2년이었지만, 13년이 흐른 1850년 1월은 철종 원년이었다. 아직 혹독한 추위가 서울을 감싸고 있었다. 최 신부는 서울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당시 충청도에 머물던 페레올 주교를 만나러 가려 했으나, 다블뤼 신부가 중병을 앓고 있어 먼저 병자성사를 집전해야 했다. 그리고서 페레올 주교에게 가 보니 그 역시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 만남 또한 꼭 하루였다. 최 신부는 잠시도 쉬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떠나 곧바로 전라도를 시작으로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하느님 보호로 그는 6개월간 5개 도를 두루 돌았다.(최양업 신부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1년에 120곳 안팎 교우촌 방문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 하지만 누구나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바닷속처럼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부르심의 길은 '보고 들을' 준비가 돼 있는 자에게만 열려 있다. 최 신부는 그 부르심을 따라 빛의 길을 걸었다.
사제품을 받은 지 불과 8개월. 중국 만저우대목구 차쿠 눈의 성모 성당에서 겨우 '보좌' 꼬리표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사제였지만, 당시 조선대목구엔 몇몇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을 빼고는 사제가 없다시피해 최 신부가 사목 순방해야 하는 지역이 5개 도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그의 본당사목구는 경기ㆍ충청 일부 지역과 전라ㆍ경상ㆍ강원도 전역을 망라하고 있던 셈이다.
5개 도를 따라 부르심의 외길을 최 신부는 걸었다. 6개월간 교우촌을 순방하며 박해로 숨죽이며 살아온 교우들을 다독이고 성사를 베풀고 미사전례를 집전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를 받으며 걷는 길이었지만, "아주 고약한 서양놈"이라거나 "프랑스놈", "큰 도둑놈", "선동꾼" 같은 숱한 비난을 듣고 오해를 받으며, 박해를 감수해야 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도 동포와 부모, 배우자, 친척, 이웃에게 모진 박해를 받고 가산을 포함해 모든 걸 빼앗긴 채 험준한 산속 골짜기에 들어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3년 만이라도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하며 편안히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신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최 신부는 걷고 또 걸었다.
이방 선교사들은 일반인들 눈에 띄기 쉬웠기에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는 지역이나 산간 오지에 사는 신자들을 찾아 돌보는 일은 다 최 신부 몫이었다. 그래서 최 신부가 사목 순방해야 할 지역은 1년에 120곳 안팎이나 됐고, 순방을 위해 해마다 2750㎞(7000여 리)를 걸어야 했다.
특히 최 신부가 사목 첫 해인 1850년 말까지 8개월간에 걸쳐 순방한 교우촌은 모두 127곳으로, 그가 순방한 신자 수는 3800여 명에 이르렀다. 1850년 말 전국에 산재한 교우촌이 185곳이 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공소의 68.65%를 최 신부가 감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최 신부 사목활동을 가리켜 교회사학계에선 '땀의 모범적 증거'라고 표현한다.
1852년 8월 중국에서 입국한 매스트르 신부와 병석에서 일어난 다블뤼 신부가 합류하면서 사목구역은 다소 줄었다. 하지만 5개 도를 순방해야 하는 사목 현실은 그대로였다. 이같은 사정은 1856년 전반기까지도 그대로 유지됐다. 1856년 후반기 들어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가 우리말을 익힌 뒤 동참하고 1857년 3월 조선대목구장에 착좌한 다블뤼 주교, 1857년에 입국한 페롱 신부 등이 잇따라 사목활동에 참여함에 따라 최 신부 사목구역은 상당히 줄어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 강원도 북부, 경상도 북부 이남 지역, 전라도 전 지역을 담당하게 됐다. 그럼에도 그의 사목구역은 5개 도 모두에 걸쳐 있었고, 공소 또한 100곳이 넘었다. 그야말로 '길의 사도'였다.
'문봉리 동골'이 가장 유력
- 2001년 12월 최양업 신부 탄생 180주년을 맞아 복원된 배티 조선대목구 신학교. 신학교 교문 밖 왼쪽엔 '길의 사도'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세워졌고, 교정 안쪽에 초가 형태 신학교가 건립됐다.
최 신부의 교우촌 방문 일정은 6개월간 대체로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다만 1850년 7월 한 달 동안만 진천 동골에 머물렀다. 그래서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는 진천 동골을 최 신부의 첫 사목 중심지로 추정하고 있다.
귀국 초 최 신부가 서한을 쓴 곳으로는 동골 외에도 도앙골(현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과 절골 등이 등장하지만 최 신부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쓴 「최우정 이력서」 등에 따르면,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자신의 거처로 진천 동골을 배정하자 즉시 동골로 와서 몇 해를 머무르며 전교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같은 기록으로 미뤄 볼 때 최 신부는 입국 초기 최소 2년간 진천 동골을 사목중심지 겸 여름 휴식처로 삼고 전국을 순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진천 동골'이 어디인지 논란이 있다. 현재 충북 진천군 지역에서 동골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산재해 있어서다. 현재까지 거론되고 있는 진천군 동골로는 △ 진천읍 문봉리 동골 △ 진천읍 연곡리 동골(쥐눈이 동골) △ 백곡면 용덕리 동골(느릅실 동골) △ 백곡면 양백리 동골(진천 절골) △ 이월면 동성리 동골 등이 있다.
이 중 최 신부의 첫 사목중심지로 거론돼 온 마을은 '문봉리 동골'인데, 이 주장은 1992년 89살을 일기로 타계한 유봉열 할머니 증언이 결정적 근거가 됐다. 아직까지는 이 주장을 배척할 만한 자료는 없다. 현재 문봉리 동골에는 1999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신축한 '무아의 집'과 성당이 있는데, 이 중 무아의 집은 해마다 4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원들이 찾아와 피정을 하고 돌아가는 피정의 집으로 쓰이고 있다. 반면 쥐눈이 동골이나 느릅실 동골, 최 신부 서한 작성지로 잘 알려진 진천 절골도 사목중심지로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진천 지역 동골 가운데 어느 동골이 최 신부 사목중심지였는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진천 동골을 중심으로 한 배티교우촌이 최 신부 사목중심지가 되면서 배티에선 한국교회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난다. 1846년 병오박해의 아픔이 어느 정도 씻긴 1847년 말 페레올 주교는 한국인 사제 양성 재개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해 8월 프랑스 함대가 고군산도, 즉 현재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에 난파하는 사건이 벌어져 교우촌 순방마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신학교 설립은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신학생 3명 페낭으로 유학 보내
그러던 중 1849년 후반 최 신부를 고국으로 불러들인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생들 교육을 전담하도록 했다. 그해가 1850년이었다. 이로써 다블뤼 신부는 자신의 거처에서 개인적으로 가르쳐오던 신학생들을 교구장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게 됐다.
- 신학교 내엔 최양업 신부가 성체를 높이 들어올려 거양성체를 하는 장면이 재현돼 있다.
이 신학교는 따라서 이전의 예비신학교가 아니라 조선대목구장에 의해 조선교회 안에 정식으로 설립된 첫 조선대목구 신학교였다. 교육과정 면에서 보면 '조선대목구 소신학교'였다.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나 다른 지역 신학교에 유학을 보내기에 앞서 조선에 설립한 '유학준비기관으로서의 소신학교'였다. 그 내용이 페레올 주교가 1850년 11월 5일자로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 상세히 밝혀져 있는데, 당시 조선대목구 신학교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며 교육이 이뤄지는 이른바 '이동형 신학교'였다. 그러다가 1851년 11월 다블뤼 신부가 신학교 전담 사제로 임명되면서 이 신학교는 이동형에서 '정주형 신학교'로 탈바꿈한다. 그곳이 배티교우촌 신학교다.
이 신학교에서 최 신부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에 대한 의문은 최 신부가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4년 11월 4일자 서한에서 풀 수 있다. 이 서한에서 최 신부는 "지난 봄에 세 학생을 강남의 거룻배에 태워 상하이로 보냈는데, (페낭)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하는 내용의 글을 쓰고 있다. 이를 보면 신학교 교사나 신학생 지도, 페낭 유학을 직접 담당한 사제가 최 신부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진다. 신학교를 담당했던 다블뤼 신부가 1853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사목순방을 시작했기에 최 신부는 배티교우촌 소신학교에 거처하며 신학생들을 지도했고 1854년 3월에는 이 바울리노와 김 요한 사도, 임 빈첸시오 등 세 신학생을 페낭 신학교에 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신학생이 페낭으로 떠나면서 조선대목구 소신학교로서 배티신학교의 역할은 사실상 소멸된다. 다블뤼 신부의 사제양성은 계속됐지만, 이 시기에 이미 매스트르 신부가 설립한 '배론 신학교'가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12일, 오세택 기자]
[창간 23돌 특별기획] 제1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
(4) 교우촌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다
밤낮으로 교우촌 찾아다니며 '천주가사' 편찬
"그 때 갑자기 100명이 넘는 포졸들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는 진밭들(현 진밧들)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아 가기 위해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함께 있던 신자들이 그들의 침입에 완강히 대항해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 짐을 챙겨 치우고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산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최양업 신부의 1856년 9월 13일자 열두 번째 서한)
교우촌 아홉 군데서 서한 집필
박해 시대 신앙의 접점은 교우촌이었다. 가느다란 신앙의 맥은 교우촌에서 교우촌으로 이어졌다. 주님의 길을 가로막으려는 박해와 난동이 계속됐지만 최 신부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찾아 교우촌으로 향했다. 때로 조선의 알프스라고 해야 적절할 험준한 강원도 산길을 사나흘씩 걷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겹고 고된 길이었다. 때론 기진맥진했다.
사목순방의 어려움은 비단 걷는 어려움뿐만이 아니었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했고, 공소순방이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어둑새벽 동이 트기 전에 공소를 떠나야 했다. '단 한 번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은총을 받고자' 이틀이나 사흘씩 걸어와 그리도 간절히 미사성제를 고대하던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하지도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바위와 가시덤불 사이에서 허둥지둥해야 했다. 한밤중의 매서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유숙하던 주막에서 쫓겨나 흠씬 매를 두들겨 맞아야 했다. 의복이 찢어져 반쯤 나체가 됐다. 강추위로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능욕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기진맥진했다. 지극히 큰 죄나 저지른 듯 항상 전전긍긍 떨어야 하는 교우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면서 최 신부는 비통함에 젖었다. 그렇지만 '천상 음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돌보고자 최 신부는 항구한 인내로 온갖 간난신고를 극복했다.
그렇다면 최 신부가 사목순방차 들른 당시 교우촌은 얼마나 될까. 교우촌 수나 그 구체적 실상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최 신부가 1849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뒤 리브와 신부 등 스승들에게 보낸 일곱 번째 서한부터 열아홉 번째 서한까지 12통(아홉 번째 서한은 분실됨)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최 신부가 직접 서한을 썼던 교우촌은 도앙골 등 모두 9군데다. 최 신부 사목순방지 127곳 가운데 일부다.(최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여덟 번째 서한 참조)
이들 교우촌의 정확한 위치가 모두 다 확인된 건 아니지만, 그간 교회사학계 연구로 최근 들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우선 최 신부가 조선에 귀국한 뒤 처음으로 1850년 7월 서한(일곱 번째 서한)을 쓴 도앙골은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도앙골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1851년 10월 여덟 번째 서한을 쓴 절골은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 절골로 추정된다. 1854년 11월 열 번째 서한을 쓴 동골은 충북 진천읍 연곡리 동골(쥐눈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일 가능성이 크다. 1855년 열한 번째 서한을 쓴 배론은 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이라는 데 학자들 간에 이견이 거의 없다.
그러나 1856년 열두 번째 서한을 쓴 소리웃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 상손곡 손골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아직은 어느 지방 교우촌인지 명확하지 않다. 1857년 9월 서한 작성지인 불무골도 충남 서천군 비인면 불모골이라는 설과 충남 서천군 판교면 흥림2리라는 설이 엇갈린다.
최 신부가 1858년 페롱 신부와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열다섯, 열여섯 번째 서한을 작성한 오두재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오도재(일명 어두재, 오도치)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1859년 열일곱, 열여덟 번째 서한을 쓴 안곡은 경북 선산군 무을면 안곡(일명 안실)이라는 주장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 신부가 1860년 마지막 편지인 열아홉 번째 서한을 작성한 교우촌 죽림은 경북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대밭(대재)공소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밖에 멍에목(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구병리), 진밧들(충남 금산군 진산면 두지리), 만산(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만산리공소), 간월(경남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동래(부산 동래지역 읍내), 한덕골(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 서덕골(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먹방이), 수리산 뒤뜸이(경기도 안양시 안양3동), 산막골(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등 교우촌도 최 신부 서한에 등장하고 있다.
- 최양업 신부가 조선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1850년 10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서한을 쓴 도앙골 교우촌. 이 도앙골교우촌은 현재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도앙골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제공=이승용 신부
- 최양업 신부가 1858년 열다섯, 열여섯 번째 서한을 작성한 오두재 교우촌은 현재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오도재로 추정된다. 사진제공=이승용 신부
가경자 선포 소식에 기쁨의 눈물
물론 슬픔만, 고통스러움만, 눈물만, 어려움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하느님 자비로 사목순방을 별 탈 없이 평온하게 마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그물' 속으로 들어왔다. 한 번에 240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도 하고, 온 동네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경사도 있었다. 일가족이 개종해 신앙을 받아들이는 일도 있었다.
가장 큰 기쁨은 조선 순교자들이 가경자(可敬者,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시복시성 절차 간소화로 가경자 단계는 폐지됨)로 선포된 소식이었다. 최 신부가 부제 시절에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Acta Martyrum)」에 포함된 기해년(1839년) 순교자 73위와 병오년(1846년) 순교자 9위 등 82위가 1857년 가경자로 선포된 것이다.(1847년 4월 20일자 서한 참조) 얼마나 기뻤는지 최 신부는 "슬픔 중에서도 더할 수 없이 큰 위로가 됐다"면서 "언젠가 우리 순교자들도 성인 반열에 오르시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식으로 공경을 받으시는 날이 올 때 우리에게 얼마나 기쁘고 영광된 날이 되겠습니까"하고 반문하면서 감격을 감추지 못한다(가경자 82위 중 79위가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됐다).
「천주성교공과」도 우리말 번역에 참여
- 최양업 신부가 번역 편찬에 참여한 목판본 「천주성교공과」
최 신부의 활동은 교우촌 순방에 그치지 않는다. 밤낮으로 애면글면하며 교우촌을 찾아다니던 최 신부는 우리말을 이용한 교리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래서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한다. 최 신부가 쓴 천주가사로는 현재 '사향가' '선종가' '공심판가' '사심판가' 등이 꼽히고 있다. 물론 "천주가사의 작가는 교회"라는 주장도 있지만, 교회 내 전승이나 각각의 가첩(歌帖)에 드러나는 표현이나 반복 등의 유사성을 볼 때 아직까지는 최 신부의 저작이라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최 신부는 특히 여덟 번째 서한에서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다"며 자신이 직접 천주가사를 저술해 교우촌에 배포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최 신부는 또한 1859년 여름 휴식 기간을 이용해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천주교회에서 최초로 채택한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을 우리말로 옮기고 교정하는 데도 참여했다.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ㆍ성체성사ㆍ견진성사 등 네 가지 근본교리를 154조목으로 나눠 문답식으로 설명했기에 「사본요리(四本要理)」라고도 불렸다. 이 책은 1864년 서울 목판인쇄소에서 단권 초판이 간행됐고, 1886년 일본 나가사키에 있던 조선교회 성서활판소에서도 간행돼 1934년에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공식 교리서로 쓰였다.
최 신부는 같은 해 기도서인 한문본 「천주성교공과」 번역에 들어가 이듬해 여름 이를 완성했다. 1862년 4권 4책 목판본으로 인쇄돼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10년간 한국천주교회에서 사용된 이 기도서는 활자로 인쇄된 최초의 천주교회 서적으로, 천주교회가 국어 발전에 이바지한 근원이 된 서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 첫 공식 기도서에까지 최 신부의 숨결이 배어 있는 걸 보면 박해시대 최 신부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우리의 가련한 참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이기에 이번에는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스승님과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께 청하오니 우리를 잊지 마시고 인자하신 하느님께 더욱 간절히 탄원하기를 그치지 마시기 바랍니다."(최양업 신부의 1859년 10월 11일자 열일곱 번째 서한)
[평화신문, 2011년 6월 19일, 오세택 기자]
(5) 11년 6개월, 짧고도 긴 순례 여정을 마치고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숨 거둔 '땀의 순교자'
"저 혼자 여행을 하기엔 너무 허약합니다. 하루에 고작 40리(16㎞)밖에 걷지 못합니다. 갈 길이 먼 공소순방 때는 그래서 말을 타고 갑니다."(최양업 신부 1859년 10월 12일자 서한)
낮에는 걷고 밤에는 성사 집전
날이 갈수록 최양업 신부는 쇠약해지고 점차 지쳐갔다. 12년간 해마다 2749㎞(7000리)씩 걸어 교우촌을 순방하는 강행군 때문이었다. 낮에는 대략 31.4~39.3㎞(80~100리)를 걷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날이 새기 전에 다시 길을 떠나는 과로가 그의 몸을 서서히 갉았다. 한 달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이 겨우 나흘 밤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목구역은 5개 도에 걸쳐 있었고, 충청ㆍ전라ㆍ경상 삼남(三南)지역 가운데 벽지와 오지는 거의 그의 차지였다. 최 신부는 1859년 말 시작돼 1860년 여름까지 이어진 경신박해로 성사 집전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도 밤마다 교우촌을 옮겨 다니며 신자들을 보살폈다.
박해가 심해 어쩔 수 없이 죽림(경북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대밭공소)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던 최 신부는 박해가 잦아들자 다시 공소 순방에 나섰다. 사목 순방을 하느라 성무집행 연말보고조차 늦춰졌을 정도로 바삐 움직였다. 그 성과는 풍요로웠다.
최 신부가 1860년 9월 3일자로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열아홉 번째 서한에 따르면, 고해성사를 본 신자가 1622명, 세례성사를 받은 이가 203명이었으며, 예비신자도 398명이나 등록했다.
사목보고를 한 뒤로도 최 신부는 10개월 간 공소 순방을 하느라 거의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그런 몸을 이끌고 그는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순방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지만 무리였다. 피로가 겹친 데다 장티푸스에 걸린 최 신부는 마침내 쓰러진다. 그리고 푸르티에 신부에게 마지막 사죄경과 함께 병자성사를 받고나서 양떼를 따스하게 붙잡아주던 손을 내려놓고 숨을 거둔다. 흩어진 양떼를 찾아 성사의 은총을 전해주느라 길에서 산 '땀의 증거자'의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음에, 더 도울 수 없음에 자책하던 목자는 의식이 없으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반복해 중얼거리며 자비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토록 최 신부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교우들은 참 목자를 잃은 슬픔에 목이 멨다. 1861년 6월 15일, 그의 나이 41살이었다. 그리고 유해는 선종지에 가매장됐다가 훗날 배론에 안장됐다. 1849년 말 부푼 '희망을 안고' 조선에 발을 내디딘 지 꼭 11년 6개월 만이었다.
마지막 서한을 통해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하다"며 죽음을 예감하던 최 신부 기도는 참으로 애절하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마소서. 저희 눈이 모두 당신의 자비에 쏠려 있습니다. 저희의 모든 희망이 당신의 자비 안에 있습니다.…" 최 신부의 열절한 기도는 여기에서 멈춘다.
- 배티성지 내 산상제대로 오르는 길목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의 동상. '길의 사도'이자 '땀의 증거자'로 산 최 신부의 삶을 형상화하고자 성경을 끼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걸어가는 형태로 제작했다.
최 신부 선종지는 아직 미궁에 빠져 있다.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푸르티에 신부 서한과 페롱 신부 서한이 최 신부가 선종한 땅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어서다.
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준 푸르티에 신부는 1861년 10월 21일자 서한을 통해 "그가 누워있는 집이 저의 거처(배론신학교)에서 170~180리(66.8~70.7㎞) 떨어져 있었다"거나 그해 11월 2일자 서한에서 "그는 중병에 걸려 제가 살고 있는 산(배론 구학산)에서 170리(66.8㎞) 떨어진 어느 한 교우의 집에 간신히 도착했다"고만 언급한다.
또 페롱 신부도 같은 해 서한을 통해 최 신부가 선종한 것이 "배론신학교에서 약 120리(47.1㎞) 떨어진 한 작은 교우공동체"라고 언급할 뿐이다. 19.6㎞(50리)라는 거리 인식의 차이는 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푸르티에 신부와 교우촌 순방 길에 익숙했던 페롱 신부가 달려간 노선이 달랐기에 벌어진 현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와 함께 '최 바시리오 이력서'(1939년) 등을 비롯한 문헌과 구전 등을 통해 최 신부 선종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최 신부 선종지는 경상도 문경으로 보는 설(주재용 신부, 정양모 신부 등)이 유력하지만, 충청도 진천으로 보는 견해(류한영 신부 등)도 만만치 않다. 또 최 신부 발병지와 선종지를 구분해 발병지는 문경이 분명하지만, 선종지는 진천 배티라고 주장하는 설(정규량 신부)도 있다.
다만 '대동여지도'나 요즘 항공촬영 축적 지도를 통해 분석해본 결과, 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준 푸르티에 신부가 배론신학교에서 이동한 거리가 170~180리였다는 기록은 배론에서 문경읍까지 실측결과가 거의 일치해 문경선종설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 원주교구 배론성지 최양업 신부 묘역. 묘소 앞에는 길이 1m51.5㎝(5자), 너비 60.6㎝(2자) 빗돌이 세워져 있으며, 앞면에는 '사제 토마스 최정구(최양업 신부의 아명)의 묘'라는 글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최 신부의 사목적 삶을 기리고 빗돌을 건립한 내역을 기록했다.
여하튼 그의 죽음은 당시 조선교회에 크나큰 충격을 안겼다. 페롱 신부는 최 신부가 선종한 지 한 달 열흘이 지난 7월 26일자 서한에서 "그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이다"며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기까지 사목적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기술한다. 왜냐면 최 신부는 그간 선교사들이 방문하지 못하는 남쪽 오지 교우촌 순방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문본 기도서나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도 어려움에 부딪혔다. 선교사들은 무엇보다 '친구'를 잃는 아픔으로 눈물에 젖었다.
베르뇌 주교도 1861년 9월 4일자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며 최 신부의 신심과 열심, 평소 사제로서 분별력을 칭송하고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명했다. 더불어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은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마을이 포함돼 있어 그의 죽음은 저를 몹시 난처하게 한다"면서도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천주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다.
조선 복음화를 그리도 갈망하던 최 신부가 선종한 지 이제 150주년을 맞는다. 그간 한국교회 첫 사제인 김대건(1821~46) 신부에 가려있던 최 신부는 2005년 12월 시복대상자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증거자로는 유일하게 선정돼 시복재판이 개시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다. 그리고 3년 6개월이 지나 2009년 6월 교황청 시성성에 시복자료가 제출됨으로써 한국교회에는 최 신부를 비롯해 하느님의 종 125위에 대한 기도와 공경, 현양운동이라는 과제가 남게 됐다.
이처럼 빛나는 삶을 산 최 신부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있을까. 최 신부의 사목적 삶과 선교 열정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참으로 깊고도 풍부하다.
선교열정, 순교정신 본받아야
그는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자신의 한 생애를 오롯이 봉헌한 땀의 증거자였다. 그의 순례영성은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숨을 거둔' 데서 잘 드러난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공소 순방을 통해 '기다리는 사목'이 아니라 '찾아나서는 사목'을 통해 강생의 신비를 살았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또 신자들의 수계생활을 위해 이 교우촌에서 저 교우촌으로 끊임없이 순례한 참 목자였다.
사제직에 대한 그의 투신은 끊임없는 박해와 체포 위기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모든 간난신고를 그는 사제직에 대한 열정으로 이겨냈다. 그러면서도 가족과 친척, 친지들에게조차 외면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교우들, 나아가 동포들에 대한 연민으로 끝없이 번민했고, 동포들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 끊임없는 기도를 바친 기도의 사제였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도 최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자비로우신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성인 반열에 들게 하시고, 저희 모두가 그의 선교 열정과 순교정신을 본받아 이 땅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몸 바치게 하소서!"
[평화신문, 2011년 7월 3일, 오세택 기자]
[경향 돋보기 -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차기진
1837년 정월 어느 날. 중국의 변방 지역인 내몽고 마가자(馬架子) 교우촌 뒷산에 있는 한 무덤 앞에 무릎을 꿇은 세 명의 청소년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1836년 12월 3일에 서울을 출발한 조선 신학생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였다. 무덤의 주인공은 1년 3개월 전에 선종하신 초대 조선교구장 소 바르톨로메오(B. Bruguiere) 주교님.
그때 최양업 신학생의 생각은 온통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닮은 소 주교님의 삶과 신앙으로 가득했다. 조선의 양 떼들을 만나려고 쇠잔해진 몸을 이끌고 중국 대륙을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던 그분. 그 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없었고, 알려진 길도 하나 없었다. 가는 곳마다 고통과 고뇌의 강물이 넘실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당신 아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던 하느님뿐이었다.
최양업 신학생은 자신의 앞길에도 고통과 고뇌의 강물이 놓여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비에르 성인이나 소 주교님을 닮으려 하였다. 하느님께서 손길을 뻗어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 강물을 건너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숨은 그리스도인과 믿음 · 희망 · 사랑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
1821년 청양 땅의 다리골 새터(현 다락골)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난 뒤 부모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숨어 다니면서 성가정의 신앙을 먹고 자랐다. 다리골 새터에서 서울 낙동(현 회현동 일대)으로, 다시 강원도 김성으로, 그리고 부평 땅 접프리 교우촌으로 ….
그때는 모두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 희망 · 사랑이 있었고, 이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등불이 되었다.
최양업 신부에게도 아버지 하느님은 지극히 전능하신 창조주요, 지극히 자비롭고 선하시며 영원하신 주님으로, 모든 것의 희망이었다. 박해의 위험이 닥칠 때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그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곤 하였다. 하느님은 언제나 ‘위로요, 희망이요, 원의’였고, ‘모든 신앙인은 그분 안에서 살고 죽는’ 하느님 섭리의 지체였다. 그래서 하느님 분노의 그릇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아들’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부제 시절인 1847년 8월, 홍콩에서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으로 왔다가 고군산군도의 신치도(현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에서 좌초하여 다시 돌아가야만 했을 때도 최양업 신부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모든 것을 의지하였다. 1860년의 경신박해로 경상도 남동쪽 끝에 있던 죽림공소(현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의 간월산중)에 숨어 지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저희의 잘못과 죄과를 기억하지 마시고, 저희의 죄악대로 저희를 벌하지 마소서! 저희는 죄를 지었고 너무나 많은 불의를 행했습니다. 당신이 만일 저희의 불의를 헤아리신다면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저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옛 자비를 기억하시어, 저희와 모든 성인들의 기도를 어여삐 들어 허락하소서”(최양업 신부의 1860년 9월 3일자 서한).
최양업 신부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늑방 안에서 순명과 사랑과 일치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고귀한 피로 당신 백성을 속량하심으로써 그 백성을 당신의 유산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 그분을 닮으려 하였다.
공동 상속자를 지향하는 신심 함양
최양업 신부의 소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도 안에서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1846년 12월 22일자 서한)라고 기원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신앙 안에는 예수 성심과 성모 신심, 성인 ·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특별히 결합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 나무 조각[보목]을 스승 신부에게서 얻어 늘 지니고 다녔으며, 조선의 순교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사업을 완성하는 후배 전우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영광을 나누어 갖는 공동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 때문이었다.
1847년 초, 홍콩에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한 뒤,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마무리 기도를 바쳤다.
“순교자들의 왕이신 주님! 영원으로부터 감추어진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를 제 마음 안에 부어주시어, 저로 하여금 거룩한 십자가의 종들과 함께 당신의 거룩한 마음과 지극히 복되신 성모님의 사랑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통해, 현세에서는 전우가 되게 하시고 후세에서는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최양업 신부는 한결같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 · 순교자들에게’ 구원을 청하곤 하였다. 성모님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굳게 결합되어 있으며, 하느님과 성인 · 순교자들 사이의 중재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생 시절인 1843년 성모성심회에 가입한 이래 더욱 성모 신심을 함양하는 데 노력하였다.
조선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처음으로 묵주기도를 가르친 분이라면, 최양업 신부는 묵주기도를 널리 보급하고, 성모 신심을 장려한 으뜸 목자였다. 이를 위해 그는 스승 신부님에게 묵주를 만드는 도구를 청해 받았고, 솜씨 있는 신자들에게 묵주를 만들어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아울러 그 자신도 위험이 닥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모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성모님의 보호 아래 달려들었다.
최양업 신부는 ‘성인들의 열렬한 기도와 크나큰 희생과 힘들고 지루한 극기와 보속 행위’를 본받으려 했으며,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신심을 함양하도록 가르쳤다. 스승 신부님으로부터 얻은 성패나 상본을 신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도 성인 유해나 상본들을 지니고 다니면서 교우촌 순방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애달픈 조국애와 민초 사랑
최양업 신부는 신앙의 진리를 통해 조국과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마카오에서의 신학교 생활, 귀국로 탐색 과정, 만주 소팔가자(小八家子)와 상해에서의 마지막 수업 중에도 늘 조국애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는 1842년 7월 프랑스 함대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기 직전에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님에게 올린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저의 동포들이 마침내 시온성(예루살렘의 거룩한 신의 도시)으로 회귀하여 우리의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송할 날이 언제쯤 올 것인지?”(1842년 4월 26일자 서한)
최양업 신부에게는 조선 민족이 시온성을 찾아가는 이스라엘 민족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무리 안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양떼를 찾아 헤매는 목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귀국로를 탐색하는 데 청년기를 다 소비하였다. 1842년 이래 7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조선 입국로를 찾아 헤매면서 갖은 고난을 겪은 그였다. 그럼에도 기회가 올 때마다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의 문턱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을 때는 애달픔과 함께 조국의 구원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함께 느껴야만 했다.
최양업 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이 그리스도교 국가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원정의 목적이 무력 개교(開敎)나 조선 멸망에 있어서는 결코 안 되었다. 프랑스 함대의 임무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박해를 종식시킴으로써 조선을 복음화의 길로 이끄는 데 동참하는 것일 뿐이었다. 귀국한 뒤 스승 신부님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프랑스 정부에서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서한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은 것’을 항변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철저히 복음화를 바탕으로 한 구원사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신앙의 자유가 불평등한 신분구조, 양반 관리들의 착취, 당파로 얼룩져 있는 사회 구조를 쇄신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는 분명 종교보호 정책을 앞세우면서 프랑스 정부가 선교 지역에서 모종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던 선교사들의 생각과는 다른 점이었다.
귀국한 뒤에 최양업 신부가 가장 먼저 보고 느낀 것은 억압받는 일반 백성 곧 민초들의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의 복음화와 민초들을 위한 구원사상은 언제나 그 사목 지향 안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양반 계층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견해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양반들의 독선과 오만, 횡포와 부도덕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되고 있으며, 민초들이 겪는 비참한 생활의 원인이 된다고 믿었다. 폭정과 가렴주고, 탐관오리들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백성과 비참하게 지내는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도와줄 능력이 없는 자신의 초라함’에 한없이 가슴이 미어지곤 하였다. 영신의 구원에 굶주리는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줄 수 없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한탄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는 한 발짝이라도 더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였다. 한자를 모르는 신자들을 이해 한글을 교리 공부에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글 천주가사, 한글 기도서, 한글 교리서를 지어 널리 보급하였다. 그뿐 아니라 비위생적인 물을 먹고 고생하는 신자들을 위해 스승 신부님으로부터 정수 방법을 배워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땀의 증거자가 보여준 선교 영성
흔히 최양업 신부를 가리켜 ‘백색 순교자’ 또는 ‘땀의 증거자’라고 한다. 백색 순교자가 하느님 · 그리스도 · 성모 신심을 바탕으로 한 삶을 가리킨다면, 땀의 증거자는 그의 선교 열정을 의미한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했을 때 검게 탄 얼굴에 ‘흰 갓끈 자국이 남아있었다’는 전승 또한 땀과 발로 전국의 교우촌을 자신의 안마당처럼 순방하면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신자에게 성사를 주려고 노력한 선교 영성을 잘 설명해 준다. 그는 민초들을 구원하고자 전국을 누빈 위민(爲民) 사상가였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인 1849년 12월 말에 귀국해서 선종할 때까지 최양업 신부가 이동한 거리는 9만여 리나 된다. 마카오 유학길과 마닐라 피신길이 1만 5천 리요, 귀국로 탐색을 위한 125는 여정이 3만 리요, 귀국 후의 교우촌 순방 여정이 도합 4만 5천리였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작은 여정들을 더한다면 최양업 신부가 일생 동안 누벼야 했던 거리는 10만 리가 훌쩍 넘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양 무리에 들어오는’ 새 입교자들은 언제나 그의 희망이었다. 그는 선교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복음적 가난의 삶 안에서 순명과 겸손과 인내의 덕을 실천하였다. 그가 선교 활동 내내 궁극적으로 바라던 것은 신앙의 자유였다.
“이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틀림없이 기뻐 용약하면서 그리스도의 양 무리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싹 말라버린 저희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나기를 퍼부어 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목이 타고 있는 저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해주소서”(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신학생 시절에 결심했던 대로 최양업 신부는 자신이 모범으로 삼은 하비에르 성인이나 소 바르톨로메오 주교님의 선교 열정을 이어받아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과로 때문에 장티푸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하느님의 품에 안겼으니, 그와 절친했던 권 스타니슬라오(S. Feron) 신부는 그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토마스 신부님께서 쓰러지신 것은 다름 아닌 과로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지난해의 소요(곧 1860년의 경신박해)는 그분의 성사 집전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분은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으며, 밤에는 고백을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했습니다. 그분이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기지 못했다고 합니다”(페롱 신부의 1861년 7월 26일자 서한).
고통과 고뇌의 강물을 수없이 건너던 최양업 신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하느님이셨다. 1861년 6월 15일, 그의 나이 만 40세였다.
차기진 루카 -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전문위원.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순례의 길 떠날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여정
땀방울로 뿌려진 믿음의 씨앗들
글 노희성 기자, 사진 김민수 기자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여정을 따라 순례의 길을 걷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분의 지상 여정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제 최양업과 성조 아브라함
최양업 신부님(1821-1861년)의 삶은 성조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람이 아버지 테라의 인도 아래 칼데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이주하였듯이(창세 11,31), 소년 최양업은 모방 신부님의 인도로 마카오에서 신학교 생활을 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갔듯이(창세 12,10), 신학생 최양업은 마카오 지역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으로 피신합니다.
소돔을 위하여 기도한 아브라함처럼 최 토마스는 조국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내어놓음으로써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받았듯이(창세22,12-18),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와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순교를 제물 삼아 거룩한 사제가 되어 수많은 신앙의 후손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양떼를 먹이려고 목초지를 찾아 이동을 계속하였듯이, 목자 최양업은 전국의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양들에게 천상 양식을 먹여주었습니다.
긴 여정 끝의 사제수품과 귀국
경기도 부평 교우촌에 살던 중, 정하상 바오로 등의 천거로 모방 신부님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된 소년 최양업은 1836년 12월 마카오를 향하여 길을 떠납니다. 8년 뒤인 1844년 12월 중국 팔가자(현 길림성 장춘시)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주교님에게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부제품부터 사제품까지는 4년 4개월이라는 오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제수품일인 1845년 8월 17일보다 훨씬 뒤인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님에게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 뒤, 중국 요동의 차구(현 요녕성 장하시)에서 베르뇌 신부님(1854년 주교수품)의 보좌로 6개월 정도 공식 사목활동을 하였으니, 이것이 한국인 사제 최초의 외국인 사목입니다.
최 토마스는 귀국을 위해 오랜 기간 여러 차례의 시도를 합니다. 신학생 시절인 1842년 7월에 마카오를 떠나 귀국로 탐색을 시작하였습니다(같은 해 11월에 팔가자 도착). 1846년 1-2월에는 부제로서 조선 동북방을 통한 귀국로를 탐색하였고, 1847년 여름에는 고군산군도(현 전북 군산시 옥도면) 부근에서 좌초하여 한 섬에 상륙하기도 하였습니다.
1849년 4월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압록강 하류의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마침내 귀국에 성공합니다.
목숨을 건 사목순방, 땀의 순교
길고 긴 여정과 오랜 기다림, 그리고 목숨을 건 귀국 후에 최양업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머나먼 사목순방길이었습니다. 1846년 병오박해 때 26세의 나이, 1년 남짓한 사제생활로 굵고 짧은 지상 생애를 마치신 첫 사제 김대건 신부님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첫 사제의 피와 둘째 사제의 땀, 이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의 지혜로운 안배입니다. “우리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길 없으시다”(시편 147,5).
귀국 직후인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된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순방은 6개월 동안 거의 5천여 리에 달했다고 합니다. 1861년 선종하실 때까지 방방곡곡의 교우촌 순방여정이 모두 4만 5천 리라고하니, 해마다 평균 4천여 리 땅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행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많은 지역이 거룩한 순례지가 되었듯이,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순방으로 우리나라의 거의 전역이 거룩한 땅으로 거듭났습니다.
최 신부님 일행은 늘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습니다.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습니다. 산골 오지의 교우촌을 향하여 낮에 움직이고, 밤에 성사를 집전한 다음, 날이 새기 전에 또다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밀고와 체포의 위험은 늘 신부님을 따라다녔고, 1860년의 경신박해 때에는 거의 절망적 상황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 신부님은 1860년 9월 3일 죽림(현 울산 울주군) 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께 보내신 서한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다행히 이 고비는 넘기셨지만, 결국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져 ‘예수, 마리아’를 부르시며 1861년 6월 15일 하느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땀의 순교자’입니다. 하느님의 일로 과로를 되풀이한 끝에 체력이 소진되어 더 이상 흘릴 땀조차 없어 하느님께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최 신부님의 삶은 조국의 복음화와 민초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 그 자체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쉼터
충북 진천의 동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님에게 첫 번째 거처요 여름 휴식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님의 허락을 얻어 1850년 7월경부터 몇 해 머무르시다가, 좀 더 안전한 배티를 새 거처요 사목 중심지로 삼으셨습니다.
최 신부님은 교우촌 배티(충북 진천)에서 여름철 휴식을 취하시면서도, 교우촌 신자들을 돌보고, 순교자 행적을 수집하며, 번역과 집필 활동을 하셨습니다. 또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배티 마을 중앙에 사제관 겸 소성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배티성지에는 최 신부님의 사제관 겸 소성당이 재현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소박한 초가집입니다. 집 왼편 마당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신부님의 삶을 압축해 놓은 듯합니다.
최양업 신부님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건립 예정지, 그리고 야외 제대와 성모상을 지나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 무명의 6인 순교자 묘, 14인 순교자 묘가 나옵니다. 포졸들에게 쫓겨온 교우들이 마침내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피를 흘리며 고개 들어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최 신부님도 이들처럼 쫓겨다니셨습니다.
온갖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사제의 본분을 다하신 최양업 신부님에게는 조금 이른 귀천이 허락되었습니다. 피흘리는 순교 대신에, 방방곡곡 산하를 다니시며 12년 동안 뜨거운 땀으로 복음을 전하는 백색 순교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신부님께서는 40년 남짓의 지상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베르뇌 주교님 주례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뒤, 신부님의 시신은 배론(충북 제천) 성요셉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신부님을 본받으려 노력했던 후배 사제들의 묘지도 그 아래쪽에 있습니다.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님도 거기 잠들어 계십니다.
배론성지에는 최양업 신부님의 일대기가 묘사된 아름다운 조각공원이 있습니다. 교우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납골시설이기도 합니다. 황사영 알렉시오가 숨어 지내며 백서를 쓴 토굴, 성요셉신학교도 재현되어 있고, 지난 3월 14일에는 ‘지학순 주교 기념관’이 원주교구장이신 김지석 주교님 주례로 봉헌되었습니다.
최 신부님의 시복시성은 우리의 몫
주님께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풍성하게 뿌리셨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스며든 신부님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그 씨앗들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 땀방울에서 돋아난 새싹이요 줄기요 이파리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을 따라 걷는 순례의 길은 다름 아닌 ‘열매 맺는 신앙인’, 곧 말씀을 듣고 깨달아 몇 곱절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23).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님께 전구를 청하며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에, 그분의 후배들인 신학생, 사제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고 열매를 맺을 때에, 최 신부님은 시복시성의 영예 속에 교회 전체의 공경을 받으실 것입니다.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경향 돋보기 -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최양업 신부가 지은 글들
조광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교회에는 지성의 역사가 맥을 이어 흐르고 있다. 우리 교회는 자신이 살던 시대와 사상에 비판적이던 젊은 지식인 집단의 탐구 정신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한문 교리서를 통해서 새로운 가르침과 접했고, 이를 종교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이끌어주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지적 작업을 통해서 믿음살이와 살림살이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지적 전통은 당시 천대받던 불학무식한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천주교는 학식의 소유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이가 믿을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한문에 숙련되었던 지성들이 지은 천주교 신앙에 관한 노작들은 무지렁이 농투성이에게 새로운 지식과 신앙을 심어주었다. 새 지식을 가진 그들은 민중의 글인 한글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면서 그 신앙에 환희하고 있었다. 한글로 옮겨진 교리서는 또 다른 신앙의 표현물을 만들어 내었다. 1801년의 박해 때 나온 최해두의 참회록인 “자책”이나 이 루갈다의 편지와 같은 글들은 유학자 출신 신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지적 전통이 자라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우리 교회의 지적 전통에서 중요한 인물로는 최양업을 들어야 한다. 그가 마카오에서 받았던 신학교육은 우리나라 교회가 서양교회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수용하여 재창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신앙의 선배들이 세워온 교회의 전통을 갈고 닦아 이를 굳게 하고자 불철주야로 노력했다. 이 노력 덕분에 그는 그침없이 길을 걷는 땀 흘리는 선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조선교회를 위해 적지 않은 글들을 남겼다. 그의 서한, 순교자에 관한 기록과 교리서, 가사(歌辭)는 한국교회의 지적 전통을 이루는 데 한몫했다.
그의 편지들
최양업 신부가 남긴 글들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것은 그가 라틴어로 작성한 편지들이다. 그는 모두 19편에 이르는 라틴어 편지를 마카오에서 자신을 가르쳤던 르그레주아(Legregois) 신부와 리브와(Libois) 신부에게 보냈다. 그가 작성한 편지는 사목활동에 관한 단순한 보고서로만 볼 수 없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새롭게 터득한 가치의 중요성을 말했고, 자신의 지식세계를 드러내었다.
예를 들어보자. 그는 자신이 말레이 반도 페낭에 있던 신학교에 파견한 3명의 신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곧, 그는 1854년 11월에 자신의 은사인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겸손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달라고 당부했다. 이는 그가 새롭게 터득한 그리스도교적 겸손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깨달음은 당시 조선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졌다. 이 편지에서 그는 “조선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평가할 줄 모르며, 인간의 지위와 가치를 세속의 영화와 부귀공명에서 찾을 줄만 안다.”라고 매섭게 비판했다. 이는 그가 겸손의 덕을 인간들이 가져야 할 상호 존중의 정신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에 관건이 되는 것으로 파악했음을 뜻한다. 그러기에 그는 새롭게 자라나는 미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겸손을 이처럼 강조했다.
그는 조선의 양반 중심 신분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물론 그가 살았던 당시는 이미 양반제도가 무너져 가던 시기였지만 그는 자신의 주변 도처에 남아있던 신분제의 잔재를 쓸어 없애고자 빗자루를 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양반의 특권이 인정되고 일반 양인들에게는 복종만이 강요되는 신분제 아래에서는 인간의 존엄성(dignitas humana)은 완전 무시되고, 우애(caritas fraterna)가 보존될 수 없다.”고 외쳤다.
인간의 존엄성과 ‘우애’를 강조하던 그의 말에서 우리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 가운데 일부가 어느덧 그의 정신에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우애란 그리스도교 전통의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특히 존엄성과 우애를 강조했던 데에서 우리는 새롭게 무장되어 가던 근대적 사회사상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또 그는 주장했다. 그리스도께서 늘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의 편을 드셨으니 신분제도는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사회에 대한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신분제도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고질적이지는 아니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했다. 당시 사회에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조선의 신분제도를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조선 사람은 오직 최양업뿐이었다.
그는 권력자인 관리를 채용하거나, 권력 없는 양반들에게 권위를 유지시켜 주는 과거제도가 신분제도를 지속시키는 근간임을 올바로 지적했다. 이에 더 나아가 그는 관직에 사람을 채용할 때 출생 신분 등을 고려하지 말고, 재능과 인격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양반제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전통적인 과거제도를 부정하고, 공직담임권은 만인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현했다.
우리는 최양업의 편지를 통해 그가 직접 서술한 내용뿐만 아니라 그 말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뜻까지도 파악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시각을 가진다면, 우리는 최양업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특성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사상과 정치사상까지도 유추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믿음의 노래
196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국문학계에서는 우리의 전통 가사문학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때 연세대 교수 김동욱은 낡은 한지를 재생하여 창호지를 만들던 경기도 안성 지소(紙所)를 비롯해서 고서적상을 뒤지고 다녔다. 망실되어 가던 국문학 자료를 하나라도 더 건지려는 노력의 표현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가사집 하나를 얻었다. 그 가사는 전통적인 내용과는 판이했고,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를 담은 내용이었다.
이에 그는 이 가사를 ‘천주가사’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가 입수한 책자에 그 저자가 최양업 신부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천주가사’의 저자로 최양업 신부를 비정하게 되었다. 그는 이를 학계에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최양업 신부가 지은 ‘믿음의 노래’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지었다는 믿음의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은 더욱 음미되어 갔다.
“천주가사는 서구사상이 한국의 토양에서 새롭게 형상화된 문학이자 우리 선조들의 신앙고백이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당시 유행하던 문학 형식인 가사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신앙을 표현했다. 이 가사는 4 · 4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3 · 4조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믿음의 노래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교리교사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기도 했다.
그들이 지은 믿음의 노래는 신앙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전례의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전통곡조에 맞추어 믿음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이중배와 원경도 등 신자들이 1800년 부활절에 함께 모여서 기도문을 노래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02년 목포의 드예(Deshayes) 신부가 흑산도 사람들을 선교하던 과정에서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정약전(1758-1816년)이 성가의 가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보고한 바 있다. 그 뒤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1787-1840년)도 ‘삼세대의’를 지어 자신의 신앙을 표현했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한때 교회의 전통에서는 모든 ‘천주가사’를 최양업 신부가 지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나는 틀린 설명이다. 그러나 천주교 가사문학의 전통이 최양업 단계에 이르러 한층 더 비상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전승이 만들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양업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대표적 믿음의 노래로는 ‘사향가(思鄕歌)’를 들 수 있다.
원래 우리나라 문학에서 ‘사향가’는 타향살이의 힘겨움과 서러움,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며 부모와 형제친척 그리고 고향의 어릴 적 친구들을 그리던 노래였다. 그러나 신자들이 불렀던 사향가는 거룩한 노래요 교리서였으며,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그 바른 방향을 가르쳐주던 윤리서였다. 사향가는 한 편의 훌륭한 호교서이기도 했다. 그 사향가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되고 끝맺는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낙토 찾아가세 /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낙토런고 / 지당으로 가자하니 아담원조 내쳐있고 / 복지로 가자하니 모세성인 못들었고 / 이러한 풍진세계 평안한곳 아니로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고향 가사이다 / 세속훼방 탄치말고 세속체면 보지말고 / 세속명리 취치말고 세속일락 탐치말고 / 제삼구를 힘써치고 저칠도를 굳이막아 / 천당길을 바로찾아 대부모를 보사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농촌에서는 이상세계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승지(勝地)는 그들이 바라던 유토피아의 일부였다. 19세기 중엽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천주교 신자들도 낙토(樂土), 지당(地堂), 복지(福地)의 개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향가’는 지상의 유토피아를 천상으로 승화시키며, 참다운 대부모(大父母)인 천주님에 대한 신앙과 이를 드러내는 자기절제와 겸손을 통해서만이 그곳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최양업 신부는 분명 가사체 문학이 가지고 있던 호소력과 친근감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는 가사에 익숙했던 신자들을 위해서 가사의 형식을 빌려 교리를 설명하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궁극에 신앙을 제시해 주었다. 최근 김영수는 한국교회사연구소 등에서 ‘천주가사’에 관한 자료집과 연구서를 간행하였다. 그리하여 최양업이 지었다는 천주가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지적 전통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측면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말
최양업은 1839년과 1846년의 박해 때 신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전기인 “순교자전”을 정리 완성해서 이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또한 그는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러한 책들은 오로지 최양업 자신의 업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이 책들이 편찬 간행되는 데에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다면 그의 저서를 논할 때에 이 책들도 함께 포함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가 한글로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당시 세계교회의 공통언어였던 라틴어로 번안했던 “순교자전”에는 그의 손길과 숨결이 스며있다. 바로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우리나라 ‘79위 복자’들이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도 자신의 견해를 강하게 투영시켰다. 그는 이 책을 편찬할 때 그의 어머니 이성례의 순교에 대한 기록을 삭제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통해서 역설적으로나마 그가 이 책의 편찬과정에서 담당했던 일들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최양업의 어머니 이성례(1800-1840년)는 한때 배교하기도 했다. 자신이 죽게 되면 의지가지없게 될 나이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였다. 이성례의 배교는 하느님이 태워주신 모성애를 따르는 올바른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례는 더 큰 믿음에서, 살아남게 될 자신의 자식들을 하느님께 맡기고, 서울 당고개에서 다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 이성례의 특출함이 드러난다.
최양업은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를 결행한 이들을 순교자의 명단에 올리는 일에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독 어머니인 이성례를 그 명단에서 뺐다. 이 때문에 이성례는 ‘조선순교자 79위 복자’의 반열에도 들지 못했고, 그 복자들이 성인으로 추대될 때에도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왜 그랬을까?
이는 그가 역사에 대한 엄격한 자세를 가지고 있던 데에서 나온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역사를 기록하는 데에 어떠한 흠결이나 사사로운 마음도 용납하지 않았음을 이 일로써 드러냈다.
또한 최양업은 순교자의 영예마저도 과람하게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이 순교자로 죽기보다는 살아서 신자들에게 봉사하는 길을 택하려 했다. 이는 그 자신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겸손의 가치에 대한 실천이었다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자세 때문에 그가 쓴 편지들은 진실될 수 있었다. 그가 써서 보급시켰다는 믿음의 노래들은 신자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 그의 순교자전은 그 기록의 사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가 편찬에 참여했던 “성교요리문답”이나 “천주성교공과”는 신자생활에서 북두(北斗)요 지남(指南)이 될 수 있었다. 최양업은 이렇게 우리 교회의 지적 전통을 잇는 작업을 수행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순교자와 증거자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최양업 신부 가족들의 사회전기도 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경향 돋보기 -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업적에 비추어본 한국교회
류한영
순교와 선교의 영성으로 점철된 생애
최양업 신부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십자가의 능력이 자신의 삶에 응결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렇게 청한다.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저의 이 서원을 신부님의 기도로 굳혀주시고 완성시켜 주십시오”(세 번째 서한).
또, 순교자들의 영적 전쟁에 함께하여 목숨을 바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였다. “부모와 형제를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처럼 장렬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두 번째 서한).
최양업 토마스는 1842년 11월부터 1846년 11월경까지 소팔가자를 주거주지로 삼아 신학공부를 하고 입국로를 찾으려고 하였다.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뒤에 그는 소팔가자의 신학생들을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 1846년 12월 중국 심양에서 쓴 편지에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선교 열정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있다.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 요동의 차쿠 본당에서 베르뇌 신부(후에 제4대 조선대목구장) 밑에서 6개월 동안 중국인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귀국을 준비하면서 한국인으로 중국 선교의 첫 장을 연 것이다. 그해 12월에 귀국한 뒤, 1861년 6월 선종하기까지 1년에 7천 리 이상, 5개 도 100여 개 이상의 교우촌을 다니며 사목순방에 나섰다. 그의 삶은 선교에 대한 열망과 사명감으로 가득했다.
그는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과중한 일에 시달렸다. 메스트르 신부는 1855년 2월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 신부가 한 해에 대부분의 신자를 찾아가 4,500명의 고해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 신부의 소원은 “천상음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실컷 배불리 포식시키는 것”이었다(일곱 번째 서한).
최 신부는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신자들의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를 보면 그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자비와 연민의 마음이었다.
최 신부는 동정녀 바르바라의 죽음에 커다란 회한을 가졌다. 박해시기에는 동정을 지키려면 동정부부로 살든가 동정생활의 결심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 금지의 제재를 가하기도 하였다. 수도생활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고 박해의 위험 때문에 행한 조치였다. 동정생활을 갈망하면서도 성사 금지 처벌을 받은 바르바라는 큰 슬픔에 빠졌고 차라리 병에 걸려 천상 아버지께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그녀는 중병에 걸려 병자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 하늘나라에 갔다.
최 신부는 커다란 회한과 가책과 하느님 사랑의 감정을 느낀 채 이렇게 기록했다. “사악이 그녀의 지력을 손상할까 봐, 또 위선이 그녀의 총명을 흐리게 할까 봐 바삐 하늘로 거둠을 받았으니, 그녀의 생애는 짧은 시간에 쇠진하였으나 많은 시간을 채웠도다”(일곱 번째 편지). 최 신부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착한 목자요 바오로 사도 같은 선교사였다.
최양업 신부의 업적은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의 시복시성 추진,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 수집, 천주가사의 저술과 보급, 가톨릭 교리서와 전례서 편찬과 보급, 신학생 양성 등을 들 수 있다.
1847년 4월 20일의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고 페레올 주교님께서 프랑스어로 기록하여 보내주신 순교자들의 행적을 읽는 것은 저에게 더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고 주교님도 원하시고 이 메스트르 신부님도 권하시므로 제가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1847년 교황청 예부성에 접수된 뒤 시복절차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행적에 수록된 82명 전원이 1857년에 가경자로 선포되고 1925년도에 79명이 복자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최 신부는 바쁜 공소 순방을 마치고 휴가기간 동안 순교자 조사를 하였다. 이 일은 단순한 관심사를 넘어 하느님께 약속한 바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저는 하느님의 자비로 오랫동안 서원으로 맹세했던 대로 저의 동료들에 대하여 더욱 주의 깊게 고찰하고, 조상들의 순교 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여덟 번째 서한).
최 신부는 자신이 서원한 대로 많은 자료들을 찾아내서 스승에게 보고하려 하였으나 다블뤼 주교에게 드렸으므로 따로 보고하지 않겠다고 언급한다. “지난해에 제가 우리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 신부님께 보고드리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나 그것을 존경하올 다블뤼 주교님께 모두 드렸습니다. 안 다블뤼 주교님께서 모든 순교자들의 전반적 역사를 편찬하고 계십니다”(열세 번째 서한).
이러한 편지의 내용을 통해 보면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상당 부분이 최 신부가 수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최 신부는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로 신앙교육을 하려고 했다. 한글 서적이나 천주가사는 전교활동과 교리공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한글이 교리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어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여덟 번째 서한).
한글로 기록된 ‘천당 노래’ 또는 ‘신앙 전래 노래’를 ‘천주가사’라고 한다.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교 교리를 노래로 전수하고 가르쳤다. 박해시기의 천주가사는 21편이며 큰 제목으로는 9편으로 나눌 수 있다. 곧, 민극가 성인의 ‘삼세대의’, 이문우 성인의 ‘삼덕가’, ‘제성’, ‘행선’과 ‘옥중제성’,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사향가’,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보급되고 읽힌 천주가사가 ‘사향가’이다.
또한 최 신부는 1859년 10월에 주요 전례 기도문인 “천주성교공과”의 번역을 마쳤고, 가톨릭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최 신부의 짐을 덜어주고 순교자에 관한 기록을 보강하려고 경상도 지역 일부 교우촌의 순방을 맡았다(열일곱 번째 서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최 토마스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는 보통 일 말고도 주요한 기도서의 번역을 끝마쳐 가는 중이었고, 교리문답의 완전하고 더 정확한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한국 천주교회사” 하권, 번역본, 299)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최 신부는 진천 배티의 조선교구 신학생 3명을 지도하고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으며, 신학교가 제천 배론으로 이전되자 그곳을 방문하여 신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업적에 비추어본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찰
베르뇌 주교의 1861년 9월 4일의 편지를 보면, 신자 숫자가 18,035명으로 나온다. 그 당시 주교 2명, 신부 7명이 활동하였으며 사목구 7개, 신학교 1개가 있었다. 2009년 12월 31일 현재 한국교회 신자 수는 5,120,092명, 주교는 30명, 신부는 4,374명, 본당은 1,571개, 공소는 1,017개, 신학교는 7개이다. 남자수도회는 47개에 회원이 1,555명이고 여자수도회는 106개에 회원이 10,073명이다. 의료기관과 사회복지기관은 1,300여 개에 이른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었고, 오늘도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시작했던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의 절차는 103위 성인의 탄생으로 한 단락 마감했다. 그리고 주교회의가 추진 주체가 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 안건,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시성 안건이 지금 로마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전통은 ‘한국전쟁 순교자’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이분들의 시복 조사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 2차 시복 추진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최양업 신부의 유업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에서는 “매일미사”, 전례용 독서, 성가, “성무일도” 등을 번역하고 편찬 · 간행하고 있는데 이 역시 최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보급하고, 연중 주요 기도문을 번역한 일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에서는 “간추린 가톨릭교회교리서”나 “청년 교리서” 등을 편찬하고 있는데 이것도 교리서 편찬 작업에 참여한 최 신부의 활동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교리서 간행작업은 아직도 미완성 단계에 있다. 좀 더 다양하고 각 계층에 맞는 교리서 연구와 편찬이 과제로 남아있다.
최양업 신부가 한국에서 활동했던 시대(1850-1861년)는 선교사의 시대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방인 성직자로 양성된 2명의 한국인 사제가 조선대목구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대목구는 오늘날 16개 교구로 성장하였다. 평양교구와 함흥교구와 덕원 자치 수도원구는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토대는 선교사들이 흘린 피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교구 소속의 한국인 신부는 3,605명이고, 선교회 소속 신부는 59명, 수도회 소속 신부는 529명이다. 외국인 신부는 191명이다. 3,000명 이상이 교구신부이므로 교구와 수도회의 균형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보편교회는 초대교회의 순교자 시대를 마감하며 증거자의 시대로 넘어서면서 많은 수도회 성인들을 배출하였다. 4세기 초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그리스도의 정신과 교회 영성의 맥은 수도자들을 통하여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들어가 순교정신으로 복음삼덕을 증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와 증거자가 되었다. 미래의 한국교회가 성숙하고 아시아 선교의 중심이 되려면 수도자들이 존경받는 풍토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수도회 출신의 성인이 배출되지 않았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이 완결되지 않아 이러한 과정이 지연되는 면도 없지 않으나, 젊은이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수도생활을 하려면 수도회 창설자나 수도생활의 귀감이 되는 분들이 시복시성되어야 한다. 남자수도자와 여자수도자의 차이는 10배나 된다. 이러한 큰 차이는 교구 소속의 신부가 교회와 사회에서 인정받고 좋게 보이는 환경과 전통에 영향을 받아 수사신부의 숫자가 줄어든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해시대의 동정녀와 동정부부의 삶을 오늘날의 영성으로 표현하면 ‘재속봉헌생활’이다. 교회법 제710조는 “그리스도 신자들이세속에 살면서 애덕의 완성을 향하여 노력하고 세상의 성화를 위하여 특히 그 안에서부터 기여하기를 힘쓰는 봉헌생활회”가 재속회임을 밝히고 있다. 수도회의 봉쇄생활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나 이 세상 안에서 봉헌생활을 하려는 욕구가 우리 사회 안에서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사도직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북방선교’라는 화두가 한국교회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훌륭한 과업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실상 그러한 정신과 삶을 살려는 선교사들은 드물고 적은 듯하다. 이 점은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의 정신과 자세가 현재에 이어지지 않는 단면이기도 하다. 몇몇 교구신부들이 북방선교를 준비하려고 중국에 가서 탐색을 하고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교구사제로 양성된 신부들이 종교 박해가 교묘하게 지속되고 있는 공산정권하에 선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주교회의 선교단체로 한국외방선교회가 있다. 북방선교 또는 아시아 선교를 한국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한다면 선교사 양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후원 방법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생기는 선교회 단체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과 메리놀외방전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황석두 루카 선교회의 김동일 신부를 교구신부에서 선교회신부로 이적시켰다. 이는 시사하는 것이 크다. 증거자의 시대를 맞이하여 훌륭한 선교사들이 많이 늘어나 한국교회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소망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교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들이 있다. 가정에서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아 성소자들이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7개 교구의 신학교 신학생들이 점점 줄고 있다. 이러한 자리에 중국교회나 아시아 교회의 신학생들이 채울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생산적인 대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류한영 베드로 - 청주교구 연수동본당 주임신부.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주교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즐거운 여가 건강한 신앙] 청주교구 배티성지 ~ 진천성당
신앙선조 혼 깃든 '한국의 카타콤바'
▲ 최양업 신부.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충북 진천군 진천종합버스터미널.
백곡면 양백리에 있는 배티순교성지로 가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날렸다. 버스는 오전 9시 30분ㆍ낮 12시 10분ㆍ오후 2시 50분ㆍ오후 5시, 하루 네 대 뿐이다.
터미널에서 성지까지는 차로 30분이 걸린다. 청주교구가 지정한 3박 4일 도보성지순례 코스(배티~진천~괴산~연풍 84㎞) 중 하루 코스인 1ㆍ2구간, 배티성지~진천성당(16.7㎞)을 걸을 계획이다.
순례 안내책자를 챙겨들고 성지를 빠져나와 새로 조성된 옛 신학교 터로 향했다.
▲ 옛 신학교 겸 성당을 향해 오르는 103위 성인 계단. 순교자들이 박해의 칼을 받고 쓰러지는 순간, 곧 맞이하게 될 천상 행복에 엷은 미소를 지었을 것을 생각하니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 된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사목 중심지
10분쯤 가다 103위 성인 계단을 오르니 십자가의 길에 둘러싸인 마당이 나온다.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나무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재촉하는 도포 차림의 최양업 신부 동상이 그 끝에 서 있다. 동상 옆에 옛 신학교가 있다. 혹시나 해서 창호지 발린 문을 살짝 당겨보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성체 거양을 하고 있는 최 신부가 떡하니 앉아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어가 비치돼 있는 참배기도문을 바치고 길을 나섰다.
"저는 너무 약한 어깨에 힘에 겨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놓은 산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 재현해 놓은 옛 신학교 겸 성당 안 성체 거양을 하고 있는 최양업 신부 동상.
'땀의 순교자' 최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쓴 서한이 피부로 와 닿기 시작한 것은 성지에서 2~3㎞쯤 떨어진 옛 삼박골 교우촌을 향해 산비탈을 오르면서부터다. 도보순례에 나선 지 두 시간여 만에 도보가 등산으로 바뀌는 시점이다. 절골은 현 백곡면 용덕리로 추정된다. 윤의병 신부의 유명한 순교소설 「은화(隱花)」의 주무대가 된 이곳은 소설에 등장하는 이 진사와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우촌이자 성 다블뤼 안 주교와 칼래 강 신부가 들러 성사를 주고 쉬던 곳이다.
옛 교우촌으로 향하는 소로에 접어들자 길가 외딴 집에서 강아지 다섯 마리가 요란스레 짖어댄다. 지도상에는 700m라고 쓰여 있는데, 오르막이라 그런지, 처음 가는 길이라 그런지 더 멀게 느껴진다. 중턱쯤 오르자 멀리 잘 가꿔놓은 묘소가 보여 한달음에 달려가니, 으리으리한 묘는 어느 문중의 일반 무덤이다. 그 뒤로 작은 십자가 두 개가 위아래로 서 있는 소박한 묘가 순교자의 것이다.
▲ 배티성지에서 내려오는 길.
병인박해가 한창일 때 실제 인물 이 진사는 피신했지만 그의 아내와 딸은 현장에서 순교한다. 지금도 순교자 모녀는 이곳에 남아 옛 교우촌을 지키고 있다.
다시 길가로 나왔다. 백곡공소까지는 5~6㎞가 남았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길에서 얼굴을 익힐 듯한 열기가 올라온다. 모처럼 비가 오지 않아 기분 좋게 나섰건만 30℃가 넘는 늦더위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바지가 들러붙어 차라리 비가 오는 게 나을 성 싶다.
물을 살 곳도 없고, 그늘도, 화장실도, 안내 표지판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만 제 세상 만난 양 쌩쌩 달린다. 일부 구간에는 걸을만한 곳이 없어 차도로 걸어야 하는데 단체가 아닌 개인이 걸을 때는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할 것 같다.
▲ 김영구 선교사가 백곡공소 앞에 있는 순교자 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담당하는 그러한 공소 즉 교우촌이 자그마치 127개나 되고, 그러한 촌락에서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 중)
16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길에는 인적이 드물다. 멀리 도로공사 중인 인부들이 보인다. 아마도 석 달 전 청주교구 청소년대회 참가자들이 이 길을 걸었을 때가 제일 사람이 많지 않았을까 싶다.
▲ 29위의 유명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진천성당 전경.
순교자들의 본향, 영원한 안식처
이대로 가다가 일사병에 쓰러질 것 같을 때쯤 저 멀리 백곡공소가 보인다. 이 공소를 지키는 김영구(유스티노, 67) 선교사가 순례객을 반갑게 맞는다. 그는 항상 경당과 교육관 문을 열어놓고 순례객을 기다린다. 공소 앞에 순교자 박바르바라와 윤바르바라 묘가 있다.
올케와 시누이 사이였던 둘은 병인박해 때 함께 체포돼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다. 본래 배티 뒷산 무명순교자 묘역에 안치돼 있던 것을 1977년 후손들이 선산으로 이장하려고 하자 공소 신자들이 "공소에 모셔두고 잘 돌보겠다"고 설득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 청주교구 신앙선조들과 함께하는 도보성지순례.
조선 귀국 후 12년 동안 5개 도를 9만 리 이상 걸으며 복음을 전하고 마침내 과로로 병을 얻어 선종한 최양업 신부를 생각하면 진천성당까지 남은 길도 걸어야 마땅하지만, 찌는 듯한 더위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신자 승용차에 올라탔다. 박해시대에 태어났다면 난 분명 배교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길가에서 차를 얻어 타려고 손을 흔드는 청년을 보니 남 일 같지 않다. 시내를 향해 15분 정도 굽이굽이 달리자 진천성당이 나왔다.
29위의 유명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여서일까. 성당 앞 거목만큼이나 뿌리 깊고 두터운 신앙이 깃들어 보이는 성당에 앉아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사제 시복시성를 기원하는 기도를 바친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굳건한 믿음과 불타는 열정으로 구만 리 고달픈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방방곡곡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돌보는 데 온 정성을 바쳤나이다.
자비로우신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성인 반열에 들게 하시고 저희 모두가 그의 선교 열정과 순교 정신을 본받아 이 땅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몸바치게 하소서."
[평화신문, 2010년 10월 3일, 김민경 기자]
최양업 신부 서한 2통 새로 발견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승룡 신부,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서 입수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토마스, 1821~61) 신부의 서한 2통이 새로 발견됐다.
이들 서한은 모두 당시 만주대목구장으로 있던 파리외방전교회원 베롤 주교에게 보낸 편지로, 1857년 10월 20일자로 소리웃(전라도 북부 오두재나 용인 손골, 충청도 남부 불무골 등 인근) 교우촌에서 보낸 서한과 1859년 10월 13일자로 안곡(충남 부여군 외산면 혹은 미상)에서 보낸 서한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써 최 신부의 서한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4통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4통, 바우링 주중 영국공사 겸 홍콩 총독에게 보낸 1통 등 기존 19통에 2통을 더해 모두 21통이 됐다.
기존 19통은 파리외방전교회가 1997년 6월 한국 천주교회에 기증, 현재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새로 발견된 2통은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그대로 보관돼 있고, 사본만 국내에 들여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에 새롭게 공개된 2통의 서한은 모두 최근 최승룡(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새로 입수한 것들로,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중국 관계 관련 문서철에서 찾아냈다는 점이 가장 뜻이 깊다. 이에 따라 최 신부의 또 다른 서한뿐 아니라 새로운 한국 천주교회사 관련 사료를 중국이나 일본 관계 문서철에서 찾아낼 가능성과 희망을 한국교회에 안겼다. 특히 기존에 조선교회 관련 사료들이 분류돼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562권(1840~60)과 563권(1824~65), 566권(1838~1898) 외에도 조선교회와 관련된 시기의 중국관계 문서철 438권(1780~87) 등 11권을 재검토할 필요성이 커졌다.
김상균(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 신부가 번역한 2통의 서한은 가난한 백성들이 당시 조선 정부 관리들의 폭정과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는 최 신부의 자애로운 아버지와도 같은 면모를 엿볼 수 있으며, 신앙의 자유를 얻는 데 프랑스 정부의 일정한 역할을 해줄 것을 최 신부가 바라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최 신부 서한에 대한 각주와 해제를 맡은 방상근(석문 가롤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은 "현재 최양업 신부님이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돼 시복시성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최 신부님 서한이 2통이나 새롭게 공개돼 뜻이 깊다"며 "이를 계기로 새로운 자료를 찾으려는 교회 차원의 노력이 좀 더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평화신문, 2013년 8월 11일, 오세택 기자]
최양업 신부 서한 2통 새 공개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승룡 신부 파리외방전교회서 사본 입수
최양업 신부의 친필서한 2통이 새롭게 공개됐다.
친필서한은 최승룡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가 지난해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를 방문해 원본을 직접 확인하고 복사한 사본을 입수한 것으로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 이하 연구소)가 발행하는 「교회와 역사」 8월호에 라틴어 원문 전문과 우리말 번역문(번역 김상균 신부·연구소 고문서고) 및 해제(방상근 연구소 연구실장)가 실렸다.
2통의 서한은 최양업 신부가 만주대목구장 베롤(Verrolles · 方若望) 주교에게 보냈으며 1857년 10월 20일 소리웃에서 작성된 것과 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작성된 것이다. 두 서한에서는 조선말기 박해시대에 국가와 양반들의 폭정에 시달리는 가난한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는 최양업 신부의 자애로운 아버지 상을 엿볼 수 있으며, 기존 서한에서와 같이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재확인했다. 이번에 새로이 공개된 서한의 내용은 기존 19통 서한과 크게 다른 점은 없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기존 서한 중 18통이 파리외방전교회 한국관계 문서철(제577권, 제579권)에서 발견된 것과 달리 2통의 서한은 한국관계 문서철에 없었고 수신자인 베롤 주교와 관련된 문서철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면서 한국교회와 관련된 자료가 반드시 한국관계 문서철에만 있는 것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연구소 방상근(석문가롤로) 실장은 “이번 발견을 계기로 한국교회 사료를 찾기 위한 교회 차원의 노력이 좀 더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13년 8월 11일, 박지순 기자]
새로 발견된 최양업 신부 서한 2통 의미(상보)
교회사 사료 추가 발굴의 새 가능성 제시
최양업 신부의 서한은 기존 19통이 익히 알려져 있고 「최양업 신부 서한집」(한국교회사연구소1984), 「최양업 신부의 서한」(청주교구·1996),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가톨릭출판사·2006) 등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최승룡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입수해 「교회와 역사」 8월호에 공개한 최양업 신부의 새로운 자필 서한 2통은 최양업 신부의 행적과 당시 한국교회 상황 파악의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사 사료 추가 발굴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기존 19통의 서한 수신인이 르그레즈와·리브와 신부와 마카오의 스승 신부였던 반면 2통의 새로운 서한 수신인은 만주대목구장 베롤(Verrolles · 方若望) 주교라는 사실도 주목된다.1857년 10월 20일 소리웃에서 작성한 편지지 2장짜리 서한은 1857년 9월 15일 불무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기존 14번째 서한과 1858년 10월 3일 오두재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기존 15번째 서한 중간에 위치한다.소리웃은 전라도 교우촌, 용인 손골, 불무골이나 오두재 인근 교우촌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최양업 신부의 1857~1858년 사목 경로 중 일부 지역으로 판단할 수 있다. 소리웃 서한에는 1856년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입국한 사실, 1857년 다블뤼 신부의 주교 서품식, 그리고 1856년 자신이 성무를 집행할 때 외교인들과 충돌한 사건 등이 담겨 있다. 또한 “외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조선인은 프랑스 배가 와서 조선 사회를 변화시켜 줄 것을 바라고 있다”라고 말해 조선 말기 조정을 불신하는 민중들의 동향도 전하고 있다. 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편지지 2장에 써 보낸 서한은 1859년 10월 12일 역시 안곡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기존 18번째 서한과 1860년 9월 3일 죽림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를 공동 수신인으로 해서 보낸 마지막 서한 사이에 쓴 것으로 최양업 신부가 안곡에서 17~18번째를 포함해 집중적으로 서한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안곡 서한에는 베롤 주교가 1858년 12월 21일자로 보낸 서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적고 당시 조선에 박해가 공적으로는 중단됐지만 박해령이 살아 있어 사람들이 입교를 미루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박해의 외면적 중단 사유를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영향으로 분석함으로써 조선이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이번 2통의 서한은 최양업 신부가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는 시점에서 공개됐다는 점도 의미를 크게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3년 8월 11일, 박지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