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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崔氏
太師 文貞公 (諱)承老님
高麗文治主義的
制度確立
고운 최치원님
손자(孫子) 서기 9 2 7 年 고려태조(高麗太祖) 10年에 탄생,
成宗(6 代王)때 문신으로 고려(高麗)의 문치주의적(文治主義的) 제도(制度)를 확립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2세때 논어를 읽는 것을 太祖가 보고 매우 감탄하여
원봉성(元鳳省) 학사라는 벼슬을 내린 후 태조(太祖)로 부터 성종(成宗)에 이르기 까지 6 代王을 섬기면서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성종원년(서기 9 8 2 年)에
<정광행선^正匡行選^관어사^官御事^상주국^上柱國)이 되고 정치개혁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여 시무 2 8 조(始務 2 8 條)를 올려 국가
전반에 걸쳐 폐단의 시정과 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 고려 왕조의 기초 작업에 큰 역활을 했다.
이로 인해 그 이듬해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가
되고 成宗 9 年 서기 9 8 8 年에 다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청하후(淸河侯)로 피봉 되었다.
특히 불교를 개인적인 신앙으로 고정하고 정치의 지도 원리로서
유교를 택했다.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근본이 있는 것이며, 불교는 내 몸을 닦는 내세(來世)를 위한 일이라고 주장 유교 교리에 의하여 고려
왕조의 통치 원리를 확립했다.
그런데 유교를 통치 원리로 삼은 청하후(淸河侯)의 탄생
신화는 불교(佛敎)와의 깊은 관계가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기도 하다.
신라 경애왕(景哀王) 4 年 원보(元甫)라는 벼슬에 있던
부친 최은함(崔殷含)님은 늦도록 아들이 없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 앞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려 그 영흠으로 아들 승로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탄생 한지 석달도 채 못되어 후 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습격, 경애왕을 살해 하는등 포석정의 변이 일어나자 부친은 다급한 나머지 아기를 중생사의 관음보살에게 맡기기로 하고 관음보살의 대좌 밑에 숨겨
두고는 울면서 난리를 피하게 되었다.
몇일만 피하면 될줄 알았던 난리가 무려 15일이 걸려서야
적병이 물러가게 되어 평정을 되찾게 되었고 절망에 가득찬 부친은 급히 중생사로 뛰어가 관음보살의 대좌 밑을 열어보고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는 목숨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금방 목욕 한 것처럼
부드러운 살결에다 젖 냄새를 풍기며 생긋 생긋 웃고 있었다.
관음보살이 보름동안이나 젖을 먹여 주고 길러준 기적을 낳은
것이다.
이와 같은 탄생 신화를 가진 淸河侯가 당시 불교의 폐단을
우려 고려(高麗)의 모든 정책(政策)을 유교(儒敎) 교리에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식견이 매우 높음을 한층 더 느끼게 한
것이다.
향년 63세로 여생을 마침으로 왕이 매우 슬퍼 하며
태사(太師 : 임금의 고문 국가 최고의 명예직) 에 추증하고, 성종(成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다. ![](http://static.se2.naver.com/static/full/20130612/emoticon/1_40.gif)
홈 > 콘텐츠목차 > 인물 사전 > 최승로(崔承老)
인물 사전
[요약정보]
[상세내용]
927년(태조 10)∼989년(성종 8). 고려 초기의
문신‧재상. 본관은 경주(慶州). 신라 6두품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이다.경주에서 출생하여 935년(태조
18)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들어왔다.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태조의 사랑을 받았다. 즉 12세 때에 태조가 불러 『논어』를 읽게 하고서 매우 가상히
여겨 염분(鹽盆)을 하사하고 원봉성학생(元鳳省學生)이 되게 하였으며, 또 안마(鞍馬)와 예식(例食) 20석(碩)을 하사하는 등 특별한 은총을
내렸다.그뒤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비교적 일찍부터
문병(文柄)을 위임받아 문장과 학문계통의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당대 제일의 지식인 대열에
참여하였다.신라 6두품 지식인 중에는 도당(渡唐) 유학생 출신이
많았지만 국내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국내에서 공부하여 가장 높은 지식수준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우리나라의 문화적 기반이
그만큼 발전되어 있었음을 반영해주는 것이기도 하다.생애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광종 때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고려사』 최승로전(崔承老傳)에
보면 연령상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기인 20대 초에서 40대 말까지의 생애를 보낸 광종 때에 문병을 맡았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학사직(學士職)을 가지고 비록 소극적이나마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으리라는 설이 있다.그러나 광종의 정치에 어느 정도 깊이 참여하고 있었으며 광종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하였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다. 아마도 중국
후주(後周) 출신 쌍기(雙冀)의 등장 이후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냈던 것으로
추측된다.그러나 경종을 거쳐 982년(성종 1)에는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으로 행정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이해 6월, 성종이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각각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자 그는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다섯 왕의 치적평(治績評)과 함께 북계(北界)의 확정과 방위책, 공덕재(功德齋)의 폐지,
승려의 궁중출입금지와 왕의 불법숭신(佛法崇信)의 억제 등 불교의 폐단에 관한 건의문과 그밖에 사회문제 및 대중국관(對中國觀) 등 28조에 달하는
시무(時務)를 올려 성종을 크게 공감시켜 당시 실시된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이 상서문에는 정치사상과 고려 초기의 역사적 상황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 방면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상서문을 올린 직후부터 어린 성종의 정치보좌관으로서 활약하여 983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영전되고, 988년에는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으로
청하후식읍칠백호(淸河侯食邑七百戶)에 봉해졌다.그뒤
여러 차례 치사(致仕)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성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989년에 죽으니 성종은 몹시 슬퍼하고 하교(下敎)하여 그 훈덕(勳德)을 포상하고 포(布) 1,000필, 면(麪)
300석(碩), 갱미(梗米) 500석 등을 부의하였는데, 성종의 이와같은 지극한 특별 배려를 통해서도 최승로가 성종대에서 차지한 정치적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엿볼 수 있다.태사(太師)에
추증되고, 998년(목종 1)에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1033년(덕종 2)에 대광 내사령(大匡內史令)이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한편, 불교적
입장에서 탄생설화를 담고 있는 『삼국유사』의
삼소관음중생사조(三所觀音衆生寺條)에는 그와 아버지의 이름이 ‘승로(丞魯)’‧‘은함(殷諴)’으로 되어 있어
『고려사』 열전(列傳)의 기록과 서로 다르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崔承老의
時務二十八條(金哲埈, 趙明基博士華甲記念佛敎史學論叢, 1965;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新羅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 政治理念(李基白, 大東文化硏究 6‧7合輯,
1970)
高麗初期 崔承老의 政治思想硏究(河炫綱, 梨大史苑 12,
1975)
[집필자]
하현강(河炫綱)
수정일 |
수정내역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0-09-20 |
본관을 경주로 함. |
![moon_and_james-34](http://gfmarket.phinf.naver.net/moon_and_james/original_34.png?type=p50_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