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訪韓] '의리' 말한 시진핑… 최치원·김구 언급하며
"韓·中 은 情의 역사"
최재혁 기자
원선우 기자
입력 : 2014.07.05 03:00 | 수정 : 2014.07.05 12:02
[시진핑, 서울대
특강… 中 주석이 한국 대학 찾은 건 처음]
- "한반도 통일 실현될 것"
"청년은 中韓 양국의
미래… 南北 힘 합쳐 관계개선해야"
- 日 들으라는
듯
"對日 항쟁이 가장 치열했을 때 韓中, 생사를 같이하고
도왔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4일 중국 최고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의 대학을 찾아 젊은이들을 상대로 특별강연을 했다.
서울대 글로벌공학교육센터 대강당에서 열린
이날 특별 강연에는 서울대 재학생과 교직원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시 주석은 젊은 청중을 향해 "청년은 중·한 양국의 미래이자 아시아의 미래"라며 "서로 배우고
창조하며 우정을 쌓아서 중·한(中·韓) 친선의 충실한 계승자가 되길 기원한다"고 했다. 남북한 통일에 대해 시 주석은 "한반도의 양국 관계가
개선되길 희망하고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이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지지한다"면서 "남북 양측이 힘을 합쳐 남북 관계 개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면 한반도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이 꼭 실현될 것"이라고 했다.
-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4일 서울대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날 강연에는 최경환(아래 사진 앞자리 왼쪽부터) 경제부총리 후보자와 이홍구 전 총리, 권영세 주중 대사, 박원순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지사가 참석, 박수를 치고 있다. /남강호 기자·TV조선
시 주석은 "20세기 상반기에 야만적인 침략 전쟁이 벌어지고 대일(對日) 항쟁이 가장 치열했을 때 (양국은) 생사를 같이하고 서로
시 주석은 중국이 추구하는 '미래'를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했다. 평화를 수호하는 국가이며 협력을 추진하는 국가, 겸허하게 배우
이어 시 주석은 한·중 관계의 '미래'로 넘어갔다. 그는 우선 '의리(義理)'를 강조했다. 시 주석은 "중화 민족은 의리를 바탕으로 산다. 군자는 의(義)를 바탕으로 삼는다고 한다"고 했다. 시 주석은 "작년 방중(訪中)한 박 대통령이 비즈니스 포럼에서 한 중국어 연설에서 '먼저 친구가 되자, 그리고 장사를 하자'고 했는데 이는 선의후리(先義後利)의 사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시 주석은 "중국은 예부터 태극권 문화이고 한국의 국기는 바로 태극기다. 우리는 음과 양이 상생하고 강함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지는 것처럼 잘 어울린다"고 했다.
강연 말미에 시 주석은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한국민이 중국에 성금을 전달한 사례, 중국인이 한국에 골수 기증을 한 사례도 거론했다. 시 주석이 "'별에서 온 그대'를 비롯한 한류 드라마가 중국에서도 큰 유행"이라고 하자 박수와 웃음이 터졌다.
시 주석은 "당나라 시선(詩仙) 이태백이 '거친 바람과 물결 헤칠 때가 오리니 돛을 달고 거센 바다를 건너리'라는 명구를 만들었다. 우리가 협력의 바람을 타고 파도를 가르며 지속적으로 나아갈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한-중 정상회담 결과
가. 단독회담 : 7.3(목) 16:20~17:55 (당초 17:00 종료예정), 청와대 본관 접견실
o 의 제 : 북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정세, 주요사안(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서해 조업질서 등), 동북아 정세(동북아
평화협력구상, 한‧중‧일 협력 등)
o 배석자
- 우리측 : 윤병세 외교부장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권영세 주중국대사, 주철기 외교안보수석, 황준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 중국측 : 왕후닝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리잔수 중앙판공청 주임, 양제츠 국무위원, 왕이 외교부장, 추궈홍 주한
대사
나. 확대회담 : 7.3(목) 18:00 시작 (당초 17:05 시작예정), 청와대 본관 세종실
o 의 제 : 한‧중관계 평가 및 발전방향(한‧중 공동성명 채택 평가 등), 양측 관심사항(한‧중 FTA, 위안화 활용도 제고, 교역‧투자 등 경제협력 확대, 해양경계확정 협상, 판다 도입 등), 국제정세(유엔에서의 협력 등)
o 배석자
- 우리측 : 윤병세 외교부장관, 윤상직 산업부장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권영세 주중국대사, 주철기 외교안보
수석, 윤두현 홍보수석, 안종범 경제수석, 김형진 외교비서관, 주형환 경제금융비서관, 문재도 산업통상자원비서관,
김홍균 정책조정비서관
- 중국측 : 왕후닝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리잔수 중앙판공청 주임, 양제츠 국무위원, 왕이 외교부장, 쉬사오스 국
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 가오후청 상무부장, 류허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 추궈홍 주한대사, 딩쉐샹 국가주석판
공실 주임, 류전민 외교부 부부장
금번 한‧중 정상회담시 주요 협의내용은 양측 정상의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설명되는 바와 같으며, 기타 몇 가지 관
심 세부 사항에 관한 양측간 협의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청소년‧청년 교류 증진 측면에서 금번 정상회담의 성과
한‧중 청년 지도자 포럼 신설
- 양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청년 지도자간 네트워크 강화를 통해 한‧중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 기반 공고
화를 목표
- 양측은 주관 기관, 대표단 구성, 포럼 주기 및 프로그램 신설을 위한 구체 방안 등을 협의해 나갈 예정이며, 가급
적 정계‧재계‧학계‧언론계 등 다방면의 청년 대표들로 구성되도록 검토중
2015년부터 5년간 매년 100명의 상대국 청년 지도자 상호방문 초청 신규 추진
- 구체 주관 기관 및 추진방안 등 검토‧협의중
한‧중 청소년 교류사업 내실화
- 동 사업은 청소년의 글로벌 역량 강화와 양국간 상호이해 증진을 위해 2004년에 출범하였으며, 작년에 이어 금년
에도 양측에서 각 500명씩 총 1,000명의 청소년을 상호 파견‧초청할 예정
- 금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앞으로 일부 청년들에게는 기존의 문화체험 뿐만 아니라 직업능력 개발 및 창업을 주제
로 한 활동참가 및 중국내 다보스 포럼 참가 기회 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동 사업의 내실화가 이루어질 계획
※ 사업 개요
- 교류규모 : 파견 500명, 초청 500명(각 8일간)
‧이중, 파견 20명, 초청 20명은 인문유대 강화 일환
- 교류시기 : 파견 3회, 초청 4회
‧파견(500명) : 6월 200명, 9월 280명, 9월 20명
‧초청(500명) : 5월 200명, 9월 100명, 10월 180명, 10월 20명
- 소요경비 : 초청국에서 항공료, 체재비 등 전액 부담
- 주관기관 :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청소년교류센터)/중화전국청년연합회
「한-중 心信之旅* 공공외교캠프」 개최 * 심신지려는 작년 6월 국빈방중 계기 슬로건
- 작년 6월 방중 계기에 합의한 한‧중 공공외교 분야 협력 확대의 일환으로 양국 차세대간 교류증진을 위해 외교부,
KBS, 중국 인민망 주최하에 실시
※ 사업 개요
- 기간 및 장소 : 2014. 7.8~7.13, 서울 및 지방도시(강원도 등)
- 내 용 : 중국의 제분야 차세대 30명을 한국으로 초청, 한국 차세대 30명과 공동의 관심사를 논의하고 신뢰를 구
축하는 스킨쉽 프로젝트 추진
- 주요 프로그램 : ‘공공외교Talk’, 한국 전통‧현대문화 체험, K-pop 및 드라마 제작 현장 방문, 스토리텔링 강연
청취, 지방도시 방문 등으로 구성
금번에 서명된 영사협정의 우리 국민들에 대한 효과
금번 서명된 한‧중 영사협정은 양자 영사협정으로는 우리의 미국(‘63년) 및 러시아(’92년)와의 협정에 이은 3번째 영
사협정에 해당하며, 협상 개시 12년만에 서명된 것임.
동 협정은 중국내 우리 국민의 권익 및 인권 보호를 강화하는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됨.
- 중국내 우리 국민 체포·구금 등 신체의 자유 제한시 4일 이내에 영사통보 및 신청 4일 이내에 영사접견 허가, 사
형 선고 및 집행일 사전 통보 등을 통해 중국내 체류하는 우리 국민의 권익 및 인권 보호 강화 예상
한‧중 해양경계 획정 협상 경과
두 정상은 금번 정상회담을 통해 2015년에 해양경계획정 협상을 가동하기로 합의하였음.
양국은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4차례 해양경계획정 협상을 가져왔으나, 2009년 중국내부 조직개편 등으로 협상이
잠정 중단된 상태였는 바, 금번 정상회담을 통해 약 7년만에 협상을 재개시키게 되는 것임.
한‧중 FTA 관련 협의
양측은 높은 수준의 포괄적인 한‧중 FTA를 통해 양국간 호혜협력의 제도적 틀을 공고히 하고 향후 역내 지역 경제통
합을 촉진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이를 위해 연내타결을 목표로 협상을 진전시켜 나가기로 하였음.
※ 양국간 교역액은 ‘92년 64억불에서 ’13년 2,288억불로 36배 증대(중국은 우리의 제1위 교역대상국, 우리는 중국
의 제3위 교역대상국)
※ 한국의대중투자(신고기준,억불) : (’11)47.7→(‘12)65.3→(’13)48.0→(’14.1Q)8.1
- 대중국 투자액은 ‘13년 누계로 616억불 기록, 미국 다음으로 2위
※ 중국의대한투자(신고기준,억불) : (’11)7.3→(‘12)7.3→(’13)4.8→(’14.1Q)2.3
- 6.28일 기준 중국의 대한투자 : (’13년) 1.6억불 → (‘14년) 7.8억불 (394% 증가)
※ 최근 중국의 대한투자 사례 : 그린랜드(3억불, 제주리조트 개발), CJ게임스(5억불, 게임개발 투자), 위해쯔광생
물과기개발(5백만불, 건강보조식품) 등
한‧중 원-위안화 직거래 시장 개설 등 양국간 금융인프라 구축
박 대통령과 시 주석은 확대정상회담에 이어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진행된 협정 서명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동 서
명식에서는 양 정상의 임석하에 정부간 협정 2건과 양국 유관 기관간 양해각서 10건이 서명되었습니다.
※ 협정(2건) : ①한․중 영사협정, ②한․중 영화공동제작협정
MOU(10건): ①창조 및 지속가능한 경제 발전 촉진 양해각서 ②위안화 금융서비스 협력제고 양해각서 ③방송 및
디지털 콘텐츠 협력 양해각서 ④한·중 외교부간 2014-15년 교류협력계획 ⑤한․중 세관당국간 전략적 협력 약정 ⑥산
업협력 양해각서 ⑦지역통상 활성화 협력 양해각서 ⑧환경협력 양해각서 ⑨야생생물 및 자연환경 보전협력 양해각
서 ⑩초대형 에코쉽 프로젝트 금융계약
공동 기자회견에 이어 박 대통령은 시 주석 내외를 위하여 영빈관에서 국빈만찬을 주최할 예정이며, 중국측에서는
시 주석 내외 외에 공식 및 실무수행원 등 약 40명이 참석하고, 우리측에서는 정부 관계자 외에 정계‧경제계‧학계‧
문화계‧체육계* 인사 등 50여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 정 계 :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 의장, 우윤근 새정치
민주연합 정책위 의장, 유기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경환 새누리당 국회의원(경제부총리 내정자), 윤상현
새누리당 사무총장
경제계 : 허창수 전경련 회장,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한덕수 무역협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이재용 삼
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김창근 SK 이노베이션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권오준 POSCO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황창규 KT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학계‧문화‧체육계 : 오연천 서울대학교 총장, 지아 Miss A 소속 가수, 페이 Miss A 소속 가수, 이창호 바둑기사 등
특히, 만찬 중에는 펑리위안 여사의 대표곡인 “희망의 들판에 서서(在希望的田野上)**”를 CBS 소년소녀합창단이 합
창하는 등 양국 민요 연주, 무용, 합창 등이 이어질 예정임.
** “희망의 들판에 서서”는 중국 민족의 아름다운 미래가 농민들의 노력을 통해 들판을 아름답게 일궈 나가는 데 있
다는 것이 주 내용이며, 펑리위안 여사는 1982년 CCTV 설특집 프로그램에 출연, 이 노래를 부른 것을 계기로 국민가
수로 거듭난 것으로 알려짐.
[포커스] 대통령, 핵안보정상회의 계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개최 |
- 한·중 관계, 한반도 정세, 지역 및 국제정세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 |
청와대뉴스, 2014-03-24 오후 11:03:32 |
박근혜 대통령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핵안보정상회의 참석 계기에 23일 「시진핑」(Xi Jinping, 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양자 회담을 갖고, 한·중 관계, 한반도 정세, 지역 및 국제정세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작년 양자와 다자회의에서 여러 차례 회동하며 좋은 성과를 내었으며 또한, 합의된 사항들이 순조롭게 이행되어 기쁘다고 하면서 전략적 의사소통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등 상호 신뢰가 깊어지고 여러 면에서 전략적 협력동반자로 발전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며칠 후 인천공항에서 중국군 유해 인계식이 진행될 예정으로, 이를 박 대통령께서 직접 지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중국측도 박 대통령이 제기하신 안중근 의사 관련 기념관을 건설했으며, 시안시 광복군 표지석 작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면서 이는 양국 국민간 유대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시진핑 주석과 네 번째 만나게 된 것은 한·중 양국이 진정한 전략적 협력동반자로 거듭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많은 중국인 승객이 탑승한 말레이시아 여객기의 소재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어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탐색 작업이 하루 속히 성과를 거둬서 실종자 가족들의 걱정을 덜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금년도 중국의 ‘양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을 축하한다면서 시 주석의 ‘개혁의 전면적 심화’ 정책과 우리 정부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잘 추진해 나가면서 양국이 협력의 시너지 효과를 확대해 나간다면 ‘한국의 꿈’과 ‘중국의 꿈’이 합하여, ‘동아시아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작년 ①국빈방중(6.27-30) ②G20 정상회의(9.5, 상트페테르부르크), ③APEC 정상회의(10.7, 발리) 계기에 3차례 회담 또는 환담
시 주석은 말레이시아 항공사 여객기 탑승 가족에 대한 위로의 뜻 표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하면서 모든 힘을 투입하여 수색하고 있으며 1%의 희망이 있더라도 100%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방중 후속조치 일환으로 작년 12월 중국이 기증한 따오기 부부가 이번 달에 산란에 성공했다면서 이는 양국관계가 하나하나 결실을 맺는 상징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양국간 전략적 소통 강화를 위해 신설키로 한 여러 전략대화 채널 구축이 순조롭게 진전되고 있다고 하고 작년 9월 한·중 FTA 1단계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데 이어 현재 진행중인 2단계 협상도 원만히 진행되어서 금년중 한·중 FTA가 타결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올해에도 양국관계 발전의 모멘텀을 계속 이어가기를 바라고, 시 주석의 금년 방한이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 주석은 중·한 양국은 공동 발전을 목표로 공동의 아름다운 꿈을 위해 가일층 노력을 강화해 나가자고 하면서, 박 대통령의 여러 차례 방한 초청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금년 양측이 편리한 시기에 조속히 방한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시 주석은 작년 양국간 교역액이 2,742억불로 사상 최고치에 달하였다고 하고 양국간 FTA 협상이 관건적 단계에 들어섰는데 수준 높고 이익의 균형을 이루는 FTA를 조속 체결하는 것이 양국의 이익에 부합하므로 협상 과정을 가속화하여 조속히 결실을 맺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금년 11월 APEC을 계기로 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 등 여러 다자회의 계기에서 회동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시 주석은 양국간 국민 교류가 지난해 822만명에 달했으며, 앞으로 인천아시안게임 계기에 더 많은 중국 관광객이 방한할 것이라고 하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면서 그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양 정상은 북핵 불용 및 북한 비핵화에 대한 양국 공동인식을 재확인하고, 양국 정부가 최근 한반도 문제에 관한 전략적 소통을 강화해오고 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및 북한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소통과 협력을 앞으로 더욱 강화해 나가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핵개발과 경제 건설의 병진정책은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북한에 대해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반드시 비핵화에 실질적 진전이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그간 6자회담 수석대표 간의 북핵 해결 논의에 진전이 많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있고 북한 핵능력 고도화 차단의 보장이 있다면 대화 재개 관련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위해 한·중·미 수석대표간 등의 관련 노력을 하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시 주석은 한국측 입장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중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확실히 반대하며, 안보리 결의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어 중·북 양국간에는 핵 문제에 관해 이견이 있으나, 현재 중국측 방식으로 북한을 설득 노력중이라고 하고 북한을 국제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유도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조만간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할 예정임을 설명하고 통일된 한반도는 핵없는 한반도로서 평화의 상징이 되고 동북아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함으로써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시 주석은 한국측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적극 지지하며, 남북한간 화해와 평화를 이루고, 나아가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기를 확고히 지지한다고 했습니다. <청와대뉴스>
한·중 정상 임석하 합의서 서명식 개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은 27일 정상회담 후 인민대회당 하북청에서 정부간 협정 1건 및 기관간 약정 7건 등 총 8건의 합의서 서명식에 임석했습니다. 8건의 합의서가 서명되는 것은 역대 우리 정상의 방중 계기 정상 임석하에 서명된 합의서중 최다로서, 한·중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내실화가 다방면에서 추진되고 있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 과거 방중시에는 3~4건 체결 (92년 및 98년에 각각 4건 서명)
금일 양국 정상간 임석하에 서명될 합의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업 편익 제고 및 수주 지원)
「수출입 안전관리 우수공인업체(AEO)* 상호인정약정」: 우수공인업체로 인정된 양측 기업에 대한 수입서류 심사 간소화․신속통관․세관연락관 지정․비상시 우대조치 등 혜택 제공
* Authorized Economic Operator : 세관당국에서 수출입․물류업체의 법규준수, 안전관리 현황 등을 심사하여 인증한 업체
- 우리나라는 ‘09년 AEO 제도 도입/ 2013.6 현재 총458개 업체가 공인 획득
「수출입은행 간 상호 리스크참여 약정」 : 양국 기업의 제3국 공동 진출 시 금융 지원, 창구 단일화 및 투자리스크 분담 등
(환경 분야 협력)
「따오기 보호-협력에 관한 MOU」 : 따오기 보존․번식․서식환경 등에 관한 정보 공유 및 공동연구, 중국의 한국에 대한 따오기 2마리 기증 등
(미래 성장동력 확충 협력)
「해양과학기술협력에 관한 MOU」 개정 : 협력의 범위를 기존의 해양환경·생태, 해양광물자원, 극지정책 분야 협력에서 해양예보시스템․해양에너지․해양수자원․해양생물자원․해양 및 연안공학․해양 경제 분야 등으로 확대
「에너지절약 분야 협력 강화에 관한 MOU」: 에너지 절약 및 에너지효율화를 위한 양국 정부 간․유관 기업 간․학계 간 관련 제도 및 사업에 대한 정보 교환 및 공동 연구
「경제통상협력 수준 제고에 관한 MOU」 : 양국 간 정례 통상협의채널 구축, 우리기업의 중국 서부대개발 사업 및 신도시 개발사업 참여, 양국 기업의 상호 투자 확대 등
「응용기술 연구개발 및 산업화 협력 강화에 관한 MOU」 : 산업기술의 공동 연구․개발, 심포지엄, 간담회, 교류회 등 개최
(인적 교류 확대 촉진)
「한·중 외교관여권 소지자 사증면제협정」 : 외교관여권을 소지한 양국 국민이 상대국 영역에 사증 없이 입국, 출국, 경유 및 최대 30일간 체류 가능
상기 합의서들은 양국 기업들이 한국 및 중국 시장은 물론 제3국 시장에서 비즈니스를 발전시키는데 보다 좋은 환경을 만들고 양국 경제의 동반 성장을 위한 미래 성장 동력을 강화하며 생물다양성 보호분야에서의 협력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상호 사증면제 범위를 확대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8일 오후 시진핑 주석이 조어대 양원재에서 주최하는 특별 오찬에 참석합니다. 동 일정은 30여분간의 면담에 이어 1시간가량의 오찬 형식으로 진행되며, 시진핑 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도 참석합니다. 펑 여사 외에 중국 측에서는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 및 왕이 외교부장이 참석하며, 우리 측에서는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이 참석합니다.
동 오찬은 시 주석의 박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우의와 신뢰를 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인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정상간 가벼운 친교의 대화로 시작했습니다. 또한, 어제 개최된 정상회담 결과를 평가하고, 한반도 미래와 동북아 정세, 그리고 양자 현안에 대해 추가 논의를 했습니다.
중국 측이 국빈방문 행사에 추가적으로 특별 행사를 제안하는 것은 파격적이고 매우 드문 일로서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 사례에 해당합니다. 어제 공식 일정에 이어 금일 오찬을 더하게 되면 두 정상은 7시간 가까이를 함께 하며 우의와 신뢰를 다지게 됩니다.
▲ 28일 조어대 오찬에 참석하는 박근혜 대통령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펑리위안부인이 함께 만나고 있다.. ⓒ 청와대
한·중 정상회담에 오른
신라인 최치원(崔致遠)
12세에 당나라 유학 장원급제 벼슬
시주석, “장풍(長風)이 만리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간 정상회담에 신라인으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 ‘범해’(泛海)가 올랐다. 신동과 천재로 불린 것으로 전해오는 최치원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오늘의 중국 최고 지도자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만나 양국간 우호를 위해 그의 시를 읊었을까.
한·중 정상회담의 ‘오랜친구’ 화답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박대통령을 ‘오랜친구’(老朋友)라고 말하고 중국몽(中國夢)과 박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가 상통한다고 동의했다. 박대통령은 마음의 믿음을 안고 달려간다는 ‘심신지여’(心身之旅)라고 화답했다.
또한 시주석의 ‘오랜친구’에 화답하듯 한국
기업인들과 포럼에서 ‘선주붕우’(先做朋友), ‘후주생의’(後做生意)라는 말로 “먼저 친구를 만든 후에 비즈니스 하라”고 당부
했다.
이번 박대통령의 국빈 방문에 중국측이 각별하고
특별하게 예우한 배경에는 1,000년이 넘는 역사적 관계가 깊다는 사실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믿어진다. 바로 시진핑 주석이 인용한 고운 최치원의
귀국시가 이를 말해준다고 믿는다.
‘괘석부창해’(掛席浮滄海)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장풍만리통’(長風萬里通) -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구나.
시 주석이 최치원의 시를 읊은 것은 곧 한·중 수교
20주년을 넘긴후 앞으로 20년을 넘어 통일 한반도까지 만리길을 ‘노붕우’(老朋友) 사이로 동행하자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이번 양국 정상회담을 계기로 종전까지 정치외교가 냉랭했던 ‘정냉’(政冷)에서 ‘정열’(政熱)로 바뀌고 있지
않는가.
허유 관장의 최치원 발자취 기행
한국 고서(古書) 연구지 24호에 한국비림박물관 허유(許由) 관장의 ‘중국에서 만난 고운 최치원’ 기행문이 소개된 바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한 시안(西安)에 유학했던 최치원의 발자취를 시찰한 소감문이다.
당나라 시절 시안은 장안(長安)으로 불리는 인구
100만명의 대도시로 동서문물의 중심지 역할을 맡아 신라인을 비롯한 각국의 유학생과 상인들로 붐볐다.
고운 최치원은 겨우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6년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사직하고 유람하며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기고 29세에 귀국하여 전국을 유람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임종했다. 그러나
그의 천재적 시문이 중국에 있는 고운 최치원 기념관 등에 많이 남아있지만 국내에는 대전에 있는 뿌리공원의 경주최씨 시조비에 그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그동안
역사공부에 소홀한
우리네도 고운 최치원을 거의 잊고 지내다가 이번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 시진핑 주석에 의해 새삼 최치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된 셈이다.
12세 조기유학 ‘신라 신동’ 소문
허유 선생 기행문에 따르면 고운 최치원은 겨우
12세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6년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정부 벼슬을 얻고 황소(黃巢)의 반란때 격서(檄書)로 그를 무릎 꿇였으니 그의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수 있다.
당초 고운은 서기 857년, 신라 헌앙왕때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나 벼슬길이 아찬(阿)급까지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그의 부친이 당나라로 유학 보내면서 “10년만에 급제(及第)하지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훈계했다.
당시 당나라에는 각국 유학생이 몰려 들었으며 신라
유학생들만 800여명에 달했다. 최치원은 12세에 조기유학하여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14세 이상으로 제한하여 입학할수 없어 장안(長安)의
명사인 위(偉) 승상댁에서 심부름하면서 공부했다. 어느날
최치원이 바둑과 글솜씨를 보이자 승상이 시(詩)를 써 보라고 했다.
‘창외삼경우’(窓外三更雨) - 창밖은 한밤중
비만 내리는데,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 -등잔 앞의 내마음은 고국을 달려가네.
고운이 단번에 이같은 ‘추야우중’(秋夜雨中)을
써보이자 승상이 “앞으로 다른일 말고 글공부만 하라”고 당부하여 마음놓고 시작에 몰두할수 있었다.
유학 6년만에 장원급제 벼슬길
최치원은 부친이 당 유학 10년내로 급제하지 못하면
내자식이 아니라고 독려한 말씀을 한시도 잊지 않고 공부했다.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 매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밤낮 책읽고
시문을 창작했다.
승상의 외동딸 숙향(叔香)과도 시담(詩談)으로
대화했다. 사춘기를 지날 무렵 두 남녀간 연정이 용솟음 쳤음도 짐작할수 있다. 이무렵부터 고운이 신동(神童)이란 소문이 당나라 황실에게
전해졌다. 당 의종(懿宗)이 승상에게 신라 신동을 만나 보자고 했다.
황제가 고운에게 “이 석함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맞춰 보라”고 명했다. 고운이 즉각 고개숙여 응답했다.
‘단단석중물’(團團石中物)
- 단단한 돌함 속 물건은
‘비옥역비금’(非玉亦非金)
- 옥도 아니고 금도 아니고
‘야야지시조’(夜夜知時鳥)
- 밤마다 때를 알리는 새이나
‘함정미토음’(含情未吐音)
- 뜻만 품었지 아직 소리는
못낸다.
계란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황제가 신라 신동이 기특하다고 칭찬했음은 물론이다. 이로부터 최치원의 명성이 장안으로 퍼져 틈틈이 시를 쓰며 명문들과 폭넓게 교우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황제에게 건의하여 선주(宣州)의 율수현위라는 현감의 보좌역 벼슬을 받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무렵 고운이 남긴 명시가 봄을 찬미하는
장안춘(長安春)과 먼 타국에서의 나그네 심정을 그린 ‘도중작’(途中作)으로 남아있다.
이보다 앞서 최치원은 당 유학 6년만인 18세때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빈공과(賓貢科)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했다. 당 의종이 물러나고 희종이 등극했던 첫해에 예부시장 배찬(裵纘)이 주관한
과거시험에 장원했으니 부친이 엄명한 10년만의 합격을 6년만에 달성한 것이다.
고운이 장원급제 했지만 주변의 시샘 때문에 관직을
제수받지 못해 낙양(洛陽) 천지를 유랑하며 다니다가 지방정부 관청인 율수현위 보직을 받았다. 현위직은 현감 보좌직으로 민정을 살피는 직무였기에
고운으로서는 공부하고 글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시기에 열심히 쓴 작품들로 문집 5권을 남길수 있었다.
쌍녀분의 원혼을 풀어준 詩談
최치원이 당나라 벼슬로 사방을 시찰하면서 ‘쌍녀분’(女墳) 이야기를 남겨 지금도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에게 그의 발자취를 들려준다. 양자강 남쪽 고순현(高淳縣)에 접어들어 넓은 들녘을 ‘치원교’(致遠橋)로 건너가면 1,000년 넘게 보존된 ‘쌍녀분’이 나온다.
잡초 우거진 농토 한가운데 있는 쌍녀분 속의 영혼의
원한을 신라인 고운 최치원이 풀어줬다는 사연을 이 고장 사람들이 두루 증언한다.
한(恨)을 품고 죽은 16세, 18세 장(張)씨
자매의 영혼이 최치원에게 꿈속에서 말했다.
아비가 큰딸을 늙은 소금장수, 작은 딸은
차장수에게 시집 보냈다. 자매는 매년 아비에게 남편감을 바꿔 달라고 애원했지만 결코 들어주지 않았다. 이어 울적한 마음의 한을 풀기 어려워
요절했다는 사연이다.
고운이 율수현 현위로 지방 시찰중 역관(驛館)에서
유숙하다가 꿈에 장씨 자매를 만나 시담(詩談)으로 주고 받았다.
고운이 “어느집 두여인이 버려진 무덤에 깃들어 쓸쓸한 지하에서
몇차례나 봄을 원망했나요”라고 했다. 두여인이 “너무나 좋은 글 감사한다”면서 붉은 주머니를 놓고 갔다. 주머니 속에 애틋한 사랑이 실려
있었다.
“살아
있을때는 나그네를 몹시 부끄러워 했는데 오늘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교태를 뿜도다.”
“그대의 기상은 오산처럼 빼어나서 함께 오묘한
이치를 말 할만 하여이다.”
신라인 고운에게 띄운 고혼의 연정임은 물론이다.
이에 고운이 다시 화답했다.
‘부세영화몽중몽’(浮世榮華夢中夢)
- 뜬구름같은 이세상 영화는 꿈속의 꿈, ‘백운심처호안신’(白雲深處好安身) - 흰구름 자욱한 곳에서 한몸 편안히 지내는 것도
좋으리.
황소의 반란을 진압한 고운의 격서
고운은 2년여만에 당나라 벼슬을 사직하고 교우하던
이위(李尉)집 문객으로 기거하다 절강성 서북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고병(高騈) 장군을 만났다. 고병장군은 진해 절도사(節度使)로 황소(黃巢)의
반란을 진압할 책무를 지고 있으면서 고운을 ‘관역순관’(館驛巡官)으로 임명, 보좌를 요청했다.
황소라는 인물은 과거에 낙방하여 소금 밀매업을
하다가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으로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제(大齊)라고 선포했다. 당나라 말기 당쟁이 심하고 환관들의 횡포가 극에 달해 민심이 이반되었었다. 황소의 난으로 당
희종은 사천쪽으로 도피하여 고병장군이 이를 토벌하러 나섰다.
이때 고운 최치원이 작성한 ‘격황소서’(檄黃巢書)가
그의 무릎을 꿇게 했다는 이야기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신라인 최치원의 기록은 지금도 모택동의 고향인
양주시 ‘최치원 기념관’에 그의 시집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 성루 2층 건물에 일대기와 계원필경 사본
등에 명시 60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 율수현 박물관과 고순현 박물관에도 그의 동상과 흉상 및 작품이
남아있다고 한다.
반면에 국내에는 경주최씨 족보와 대전 뿌리공원의
시조비 정도가 고작이라고 하니 역사문화 보존과 계승에 너무나 무심하지 않느냐는 반성이 나온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 시진핑 주석이
고운 최치원의 귀국시를 인용하여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한다’고 했으니 한·중간 무한우의를 위해 중국속의
한국역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서울시 중구 퇴계로189(필동1가) 동화빌딩 508 (우 100-866) | 대표전화 : 02)2264-4750~3 | 팩스 :
02)2264-4754 |
신라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나 고려의 재상까지 오른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고려 6대 왕 성종의 즉위와 함께 그의 신임을 받아 유교적 통치 이념에 따른 제도 정비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최승로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그가 쓴 시무 28조일 것이다. 고려는 광종 대에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였지만, 그것은 힘에 의한 일시적인 안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최승로가 활약했던 성종 대는 왕권과 신권의 화해가 필요한 시기였고 그 소임을 맡은 인물이 최승로였다. 시무 28조는 유교적 통치 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으로 최승로의 등장 이후 고려사회는 본격적인 문치(文治)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음보살의 은혜로 태어나다
최승로는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였던 바로 그 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최은함(崔殷含)으로 [삼국유사]에 출생 일화가 전하고 있다.
당나라의 신통한 화공이 신라에 와서 경주 중생사(衆生寺)에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 신라사람들이 모두 이를 우러러 공경하고 기도하여 복을 얻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신라 말에 최은함이 결혼한 지 오래도록 아들이 없자 이 절에서 기도하고 아들을 얻었다. 석 달이 채 못되어 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습격하여 왕이 죽고 수도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백제군의 공격을 피해 은함이 아들을 안고 중생사로 와서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백제군이 갑자기 쳐들어와 저희 부자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어린 자식과 함께 도망을 치면 둘 다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진실로 부처께서 아기를 저에게 준 것이라면 대자대비의 힘으로 우리 부자를 훗날 다시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은함이 울면서 세 번을 반복하여 기도하고 나서관음상 뒤에 아기를 감추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15일이 지나고 백제군이 물러간 뒤에 다시 중생사를 찾아오니 아기가 마치 금방 목욕한 듯 깨끗하고 젖 냄새도 났다. 부처님께 감사하며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기르니, 점점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달랐다. 이 사람이 승로이니, 그의 아비 은함은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대성(大姓)이 되었다.
[삼국유사], 삼소관음 중생사, 三所觀音 衆生寺에서
최은함이 관음보살전에 기도한 후 대성인 최승로를 얻다.최승로의 탄생을 기록한 삼국유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sv_003r_0020_0120_0020)
최승로의 나이 10세 되던 해에 경순왕은 신라의 천 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최승로는 이처럼 급변하는 시대에 태어나고 자랐다. 신라가 망하자 서라벌 사람들은 경순왕을 따라 새 서울 송도로 떠나갔다. 이때 어린 승로도 아버지를 따라 송도인으로 생활하였다.
최승로는 어릴 때부터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은 천재였다. 최승로가 태조 왕건을 만나 논어를 줄줄 외는 총명함을 보였을 때 그의 나이 불과 12살이었다. 최승로의 천재성에 감탄한 태조는 상을 내리고 그를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元鳳省)의 학생으로 보내어 영재교육을 받도록 했다. 어린 시절부터 태조를 비롯한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란 최승로였으므로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하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그는 어린 시절에 만난 태조를 필두로 혜종∙정종∙광종∙경종을 거쳐 6대 성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을 섬기게 된다.
국내파가 유학파를 이기다
유학파 출신을 우대하기는 고려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통일신라 때부터 신라 6두품을 비롯한 지식인들 사이에선 중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특히 고려의 광종은 중국의 정치 문화를 배우고자 했고, 이런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유학파를 우대하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최승로는 유학 한번 안 간 순수한 국내파로서 높은 지적 수준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그가 ‘시무 28조’를 통해 맹목적으로 중국풍을 좋아한 광종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학문적 자존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화려한 소년 시절을 보낸 것과 달리 청년 시절의 최승로는 주로 학문과 연관된 업무에만 종사할 뿐 특별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광종 대는 최승로의 나이 20대 초에서 40대 말에 해당하는 시기로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기였다. 당시 왕이었던 광종은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에, 신라 6두품 가문 출신인 최승로가 중앙의 요직에 등용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쌍기의 등장으로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낸 세월만도 20년이 넘었다. 어쩌면 숙청의 회오리에서 생명을 온전히 부지한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최승로가 쌍기의 등용을 광종의 최대 실정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그러한 상황에 대한 불만표출이었다.
당시 중국계 귀화인인 쌍기는 광종의 총애를 받아 한림학사에 천거되고 곧바로 문병(文柄)을 맡았다. 국내파인 최승로의 입장에서 외국인 쌍기가 문병을 맡았다는 사실은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학문적 능력으로 따지면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최승로였지만, 쌍기의 등장 이후 재능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다. 더구나 광종 대에 여덟 번이나 시행된 과거시험에서 한 번도 시험관인 지공거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심을 짓밟고도 남았다.
최승로는 과거 출신자들이 신진 관료로 등장하게 되는 광종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유교적 소양을 가진 인물들이 정계에 포진하게 되면서 그의 학문적 역량과 식견이 크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경종의 짧은 치세가 끝나고 성종이 즉위하자마자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이라는 행정의 요직을 차지하며 지위가 급부상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절치부심하며 정치적 위상을 다지고 있었는가 짐작하게 한다.
신라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긴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이 잠든 경순왕릉(사적 244호).
최승로는 망국 신라의 백성으로 태어나,신라를 대신한 새 왕조 고려를 유교적인 문치
국가로 이끌었다.
유교사회 건설의 지침서 : 시무 28조
981년 즉위와 동시에 유교 사회 건설을 표방한 성종은 이듬해 정5품 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시무와 관련한 상소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 종2품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으로 있던 최승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5대 왕에 대한 평가와 함께 장장 28조에 달하는 장문의 시무책을 올렸다. 시무책은 정사에 대한 대책을 제의한 글로써 과거 시험의 하나였을 만큼 관료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소양이었다. 고려에는 시기별로 시무책이 많았음에도 [고려사]를 비롯해 [고려사절요]∙[동문선] 등에 유독 시무 28조만 전문을 수록한 것은 그의 시무책이 고려 정치사에 큰 영향을 끼쳤던 동시에 명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시무책을 올린 982년 당시 최승로의 나이는 56세로 학문으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그 원숙함과 식견이 최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이때부터 최승로는 젊은 성종을 보좌하는 노련한 정치보좌관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꽃피웠다. 물론 그의 성공은 성종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승로의 유교적 정치이념이 성종 대에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광종이 이미 그 길을 터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광종대 시행한 과거제의 영향으로 유교적 문풍이 유행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호족이라는 강력한 방해물을 제거했기 때문에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상소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5대조의 치적을 평가하면서 상서문을 올린 배경에 대한 설명이고 뒷부분은 28조에 달하는 시무책으로 채워져 있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록 귀하게 군주가 되었지만,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고 재산을 많이 가졌지만 교만하고 자랑하지 않는다면 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재앙은 기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할 것이니, 성군께서 어찌 만 년이나 살지 않으며 왕업이 어찌 백세만 전할 것인가?”
시무 28조 중 22조
1. 국방비를 절감해야 한다.
2. 불교의 폐단을 줄여야 한다.
3. 시위 군졸을 줄여야 한다.
4. 상벌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
5. 사신을 보낼 때 장사꾼을 따라 붙이지 말아야 한다.
6. 스님들의 고리 빚을 금지해야 한다.
7. 지방 토호들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8. 승려들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9. 관복을 제정해야 한다.
10. 중이
관(館)이나 역(驛)에 유숙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11. 중국의 제도를 무조건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12. 공역(貢役)을 공평하게 해야 한다.
13. 연등과 팔관회에서 사람 동원과 노역을 줄여야 한다.
14. 군주는 덕을 베풀고 사심이 없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15. 궁중의 비용을 줄여야 한다.
16. 백성을 동원하여 절을 짓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17. 부호들을 견제해야 한다.
18. 불경과 불상을 사치스럽게 만드는 것을 금해야 한다.
19. 개국공신의 후손을 등용해야 한다.
20.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일으켜야
한다.
21.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
22. 신분 차별을 엄격히 해야 한다.
최승로의 28조 항에 달하는 시무책은 아쉽게도 22조만이 고려시대 정사(正史)인 [고려사] ‘최승로 전’에 수록되어 있다. 최승로는 시무책을 통해 성종에게 서슴지 않고 일의 잘되고 못됨을 지적했다. 규탄할 것은 규탄하고 시정할 것은 낱낱이 지적하여 나라를 위한 높고 깊은 뜻을 시무 28조에 펴보였다.
최승로는 시무책을 올린 직후 어린 성종의 정치보좌관으로 왕의 은총을 받기 시작했다. 983년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된 최승로는 성종의 유교 정치이념을 제도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성종 대 12목의 설치와 3성 6부제를 바탕으로 한 중앙관제의 정비는 모두 최승로의 발상이었다. 또한 그의 건의대로 팔관회와 연등회가 폐지되는 등 고려사회는 한층 더 유교 사회로 향하게 되었다. 관음보살의 보살핌으로 목숨을 건진 최승로였지만,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사회는 유교 사회였다.
최승로의 공로로 고려는 안정된 국가의 틀을 갖게 된다
자신의 정견이 하나하나 실현되어 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최승로는 988년(성종 7년)에 종1품 문하수시중에 올랐으며, 청하후에 봉작되어 식읍 7백 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최승로는 이미 환갑을 넘긴 노쇠한 몸이었다. 여러 차례 사직을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성종을 보필해야 했다. 성종은 개혁의 선봉에 서 있던 최승로를 잠시도 떠나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듬해 989년(성종 8년) 최승로는 더는 연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최승로의 부음이 전해지자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태사 벼슬을 추증했다. 또한 베 1천 필∙밀가루 3백 석∙쌀 5백 석∙유향 100냥 등을 하사하여 장례비로 쓰도록 했다.
자신의 말년을 온통 고려사회를 정비하는데 바친 개혁가 최승로는 치밀한 개혁안을 바탕으로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면서도, 결코 귀족세력을 무시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오히려 귀족사회의 안정을 바란 그였지만, 그렇다고 서민들의 삶도 무시하지 않았다. 성종 대에 고려가 안정된 국가의 기틀을 갖추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최승로의 공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승로는 죽기 전 자신의 웅지를 펼칠기회를 준 성종을 생각하며 이렇게 찬양했다.
다행히도 천 년 만에 지존을 만나
재주 없이 직책을 더럽히며 서원(西垣)에
있네
문장이야 감히 같이 있는 현사들을
바라보랴만
임금의 깊은 총애 모름지기 자랑하여 후세에
보여주리
크나큰 감명으로 눈물만 흘리고
뛸 듯한 기쁨에는 오히려 말이 없네
보답할 방법 생각하나 끝내 얻지 못하니
오직 남산 갈 길 빌면서 성은에 절할 뿐
성종 대에 쌓은 최승로의 명성은 제7대 목종까지 이어진다. 목종은 최승로를 성종의 묘에 합사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으며, 덕종은 대광∙내사령이란 벼슬을 추증하였다.
최승로의 아들과 손자, 대를 이어 고려 왕조를 섬기다
최승로에게는 아들 최숙이 있었으며 최숙에게는 아들
최제안이 있었다. 최승로의 손자 최제안도 조부 못지않은 학자로 현종·덕종·정종·문종 등 4대 왕들을 섬기며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에 이르렀다.
일찍이 그는 왕가도∙황주량과 더불어 [태조실록]을 비롯한 7대 실록을 편찬하는 역사편수관이 되었다. 거란 침입으로 [태조실록] 등이 소실된 터라
최제안은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얻으려고 지방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미 1024년(현종 15년)에 세상을 떠난 최항의 집에서 병화로 분실되었던
태조의 ‘훈요십조’를 발견했다. 최항은 최언위의 손자로 현종을 옹립하였으며,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한 인물이다. ‘훈요십조’는
최제안의 공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최제안이 죽자 문종은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정지하며 그를 추도했다.
- 글
-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 저자의 책 보러가기 인물정보 더보기
- 그림
-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 이미지
- 연합뉴스
- 이미지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숙
[ 崔肅 ]
이칭별칭 | 시호 인효(仁孝), 충의(忠懿) |
---|---|
유형 | 인물 |
시대 | 고려 |
출생 - 사망 | 미상 ~ 미상 |
성격 | 관인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관직(경력) | 문하시중 |
정의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관인.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대광 내사령(大匡內史令) 승로(承老)의 아들이며,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제안(齊顔)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관직은 문하시중에까지 이르렀다. 1027년(현종 18) 목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033년(덕종 2)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원래 인효(仁孝)였으나, 1085년(선종 2)에 문종의 시호를 피하여 충의(忠懿)로 고쳤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제안
[ 崔齊顔 ]
이칭별칭 | 시호 순공(順恭) |
---|---|
유형 | 인물 |
시대 | 고려 |
출생 - 사망 | 미상 ~ 1046년(문종 즉위년)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관직(경력) |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
정의
?∼1046(문종 즉위년). 고려 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지낸 승로(承老)의 손자로, 숙(肅)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020년(현종 11) 천령절(千齡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거란에 다녀와서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가 되고, 1030년에 중추사(中樞使)을 거쳐 1034년(덕종 3) 호부상서가 되었다.
이 해 정종이 즉위하자 이부상서가 되었으며, 1036년 상서좌복야 중추사(尙書左僕射中樞使)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참지정사를 겸하였다. 1043년(정종 9)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호부사(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判尙書戶部事)에 임명되고, 뒤에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가 병화로 망실되었는데, 최항(崔沆)의 집 서고에서 훈요를 발견하여 바침으로써 후세에 전하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순공(順恭)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주 ^^ 득성시조 최소벌도리공 님 ^^ 기^념^비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0) | 2016.03.23 |
---|---|
^^ 고운 최치원 선생 기념관 건립공사 현황 ^^ 최씨세계분파도등..... (0) | 2016.03.23 |
진주소씨의 명예훼손죄,모욕죄-민,형사 엄벌척결 종친회 결의서 (0) | 2016.03.23 |
慶州崔氏 守門下侍中 淸河侯 太師 文貞公 (諱)承老님 약전 (0) | 2016.03.23 |
慶州崔氏의由來. 慶州崔氏始祖 文昌侯 孤雲 (諱)致遠님 약전 << 通政公商哲派家乘譜 >> (0) | 2016.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