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聖地 巡禮)
고운 최치원 기념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550(독정로 성지1길34)<하독정>
전화 (031) 573-5274 / 팩스 (031) 573-5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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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 崔致遠 記念館 造監圖
2013년 11월 8일 촬영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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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 崔 致 遠 先生 "詩"
泛海 범해 "바다에 배를 띄우다"
<<掛席浮滄海 괘석부창해>> '돛을 달아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長風萬里通 장풍만리통>> '긴 바람 받아 고국『新羅』을 통하네'
<<乘槎思漢使 승사사한사>> '뗏목 타고 다녔던 '한나라' 사신이 떠오르고'
<<採藥憶秦童 채약억진동>> '불사약 찾아왔다던 '진나라' 동자가 생각 나네'
<<日月無何外 일월무하외>> '해와 달은 머나먼 허공 밖에 있고'
<<乾坤太極中 건곤태극중>> '하늘과 땅은 태극중에 있구나'
<<蓬萊看咫尺 봉래간지척>> '봉래산이 지척간 눈 앞에 보이니'
<<吾且訪仙翁 오차방선옹>> '나 이제 바야흐로 신선을 찾으리라'
社團法人 孤雲國際交流事業會
慶州崔氏 中央 宗親會
慶州崔氏 觀稼亭公 (諱)淸派 大宗會
최/씨/세/계/분/파/도(崔/氏/世/系/分/派/圖) |
득성조(得姓祖)소벌도리(蘇伐都利)님-<2세손>대벌이(大伐利)님-<3세손>소벌이(小伐利)님-<4세손>대평(大平)님-<5세손>호빈(昊彬)님-<6세손>광윤(桄允)님-<7세손>장남(長男)조(厝)님-<8세손>서(屖)님-<9세손>공(?)님-<10세손>국(局)님-<11세손>장남(長男)무(茂)님-<12세손>비(岯)님-<13세손>개(玠)님-<14세손>창(敞)님-<15세손>은의(殷義)님-<16세손>서봉(瑞鳳)님-<17세손>혜양(惠陽)님-<18세손>태임(太任)님-<19세손>동웅(東雄)님-<20세손>장남(長男)형공(亨公)님-<21세손>임분(林芬)님-<22세손>장남(長男)계양성(桂陽聖)님-<23세손>장남(長男)산윤(山允)일명,견일(肩逸)님-<24세손>장남(長男)경주최씨(慶州崔氏)시조(始祖)치원(致遠)님-<25세손>장남(長男)은함(殷含)님-<26세손>장남(長男)승로(承老)님-<27세손>장남(長男)숙(肅)님-<28세손>장남(長男)제안(齊顔)님. <27세손>차남(次男)량(亮)님【江陵강릉崔氏일파(諱必達휘필달님.杆城간성崔氏일파諱之洵휘지순님).(諱文漢휘문한님,江華강화崔氏일파).通川통천,和順화순,原州원주,泰仁태인,牛峰우봉崔氏일파】. <27세손>삼남(三男)의(儀)님-<28세손>주(周)님【淸州청주崔氏일파(龍岡용강,扶安부안崔氏일파).楊州양주,水原수원,咸陽함양,密陽밀양,廣州광주,古阜고부崔氏일파】. <27세손>사남(四男)우(遇)님【延豊연풍,稷山직산,茂珠무주,聞慶문경崔氏일파】. <26세손>차남(次男)윤로(胤老)님-<27세손>장남(長男)방언(邦彦)님-<28세손>지윤(之潤)님. <27세손>차남(次男)림(琳)님-<28세손>호(昊)님. <27세손>삼남(三男)종지(宗祗)님-<28세손>언(彦)님. <25세손>차남(次男)도함(道含)일명,윤순(允順)님【鷄林계림崔氏일파】-<26세손>첨로(添老)님【海州해주崔氏일파(牙山아산,龍宮용궁,龍州용주,竹山죽산,靑松청송崔氏일파),耽津탐진崔氏일파(羅州나주,康津강진,槐山괴산崔氏일파).晋州진주崔氏일파】-<28세손>선지(善之)님【永興영흥,月城월성崔氏일파】. <24세손>차남(次男)서원(棲遠)님. <23세손>차남(次男)산두(山斗)님【朔寧삭녕崔氏일파】-<24세손>인곤(仁滾)님-<25세손>도(道)님-<26세손>창로(昌老)님. <23세손>삼남(三男)이정(利貞)님【朗州낭주,鐵原철원,全州전주崔氏일파(諱群玉휘군옥님)】-<24세손>장남(長男)승우(承佑)님-<25세손>준옹(俊邕)님【東州동주崔氏일파】-<26세손>동무(東武)님. <24세손>차남(次男)우달(佑達)님)님【開城개성崔氏일파】-<25세손>응(凝)님【祥原상원崔氏일파】-<26세손>상(祥)님. <22세손>차남(次男)계양현(桂陽賢)님-<23세손>언휘(彦撝)님【全州전주崔氏일파(諱純爵휘순작님.完山완산,草溪초계,光陽광양.陽川양천,衿川금천崔氏일파).(諱阿휘아님.江陵강릉崔氏일파諱欣奉휘흔봉님).(諱均휘균님.曲江곡강,順川순천,永川영천崔氏일파)興海흥해,黃州황주崔氏일파】-<24세손>장남(長男)광윤(光胤)님【安東안동崔氏일파】. <24세손>차남(次男)행귀(行歸)님. <24세손>삼남(三男)광원(光遠)님-<25세손>항(沆)님-<26세손>장남(長男)유부(有孚)님-<27세손>공익(公翊)님-<28세손>지(贄)님. <26세손>차남(次男)영부(永孚)님. <20세손>차남(次男)형일(亨一)님-<21세손>선경(?敬)님-<22세손>창(昌)님. <11세손>차남(次男)동지내(東之奈)님. <7세손>차남(次男)지(之)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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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경주최씨 대종회
최씨세계분파도와
참고문헌 ; 범 최 씨 통 사 (汎 崔 氏 通 史)중에서
054-749-0526
고운 최치원 선생 영정
안녕하세요. 우리 경주최씨(慶州崔氏) 시조(始祖)이신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님은 서기857년 (신라 헌강왕 원년) 신라(新羅)의 사량부(沙梁部) 에서 산윤(山允)자(字)견일(肩逸)님의 장남(長男)으로 탄생, 어려서 부터 총민(聰敏)하고 학문(學文)을 좋아했으며 당시(當時)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唐)나라에 유학(遊學)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여 ^^ 10년 안에 학문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에 열중하였다. 서기 874년(경문왕 14년) 나이 18세로 과거(科擧){빈공과:당나라 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위해 실시한 과거} 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고 율수현위(溧水縣尉)가 되시었으며 서기877년(신라 헌강왕 3년)정치적 업적 인정받아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鳳)에 오르시고 당(唐)나라 황제(皇帝)로 부터 궁궐을 하시(何時)라도 출입 할수있는 금장식 자금어대(紫金魚袋:허리에 차는 장신구)를 하사 받으셨으며 서기879년(신라 헌강왕 5년) 산동지방에서 반적의 우두머리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요약 <<대개 바른것을 지키고 떳떳한 일을 행하는 것을 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 하는것을 權이라 한다. 지혜있는 자는 때에 순응함으로써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바른 이치를 거역 함으로써 실패하노라. 만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황소의 무리를 다 죽이려고 생각할뿐 아니라 또한, 땅 속의 귀신까지도 너를 죽이려고 가만히 의논하고 있을 것이니 네가비록 숨은 붙어있다고 하지만 넋은 벌써 빠져버렸을 것이다. 무릇 사람의 일이란 자기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내가 헛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자세히 들어라. >>등..... 을 지어 격퇴. 특히 벼슬에 있으면서 기울어져가는 고국(신라)을 구하고 부모님을 뵙고싶은 애뜻한 마음을 시(詩)로 달래며 공무중 여가를 이용해 다섯권의 중산복궤집을 엮어 훗날 고국의 왕에게 올림. 고국을 그리워 하며 읊은
孤雲 崔 致 遠 先生 "詩"
途中作도중작 "돌아갈 수도 없는 나그네의 어려움을 읊은 글"
<<동표서전로기진東飄西轉路歧塵>>'동서로 떠도는 몸 먼지 이는 갈림길에'
<<독책리참기고신獨策羸驂幾苦辛>>'홀로 파리한 말 채찍질하기 얼마나 고생했는고'
<<불시불지귀거호不是不知歸去好>>'돌아감이 좋은 줄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지연귀거우가빈只緣歸去又家貧>>'돌아간댔자 집이 또한 가난한 것을'
慶州崔氏 慶南 宗親會
반란군 토벌에 공(功)을 세우시고 타국(他國)이면서도 대국(大國)이었던 당나라에서 크게 명성(名聲)을 떨친등의 업적으로 이를 기념(記念)하기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양주시 정부(政府)는 중국(中國) 양주시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기념관(紀念館)을 완공해 주었습니다.
매년(每年}양력10월15일 중국 양주시 기념관에서 제향행사
서기 8 8 4년(신라 헌강왕 10년) 28세때 당나라 희종(僖宗)의 사신(使臣)자격으로 귀국하여 서기8 8 5년 (헌강왕 11년)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부시랑지서서감(知瑞書監),국사(國師) 등에 제수되었고 당나라에서 지은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籄集), 시부(詩賦) 3권을 임금에게 바침. 국정이 혼란하자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태산(현 전북 태인), 부성(현 충남 서산), 태수(太守)로 부임. 서기894년(신라 진성여왕 8년) 임금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국정수습책)를 상소 하였으나 중앙 귀족들의 반발로 채택되지 않았고 아찬(阿湌:신라 17관등 중 여섯째 벼슬)에 올랐으나 국정이 날로 혼탁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강과 산, 해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두루 다니시며 국운(國運)을 한탄하시다가 만년에는 서기896년(신라 진성여왕 10년) 가족과 함께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시어 모형(母兄)인 대승려 별대덕(別大德) 현준(賢俊)및 정현사(定玄師), 희랑(希朗)과 함께 학문과 득도에전념, 끝내세상에 나오시지 않으시고 선화(仙化)하셨다함. 서기1020년(고려 헌종 11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追贈)되고 공자묘(孔子廟)에
상식쑥쑥 역사 신라시대 여왕, 성골 남자가 없어 왕위 계승한 거죠
혈연(血緣)이 같은 핏줄로 연결된 관계를 뜻한다면, 혈통(血統)은 같은 핏줄의 계통을 말해요. 옛날에는 혈통에 따라 신분의 높고 낮음이 구별되기도 했답니다. 특히 신라시대에는 '골품제(骨品制)' 라는 특별한 신분제도 가 있어 다른 왕조보다 더욱 혈통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어요.
골품제는 혈통, 즉 타고난 핏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사회 활동을 엄격하게 제한한 제도예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귀족,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두품제(頭品制)를 합한 것이지요. 두품은 1두품에서 6두품까지 6단계로 나뉘었는데, 숫자가 큰쪽이 더 높은 지위를 뜻하며 6~4두품은 귀족, 3~1두품은 평민이었어요.
왕족, 즉 골족은 다시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나뉘었습니다. 최고 신분이었던 성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순수한 왕족 혈통인 경우를 말하며, 그 아래 계급이었던 진골은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쪽이 왕족, 다른 한쪽은 귀족인 경우를 말해요. 진평왕의 딸 덕만과 진평왕의 친동생인 국반의 딸 승만이 여자 임에도 왕위에 올라 각각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된 것도 골품제 영향이 컸다고 볼 수있어요. 두사람이 성골인 덕분에 즉위가 가능했다는 것이지요. '삼국유사' 에도 '성골 남자가 없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또 한명의 신라 여왕인 진성여왕도 성골 출신이었을까요?
진성여왕은 성골이 아니었어요. 신라에서 성골은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그 대가 끊어졌거든요. 그 후 태종무열왕부터는 진골이 왕위를 이었지요.
역사학자들은 '성골' 이 신라 제23대 왕인 법흥왕 때 생겨나 진흥왕과 진평왕을 거치면서 강조된 신분으로 생각해요. 제26대 진평왕부터 그 직계 혈통만 왕위를 잇게 하며 성골로 구분했다고도 보고 있지요. 그래서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150여년 정도가 성골이 왕위를 이었던 기간이라고 생각해요.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정강왕의 유언 때문이었어요. 정강왕은 죽으며 왕위 계승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어요.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나 누이동생 '만' 의 천성이 총명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녀로 왕위를 잇게 하라." 정강왕은 경문왕의 둘째아들로, 형인 헌강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가 2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당시 경문왕의 친동생인 위홍은 상대등(★)이라는 최고 관직에 오른 실권자였는데 그를 제치고 여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경문왕의 직계 혈통으로 왕위가 계승되었다는 뜻이에요. 진성여왕 역시 자기 아들 대신 큰오빠인 헌강왕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직계 혈통으로 왕위가 계승되도록 하였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문화재청
경주에 있는 태종무열왕의 능이에요.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은 최초 진골 출신 왕이지요.
★ 상대등(上大等): 신라의 최고 관직.531년 (법흥왕 18년)에 생겨났으며, 귀족회의인 '화백' 의 의장으로 신라 귀족의 대표적인 존재.
1분상식⇒ '6두품'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6두품은 두품제 가운데 가장 높은 귀족 계급이에요. 학문과 종교등 여러 분야에서 두루 뛰어나 설총, 원효대사 같은 학자나 고승을 많이 배출했지요. 하지만 이들도 골품제 아래 신분적 제약을 받았어요. 신라 17관등 중 여섯째 관직인 '아찬' 까지만 될수 있고, 더 높은 직위에는 임명될 수 없었지요.신라 후기로 갈수록 진골의 권력 독점이 심해지자 이들의 불만도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는 6두품이 크게 늘었지요. 고려 건국 후에는 많은 6두품이 고려 정부에 진출하여 관료 문화를 형성하는 주역이 되었어요.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2014.05.13. 26면 조선일보 기사
토황소격문 전문討黃巢檄文 全文
2005.09.24 10:04
이 글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황소에게 보내는 글이다. 이 글을 읽고 황소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후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다.
檄黃巢書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官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
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敬承嘉諭 用?奸謀 且汝素是遐?
驟爲勍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宮? 旣當罪極滔天 必見敗深遁地 噫 唐虞已降 苗扈弗賓
無良無賴之徒 不義不忠之輩 爾曹所作 何代而無 遠則有劉曜王敦??晉室
近則有祿山朱 吠?皇家 彼皆或手握强兵 或身居重任叱叱則雷奔電走
喧呼則霧塞烟橫 然猶暫逞奸圖 終殲醜類 日輪闊輾
豈縱妖? 天綱高懸 必除凶族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畝之間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 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 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已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比者我國家德深含垢
恩重棄瑕 授爾節? 寄爾方鎭 爾猶自懷?毒 不斂梟聲 動則齧人
行唯吠主 乃至身負玄化 兵纏紫微 公侯?竄危途 警?則巡遊遠地
不能早歸德義 但養頑凶 斯則聖上於汝有赦罪之恩 汝則於國有辜恩之罪
必當死亡無日 何不畏懼于天 況周鼎非發問之端 漢宮豈偸安之所
不知爾意終欲奚爲 汝不聽乎 道德經云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又不聽乎 春秋傳曰 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公汝藏奸匿暴 惡積禍盈 危以自安迷以不復
所謂燕巢幕上 漫恣騫飛 魚?鼎中 卽看?爛 我緝熙雄略?合諸軍
猛將雲飛 勇士雨集 高旌大? 圍將楚塞之風 戰艦樓船
塞斷吳江之浪 陶太尉銳於破敵 楊司空嚴可稱神 旁眺八維 橫行萬里
旣謂廣張烈火 ?彼鴻毛 何殊高擧泰山 壓其鳥卵 卽日金神御節水伯迎師
商風助肅殺之威 晨露滌昏煩之氣 波濤旣息 道路卽通 當解纜於石頭
孫權後殿 佇落帆於峴首 杜預前驅 收復京都 剋期旬朔但以好生惡殺
上帝深仁 屈法申恩 大朝令典 討官賊者不懷私忿 諭迷途者固在直言
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早學見機
善自爲謀 過而能改 若願分茅列土 開國承家 免身首之橫分
得功名之卓立 無取信於面友 可傳榮於耳孫 此非兒女子所知 實乃大丈夫之事
早須相報 無用見疑 我命戴皇天 信資白水 必須言發響應
不可恩多怨深 或若狂走所牽 ?眠未寤 猶將拒轍 固欲守株 則乃批熊拉豹之師
一麾撲滅 烏合?張之衆 四散分飛 身爲齊斧之膏
骨作戎車之粉 妻兒被戮 宗族見誅 想當燃腹之時 必恐?臍不及 爾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曷若順而榮貴 但所望者 必能致之
勉尋壯士之規 立期豹變 無執愚夫之慮 坐守狐疑 某告
격황소서(檄黃巢書-역적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 모(某)는 황소에게 고하노니,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는 법이다. 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하기 어려우나, 모든 일은 마음으로써 그 옳고 그른 것을 이루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 서두(제도도통검교태위는 황소에게 고함)
이제 내가 왕사로서 말하면 정벌함은 있으나 싸우지는 않고, 군정(軍政)은 머너 은혜를 베풀고 베어 죽이는 것은 뒤로 한다. 장차 상경(上京)을 수복하고 진실로 큰 믿음을 펴려고 함에 공경스럽게 가유를 받들어 간사한 꾀를 쳐부수려고 한다. 또 너는 본래 먼 시골 구석의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문득 감히 떳떳한 기강을 어지럽게 하며 드디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신기(神器)를 노리며 성궐을 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이미 죄는 하늘에 닿을 만큼 지극하였으니 반드시 여지 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애달프다. 당우 시대로부터 내려오면서 묘와 호 따위가 복종하지 아니하였은즉, 양심 없는 무리와 충의(忠義) 없는 것들이란 바로 너희들의 하는 짓이다. 어느 시대인들 없겠느냐. 멀리는 유요와 왕돈이 진 나라를 엿보았고, 가까이는 녹산과 주자가 황가를 시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모두 손에 막강한 병권(兵權)을 쥐었고 또한 몸이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호령만 떨어지면 우레와 번개가 치닫듯 요란하였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하듯 하였지만,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필경(畢竟)에는 그 씨조차 섬멸(殲滅)을 당하였다.
햇빛이 널리 비침에 어찌 요망한 기운을 마음대로 펴리요, 하늘 그물이 높게 달려 반드시 흉적을 베일진대 하물며, 너는 여염집에서 내치고, 농묘 사이에서 일어나 분겁으로 좋은 꾀 삼고, 살상으로 급무 삼으니 큰 죄는 탁발할 수 있을 것이요, 소선(小善)으로 은신(隱身)할 수 없느니라. 천하 모든 사람이 다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문득 또한 땅 속의 귀신도 벌써 남몰래 베기로 의논하였다. 비록 기세를 빌어 혼을 놀게 하나, 일찍이 선을 망치고 넋을 빼앗으리라. 무릇 인사를 이름에 스스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내 망언(妄言)하지 않는다.
너는 자세히 듣거라.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더러운 것을 용납하는, 덕이 깊고 결점을 따지지 않는 은혜가 지중하여 너에게 병권을 주고 또 지방을 맡겼거늘, 오히려 짐새와 같은 독심을 품고 올빼미와 같은 흉악한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하는 짓이 개가 주인을 짖는 격으로, 필경에는 천자의 덕화를 배반하고 궁궐을 침략하여 공후들은 험한 길로 달아나게 되고 어가는 먼 지방으로 행차하시게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일찌감치 덕의에 돌아올 줄 모르고 다만 흉악한 짓만 늘어가니, 이야말로 천자께서는 너에게 죄를 용서해 준 은혜가 있고, 너는 국가에 은혜를 저버리니 죄가 있을 뿐이니, 반드시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하물며 누자라 솥은 물어 볼 것이 아니요, 한나라 궁궐은 어찌 네가 머무를 곳이랴. 너의 생각은 끝내 어찌하려는 것이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도덕경>에 "회오리바람은 하루 아침을 가지 못하고 소낙비는 온종일을 갈 수 없다." 고 하였으니, 하늘의 조화도 오히려 오래 가지 못하거든 하물며 사람의 하는 일이랴. 또 듣지 못하였느냐. <춘추전>에 "하늘이 아직 나쁜 자를 놓아 두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죄악이 짙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 너는 간사함을 감추고 흉악함을 숨겨서 죄악이 쌓이고 앙화가 가득하였음에도, 위험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미혹되어 돌이킬 줄 모르니, 이른바 제비가 막 위에다 집을 짓고 막이 불타오르는데도 제멋대로 날아드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솥 속에서 너울거리지만 바로 삶아지는 꼴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뛰어난 군략을 모으고 여러 군사를 규합하여, 용맹스런 장수는 구름처럼 날아들고 날랜 군사들은 비 쏟아지듯 모여들어, 높이 휘날리는 깃발은 초새의 바람을 에워싸고 총총히 들어찬 함선은 오강의 물결을 막아 끊었다.
진나라 도태위처럼 적을 쳐부수는 데 날래고, 수 나라 양소처럼 엄숙함이 신이라 불릴 만하여, 널리 팔방을 돌아보고 거침없이 만 리를 횡행할 수 있으니 마치 치열한 불꽃을 놓아 기러기 털을 태우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알을 짓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금신이 계절을 맡았고 수백(水伯)이 우리 군사를 환영하는 이 때, 가을 바람은 숙살하는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 이슬은 혼잡한 기운을 씻어 주니, 파도는 이미 쉬고 도로는 바로 통하였다. 석두성에 뱃줄을 놓으니 손권이 후군이 되었고, 현산에 돛을 내리니 두예가 앞잡이가 되었다. 앞으로 서울을 수복하기는 늦어도 한 달이면 되겠지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하늘의 깊으신 덕화요, 법을 늦추고 은혜를 펴려는 것은 국가의 좋은 제도이다.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지 아니 해야 하고 어두운 길에 헤매는 이를 깨우쳐 주는 데서 바른 말이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의 한 장 글을 날려서 너의 급한 사정을 풀어 주려는 바이니, 미련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일찍이 기회를 보아 자신의 선후책을 세우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 만일 땅을 떼어 받아 나라를 맡고 가업을 계승하여서 몸과 머리가 두 동강이 되는 화를 면하고 뛰어난 공명을 얻기 원한다면 몹쓸 도당들의 말을 믿지 말고 오직 후손에게 영화를 유전해 줄 것만을 유의하라. 이는 아녀자의 알은 체할 바가 아니요 실로 대장부의 할 일이니만큼, 그 가부를 속히 회보할 것이요, 쓸데없는 의심을 두지 말라.
나는 명령은 하늘을 우러러 받았고 믿음은 맑은 물을 두어 맹세하였기에, 한 번 말이 떨어지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매 은혜가 더 많을 것이요 원망이 짙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서 날뛰는 도당들에 견제되어 취한 잠을 깨지 못하고 마치 당랑이 수레바퀴를 항거하듯이 어리석은 고집만 부리다가는, 곰을 치고 표범을 잡는 우리 군사가 한 번 휘둘러 쳐부숨으로써 까마귀 떼처럼 질서 없고 솔개같이 날뛰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것이며, 너의 몸뚱이는 도끼 날에 기름이 되고 뼈다귀는 수레 밑에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 죽고 권속들은 베임을 당할 것이다.
-본문 (왕사로서 정벌하고자 함)
옛날 동탁처럼 배를 불태울 그 때가 되어서는, 사슴처럼 배꼽을 물어뜯는 후회가 있을지라도 시기는 이미 늦을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진퇴(進退)를 참작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分別)하라. 배반하다가 멸망하기보다 어찌 귀순(歸順)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다만, 너의 소망(所望)은 반드시 이루게 될 것이니, 장부(丈夫)의 할 일을 택하여 표범처럼 변하기를 기할 것이요, 못난이의 소견(所見)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품지 말라.
- 결말(귀순을 권유)
요점 정리
연대 : 당나라 881년
작자 : 최치원
형식 : 격문, 변려문체
성격 : 경고와 힐책과 회유
주제 : 적장의 죄과를 꾸짖고 투항할 것을 권고하는 글
의의 : 신라인으로서 당나라 사람들까지 놀라게 한 명문으로 최치원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한 글
내용 연구
격서 : 격문 또는 격. 특별한 경우에 군병을 모집하거나, 세상 사람들의 흥분을 일으키거나 또는 적
군을 타이르거나 힐책하기 위하여 발표하는 글
광명 : 당나라 희종의 연호(880-881) 재위는 873-888
대저 : 대체로 보아서
변통 : 일의 경우를 따라서 이리 저리 막힘없이 잘 처리함.
권 : 위태로움에 임해서 슬기롭게 이겨 나갈 수 있는 것
군정 : 전쟁이나 사변 때 군사령관이 임시로 행하는 행정
순응 : 환경을 좇아서 그것에 잘 적응함
분별 : 세상 물정을 알아서 가림
왕사 : 정부의 군대
상경 : 당나라 서울 장안
수복 : 잃었던 땅을 도로 찾음
가유 : 황제의 유시
신기 : 황제의 자리
성궐 : 대궐의 문
이해와 감상
당나라 희종 광명 2년에 유적인 황소가 모반하여 복주를 점령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고변을 제도행영도통을 삼아 적을 치게 하였다. 이 때 최치원은 그의 막하에서 고변을 대신하여 7월 8일에 '격황소서'를 지었다. 이 격문은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명문으로서 문필의 대공을 세웠다. 이 격문의 뜻이 호장 장엄하여 추상열일과 같은 위압의 힘이 있었고, 용천설악의 쾌도로써 요마의 머리를 한 칼에 베는 것같은 위엄이 있었다. 격문에서 적장의 죄를 꾸짖고 힐책하는 가운데, '다만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까지도 이미 남몰래 너를 베려고 의결하였다'라고 한 구절에서는 아무리 완강무지한 도둑일지언정 한 번 읽고는 모골이 쭈뼛하고 혼비백산하여 저도 모르게 상(床)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이로써 최치원의 문명(文名)이 천하에 떨쳐져 천 년 후인 오늘날에도 그 이름이 높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종(祖宗)이라는 의의를 제쳐놓고라도 갖가지 설화와 일화, 기담으로 말미암아 초인적 존재로서 추앙을 받는 소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심화 자료
변려문
변려체·변문 ·사륙문(四六文) ·사륙변려문이라고도 한다.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修辭的)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로, 변은 한 쌍의 말이 마차를 끈다는 뜻이고, 여(儷)는 부부라는 뜻으로 후한(後漢) 중말기(中末期)에 시작되어 위(魏) ·진(晋) ·남북조(南北朝)를 거쳐 당(唐)나라 중기까지 유행한 문체로, 변려문이라는 명칭은 당송(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 '걸교문(乞巧文)' 중 “변사려륙금심수구”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변려문의 필수적인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개념 및 문법적인 기능이 서로 대응하는 2개의 구(句)로써 대구(對句)를 이루어 문장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② 문장의 전편(全篇)이 4자구(四字句)를 주로 하고, 6자구(六字句)를 이에 따르도록 구성한다. ‘사륙문’이라는 호칭은 여기서 나왔다.
③ 구말(句末) 및 구중(句中)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평측(平仄)을 안배(按排)하고 문장의 운율을 알맞게 다듬는다.
④ 고전(古典) 문장을 잘라서 쓰는, 이른바 단어를 교묘하게 활용하여 문장에 세련미를 갖게 한다.
변려문의 귀족적인 문체는 과도한 수사주의(修辭主義) 경향으로 말미암아 중당(中唐) 때 한유(韓愈) 등이 일으킨 산문개혁운동에 의하여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고, 한국에서는 신라 때에 이미 '문선(文選)'이 애독되면서 이 문체가 성행하였으며, 고려 때까지 계속되었다.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u-pil-bi-pyeong/kyeok-hwang-so-seo.htm
의견 11 <form method="post" name="removeOpenDicForm" action="/opendic/deleteOpen100.nhn"> </form>
경주최씨(慶州崔氏) 분파세계표(分派世系表) 始 祖 2世孫 3世孫 4世孫 5世孫 6世孫 7世孫 8世孫 9世孫 10世孫 11世孫 12世孫 파명 최치원 은함 승로 숙 제안 계훈 현배 습 유경 자운 청 연지 觀稼亭公(諱)淸派 崔致遠 ─ 殷含 ┬ 承老 ┬ 肅 ─ 齊顔 ┬ 繼勳 ┬ 玄培 ─ 隰 ─ 有慶 ┬ 子雲 ┬ 淸 ┬ 淵止 → 관가정공(휘)청파 │ │ │ │ │ │관가정│ 신지 │ │ │ │ │ │ ├ 信止
│ │ │ │ │ │ │ 검지 │ │ │ │ │ │ ├ 儉止 │ │ │ │ │ │ │ 한지 │ │ │ │ │ │ └ 漢止 │ │ │ │ │ │ 강 온손 判書公(諱)江派 │ │ │ │ │ └ 江 ┬ 溫孫 → 판서공(휘)강파 │ │ │ │ │ 판서공│ 계손 │ │ │ │ │ ├ 係孫
│ │ │ │ │ │ 검손 │ │ │ │ │ └ 儉孫 │ │ │ │ │ 수운 호 단 匡靖公(諱)鄲派 │ │ │ │ ├ 峀雲 ┬ 澔 ┬ 鄲 → 광정공(휘)단파 │ │ │ │ │ │ │ 광정공 │ │ │ │ │ │ │ 현진 判書公(諱)賢進派
│ │ │ │ │ │ └ 賢進 → 판서공(휘)현진파 │ │ │ │ │ │ 판서공 │ │ │ │ │ │ │ │ │ │ │ │ 진 지철 判書公(諱)進派 │ │ │ │ │ ├ 津 ┬ 之哲 → 판서공(휘)진파 │ │ │ │ │ │판서공│ 호남 │ │ │ │ │ │ └ 好男 │ │ │ │ │ │ 연 윤공 尙書公(諱)淵派 │ │ │ │ │ └ 淵 ─ 允公 → 상서공(휘)연파 │ │ │ │ │ 상서공 │ │ │ │ │ 해운 흘 상형
│ │ │ │ └ 海雲 ─ 汔 ─ 尙泂 → 좌윤공(휘)해운파 │ │ │ │ 현우 좌윤공 左尹公(諱)海雲波 │ │ │ ├ 玄祐
│ │ │ │ 현진 수 구정 반 윤지 │ │ │ └ 玄進 ┬ 修 ─ 九鼎 ─ 盤 ─ 潤地 │ │ │ │ 환 안준 유정 기 세청 吉城君(諱)有井派 │ │ │ ├ 渙 ─ 安俊 ─ 有井 ┬ 淇 ─ 世淸 → 길성군(휘)유정파 │ │ │ │ 길성군│ 호 세징 │ │ │ │ ├ 浩 ─ 世澄
│ │ │ │ │ 홍 세연 │ │ │ │ └ 泓 ─ 世淵 │ │ │ │ 탁 송무 수안 윤겸 홍용 鷄林君(諱)倬派 │ │ │ └ 倬 ─ 松茂 ┬ 守安 ─ 允謙 ┬ 鴻龍 → 계림군(휘)탁파 │ │ │ 계림군 │ │ 봉용 │ │ │ │ ├ 鳳龍
│ │ │ │ │ 삼용 │ │ │ │ └ 三龍 │ │ │ │ 찬 훈 중엽 │ │ │ 판서공 └ 瓚 ─ 焄 ─ 重燁 │ │ │ 문훈 연 사원 중윤 명 입팽 계상 判書公(諱)士元派 │ │ ├ 文勳 ─ 漣 ┬ 士元 ─ 仲允 ─ 明 ─ 立伻 ─ 繼常 → 판서공(휘)사원파 │ │ │ │ 사형 광위 종포 일 재연 忠烈公(諱)光位派 │ │ │ ├ 士亨 ─ 光位 ─ 宗浦 ─ 逸 ─ 再延 → 충렬공(휘)광위파
│ │ │ │ 사리 충렬공 │ │ │ ├ 士利
│ │ │ │ 사정 │ │ │ └ 士貞 │ │ │ 상훈 수 준 구호 종진 첨년 경희 侍中公(諱)尙勳派 │ │ └ 尙勳 ┬ 洙 ┬ 俊 ─ 九昊 ─ 宗津 ─ 添年 ┬ 敬熙 → 시중공(휘)상훈파 │ │ 시중공│ │ │ 경원 │ │ │ │ ├ 敬元
│ │ │ │ │ 경문 │ │ │ │ 윤 └ 敬文 │ │ 량 │ 무 └ 倫 │ ├ 亮 └ 懋 │ │ 의 주 기우 응청 정일 형삼 지윤 신우 동국 淸城侯(諱)周派 │ ├ 儀 ─ 周 ─ 奇遇 ┬ 應淸 ─ 正日 ─ 亨三 ─ 智允 ─ 信友 ─ 東國 → 청성후(휘)주파 │ │ 우 청성후 │ 응시 정호 형구 유의 만선 창묵 │ └ 遇 └ 應時 ─ 正浩 ─ 亨九 ─ 由義 ─ 萬善 ─ 昌默
│ 윤로 방언 지윤 환 득해 규 세홍 충량 타 호남 文順公(諱)渙派 └ 胤老 ┬ 邦彦 ─ 之潤 ─ 渙 ┬ 得海 ─ 珪 ┬ 世洪 ┬ 忠良 ─ 沱 ─ 好男 → 문순공(휘)환파 │ 문순공│ │ │ 충보 흡 호응 │ │ │ ├ 忠輔 ┬ 洽 ┬ 好應
│ │ │ │ │ │ 정생 │ │ │ │ │ └ 挺生 │ │ │ │ │ 소 몽로 │ │ │ │ └ 沼 ─ 夢老 │ │ │ │ 충정 관 몽천 │ │ │ └ 忠貞 ─ 灌 ┬ 夢天 │ │ │ │ 몽필 │ │ │ └ 夢必 │ │ │ 여홍 충좌 송 중무 │ │ └ 汝洪 ─ 忠佐 ┬ 松 ─ 仲茂 │ │ │ 회 함진 │ │ ├ 檜 ─ 含眞 │ │ │ 빈 │ │ └ 彬 │ │ 정해 각 내홍 충익 남 │ └ 正海 ─ 珏 ┬ 乃洪 ─ 忠翊 ─ 楠 │ │ 구홍 충식 작 엽 │ └ 九洪 ┬ 忠植 ─ 柞 ─ 燁 │ │ 충직 │ └ 忠直 │ 림 호 공균 대 자수 전 충윤 운택 계 學士公(諱)琳派 ├ 琳 ─ 昊 ─ 公均 ─ 玳 ─ 資壽 ─ 佺 ┬ 忠潤 ┬ 雲澤 ┬ 係 → 학사공(휘)림파 │학사공 │ │ │ 읍 │ │ │ └ 泣
│ │ │ 운호 │ │ └ 雲浩 │ │ 충한 │ └ 忠漢 │ 종지 언 방로 근성 습용 홍 흥무 구정 산해 進士公(諱)宗祗派 └ 宗祗 ─ 彦 ─ 邦老 ─ 近成 ─ 濕龍 ─ 洪 ─ 興茂 ─ 九精 ┬ 山海 → 진사공(휘)종지파 진사공 │ 치해 參奉公(諱)鳳朝派 └ 峙海 → 참봉공(휘)봉조파
시 조 2世孫 3世孫 4世孫 5世孫 6世孫 7世孫 8世孫 9世孫 10世孫 11世孫 12世孫 파명 최치원 윤순 선지 적손 백유 인지 선 함일 홍재 호 정랑공(휘)호파 崔致遠 ─ 允順 ─ ○○ ─ ○○ ─ 善之 ┬ 適孫 ─ 白楡 ─ 仁祉 ┬ 墠 ─ 咸── 弘載 ┬ 灝 → 正郞公(諱)灝派 │ │ │ 예 사성공(휘)예파
│ │ ├ 汭 → 司成公(諱)汭派
│ │ │ 한 송오공(휘)한파
│ │ └ 漢 → 松塢公(諱)漢派
│ │ 제 함대 홍기 종식 문밀공(휘)제파
│ └ 堤 ─ 咸大┬ 弘起 ─ 宗式 → 文密公(諱)堤派
│ 문밀공 │
│ │ 홍원 연
│ └ 弘遠 ─ 演
│ 적립 종유 인호 돈예 정분 간 석 동성군(휘)종유파
├ 適立 ┬ 宗楡 ┬ 仁護 ─ 敦禮 ┬ 正芬─ 澗 ┬ 碩 → 東城君(諱)宗楡派
│ │동성군│ │ │ 적
│ │ │ │ ├ 磧
│ │ │ │ │ 린
│ │ │ │ └ 磷
│ │ │ │ 정화 │ │ │ 인모 └ 正華 │ │ └ 仁謨 │ │ 종재 │ 사직 종빈 환 광포 적 백윤 해 문정공(휘)해파
└ 斯直 ┬ 宗斌 ─ 讙 ─ 光褒 ─ 勣 ─ 佰倫 ┬ 瀣 → 文正公(諱)瀣派
│ │문정공
│ │ 지
│ └ 潪
│ 종식 지미 종태 불타 근 양수 영흥벡(휘)지미파
├ 宗識 ─ 之美 ─ 終泰 ┬ 佛佗 ─ 斤 ─ 良守 → 永興伯(諱)之美派
│ 영흥백 │ 한기 조연 지덕
│ └ 閑奇 ┬ 造延 ─ 之德
│ │ 방보 원덕
│ └ 方甫 ─ 元德
│ 득용 읍송 수경 갑 유천 돌 목사공(휘)득용파
└ 得龍 ─ 邑松 ─ 水京 ─ 甲 ─ 有川 ─ 突 → 牧使公(諱)得龍派
목사공
시 조 2世孫 3世孫 4世孫 5世孫 6世孫 7世孫 8世孫 9世孫 10世孫 11世孫 12世孫 파명 최치원 애 현우 습 계운 첨로 화숙공(휘)현우파 崔致遠 ─ ○○ ─ ○○ ─ ○○ ─ ○○ ─ ○○ ─ ○○ ─ 藹 ┬ 玄祐 ┬ 濕 ┬ 繼雲 ─ 添老 → 和淑公(諱)玄祐波 │화숙공│ │ 서운 이 │ │ │ 瑞雲 ─ 邇 │ │ │ 근운 신로 │ │ └ 瑾雲 ─ 信老 │ │ 잉 │ 방준 침 │ ├ 陾 ├ 方濬 ─ 沉 │ │ │ 안준 천 │ │ ├ 安濬 ┬ 洤 │ │ │ │ 징 │ │ │ └ 澄 │ │ │ 원준 석현 │ │ └ 元濬 ─ 石賢 │ │ 주 상렴 인 │ └ 周 ┬ 尙濂 ┬ 寅 │ │ │ 주 │ │ └ 宙 │ │ 상겸 식 │ └ 尙謙 ┬ 寔 │ │ 실 │ └ 實 │ │ 광우 자연 중경 흡 밀직공(휘)광우파 └ 光祐 ─ 自然 ─ 重敬 ─ 洽 → 密直公(諱)光祐波 밀직공 계양현 桂陽賢 ↓ 전주최씨 全州崔氏 중조언휘 광윤 中祖彦撝 ┬ 光胤 │ 행귀 ├ 行歸 │ 광원 항 유부 공익 지 충구 정번 지목 숭 혼연 빈 절의공(휘)항파 └ 光遠 ─ 沆 ┬ 有孚 ─ 公翊 ─ 贄 ─ 忠球 ─ 正藩 ─ 之牧 ─ 崇 ┬ 渾然 ─ 濱 → 節義公(諱)沆波 절의공│ │ 호연 위 │ └ 浩然 ─ 渭 │ 영부 └ 永孚 |
최/씨/선/계/보崔/氏/先/系/譜
※본 최씨 선계보(先系譜)는 조선조말(朝鮮朝末) 고종(高宗)14(1877)년정축(丁丑)에 그러나 성씨별(性氏別)로 성자(性字)를 일반적(一般的)으로 사용(使用)하지 않던 시대(時代)인 신라건국초(新羅建國初)부터 성명(字諱)또는 계대(系代)를 어떻게 고증(考證)하였는지 의아(疑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선계보(先系譜)에 각본관별(各本貫別) 최씨의 계대를 이어 거의 모든 최씨가 경주최씨 상계(上系) 모후(某后)에서 분적(分籍)되었음을 상세(詳細)히 계도화(系圖化)하여 수록(收錄)하여 놓았다.
그러나 본 통사에는 선계보를 확실(確實)한 고증으로 믿을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후예(后裔)로 하여금 혼돈(混沌)을 막기 위하여 신라말기(新羅末期)에 해당(該當)되는 계대 이하(以下)는 삭제(削除)키로 하였다. 선계보(先系譜)란 당시 (當時)학자(學者)로서 야사가(野史家)였던 율계(栗溪) 강선생(姜先生)께서 증보(增補)한 자신(自身)의 소작(所作)이 아닌가 사료(思料)되며 다만 선계에 대한 정통성(正統性)의 문제(問題) 이전(以前)에 후예(后裔)로 하여금 고증(考證)의 자료(資料)가 될까하여 등재(登載)하였으니 참고(參考)하기바란다.
- 編者註 -
서기 1977년 5월 12일 발행 | |
범 최 씨 통 사 (汎 崔 氏 通 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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