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청와대,『 프란치스코 교황 공식 환영식 』 ^^ 천주교 의정부 교구 용현동 성당 ^^ 합동 위령미사 (제사) 전경.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오뚜기방송 2016. 3. 2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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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평화는 절실한 大義”… “교황 방한, 통일 여는 계기”

이재명기자

입력 2014-08-15 03:00:00 수정 2014-08-15 08:30:48


[한국에 온 교황]한반도 메시지 朴대통령-교황 ‘평화의 기도’



 청와대, 프란치스코 교황 공식 환영식


 2014.08.14 오후 3시45분


청와대 대정원



 



 



청와대 환영식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청와대 본관 앞 대정원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 참석하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프란치스코 교황 환영사





프란치스코 교황님,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



대한민국 국민들이 오랫동안 고대해 온
교황님의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전 세계 12억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이신 교황님의 방한은
한국 천주교와 우리 국민들에게 큰 축복입니다.



교황님께서는 그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찾으셨고,
분쟁지역에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해 주셨습니다.



우리 국민들에게도 교황님의 방한은 큰 희망과 용기가 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은 세월호 사고의 아픔과
젊은 병사들의 죽음으로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번 교황님의 방문으로
우리 국민들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교황님께서 아시아 지역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신 데에는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교황님의 각별한 애정과 함께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심어주고자 하는
교황님의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도 한반도의 평화 회복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이번 방한 기간에도‘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해주시는 
교황님의 큰 관심과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와 우리 국민들은 이번 교황님의 방한이
오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한반도에 희망의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내년이면 남북 분단 70주년이 됩니다.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오랜 세월동안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휴전선 너머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채 
평생을 그리움과 고통 속에 살고 계신 이산가족들이
우리나라에만 7만여 명이 계십니다.



한국 천주교도 북한 지역의 교회재산을 몰수당했고,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납치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아픔의 역사를 딛고,
진정한 남북 화해와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갈 때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남북이 대립을 극복하고,
전쟁과 핵 위협에서 벗어나서
평화와 화해의 길을 가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을 돕기 위한 인도적 지원과
동질성 회복을 위한 민간 교류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 남북한 주민들이 전쟁과 핵 위협에서 벗어나 함께 행복을 누리고,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에도 기여하는 통일을 이루려면 
수많은 생명을 한꺼번에 앗아갈 수 있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부터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핵 없는 통일 한반도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교황님을 비롯해서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의
염원이라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올해 대한민국과 교황청은 공식 수교 51주년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양측은 수교 이전부터 이미 특별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국가의 기틀을 다지던 1947년,
비오 12세 교황께서 주한교황사절을 파견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 독립국가로 인정해주셨습니다.



교황청을 비롯한 전 세계 천주교회의 기도는
대한민국이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대한민국과 교황청이
세계 평화와 자유의 증진, 그리고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긴밀한 우호 협력관계를 맺어온 것을 매우 의미 있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 오늘의 발전을 이루기까지
한국 천주교는 매우 소중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교황님께서 이번 방한 기간에 시복식을 주례하시는
124위의 한국 순교자들은 반상과 남녀차별이 엄격했던 조선사회에서
이타적 삶의 자세로 자유와 평등을 확산시킨 선각자들이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이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처럼,
순교자들의 희생은 우리 사회와 교회를 성장시킨 밑거름이 됐습니다. 



자생적 신앙공동체로 출발한 한국 천주교는
이제는 전 세계에 선교사 1천여 명을 파견해서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희생과 헌신, 희망이 맺은 아름다운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방한기간 중에 교황님께서 참석하시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역시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서로의 문화를 체험하면서 꿈을 나눌 수 있도록 천주교 대전교구에서 정성들여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주시는 격려의 메시지를 통해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희망의 미래를 발견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앞으로 한국 정부도 우리가 받았던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기억하면서,
꿈과 희망을 세계 인류와 나누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생필품이 필요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식탁에 여분의 자리를 남겨두자”고 말씀하셨듯이,
대한민국의 식탁에도 여분의 자리를 남겨두어서
가난한 이웃과 늘 함께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대한민국은 지금 새로운 변화와 혁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번 방한 기간 동안 우리사회가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도모하고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가며,
나아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민족이 될 수 있도록
교황님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을 환영하며,
성좌(Sancta Sedes)를 중심으로 가톨릭 교회가 일치하고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8.14


大韓民國 大統領 朴槿惠


 


정상 연설


박근혜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정상연설에서 악수하고 있다.   


정상 연설


박근혜 대통령이 14일 오후 청와대에서 한국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과 공동연설을 하고 있다.  


정상 연설


박근혜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오후 청와대에서


공동연설을 마치고 악수를 하고 있다. 


정상 연설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오후 청와대에서 박근혜대통령에게


2000년 대희년을 기념해 만든 로마대지도를 선물하고있다.


청화대에서 선물로 결정된 철화분청사기 어문병



14일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북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교황 방한을 계기로 남북 관계의 진전을 바라고 있는 박근혜 정부로서는 아쉬울 수도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교황은 “(한국이) 한반도의 화해와 안정을 위하여 기울여 온 노력을 치하하고 격려한다”며 “상호 비방과 무익한 비판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만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교황 방한 직전에도 방사포를 발사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북한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셈이다.

○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선물은 평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한 연설에서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상과 사회를 물려줄 것인지 성찰하라는 도전을 받고 있다”며 “젊은이들에게 평화라는 선물이 필요함을 성찰하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쉽지 않다”면서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 위에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가겠다는 의지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연설에 앞서 면담에서 교황이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강조하자 스페인어로 “평화는 수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선물(La paz es un regalo que merece la pena)”이라고 화답했다.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스페인어가 모국어다. 박 대통령은 또 청와대 영빈관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페인어 구절이라며 “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잃는 것이다(La esperanza es lo ultimo que se pierde)”라는 뜻의 스페인어를 구사했다. 그러자 교황은 영어로 “희망은 선물(gift)”이라고 답했다.

교황은 연설도 모국어인 스페인어나 교황청의 미사 공식 언어인 라틴어 대신 영어로 했다. 청와대는 “주한 외국 대사를 많이 초청했기 때문에 교황이 영어로 연설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교황은 연설에서 평화와 함께 ‘배려와 참여’를 강조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그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주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이 인간적, 문화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교황은 “한국 가톨릭 공동체가 이 나라의 삶에 온전히 참여하기를 계속 열망하고 있다”며 “가톨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려는 정신이 자라나도록 젊은이들의 교육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박 대통령 “북한, 핵무기 개발부터 중단해야”

박 대통령은 “교황께서 ‘생필품이 필요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식탁에 여분의 자리를 남겨두자’고 말했듯이 대한민국의 식탁에도 여분의 자리를 남겨두어 가난한 이웃과 늘 함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박 대통령은 환영사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 회복 의지를 다졌다. 박 대통령은 “내년이면 남북 분단 70년이 된다”며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오랜 세월 동안 큰 상처를 줬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도 휴전선 너머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채 평생 그리움과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이 한국에만 7만여 명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교황은 “이산가족들이 떨어져 사는 아픔을 이해하며 가톨릭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제는 이런 아픔의 역사를 딛고 진정한 남북 화해와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갈 때”라며 “남북한 주민들이 전쟁과 핵 위협에서 벗어나 함께 행복을 누리고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에 기여하는 통일을 이루려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부터 중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포토뉴스] 박근혜 대통령,「프란치스코」교황과 면담



청와대뉴스,2014-08-15 오후 11:35:24



박근혜 대통령은 14일 프란치스코(Francisco) 교황과 정상면담을 가졌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온 국민이 환영하며, 1989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후 오랫동안 기다린 만큼 우리 국민들의 기쁨이 더 크다고 하면서 평소 세계 평화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교황의 활동 소식을 익히 듣고 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가우며, 특히 아시아에서 첫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더욱 의미가 크다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간 따뜻한 서한을 통해, 한국 국민들을 축복하고 평소 한반도 평화에 큰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등 큰 애정을 보여준 데 대해 감사하고, 특히 세월호 침몰사건 관련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기도해 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별한 환대에 감사하며, 한국이 노인을 공경하는 문화를 가지고,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여 나라를 일으킨 점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박 대통령과의 수차 서한 교환을 통해 대통령의 주된 관심사가 평화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황은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으며, 박 대통령은 “평화는 수고할만한 가치가 있는 선물”이라고 화답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금년은 한국에 새로운 추기경이 서임되고 이번에 교황 방문이 이루어진 특별한 한 해로 기억될 것이라고 하고, 한국은 천주교가 평신도들의 자생적인 노력으로 전파된 유일한 나라로서 이번에 교황께서 우리 천주교 순교자 124위를 위해 시복식 미사를 직접 집전해 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은 특별한 전교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이는 하느님이 한국을 선택하셨고, 한국민도 이를 잘 받아들여 믿음을 자기 것으로 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하면서, 과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교로 재임시 한국인 믿음공동체가 잘 모여 교회를 세우고 선교 활동을 열심히 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으며, 한국이 또한 많은 선교사를 세계로 파송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에 있는 병원에 일할 사람이 없어 찾고 있었는데, 한국 성가소비녀회의 수녀들이 봉사에 나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북부 지역에도 새로운 공동체를 세운 사례를 설명
 

박근혜 대통령은 전쟁을 겪고 여전히 분단 상황에 있는 우리로서는 교황이 추구하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과 헌신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하고, 현재도 전쟁의 상흔으로 남아 있는 이산가족들이 고령으로 인해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인도적 차원에서 시급한 과제라고 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남북한 주민들이 여전히 전쟁과 핵위협 아래 살고 있는 것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로서, 한국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하면서도 대화의 문은 항상 열어두고 교류와 협력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한반도에서 핵과 전쟁의 공포를 종식시키며 이산가족 문제와 탈북자 등 문제의 해결을 기하는 것은 평화통일로서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시대가 열릴 수 있도록 교황의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를 희망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이 핵심으로서 이산가족들이 떨어져 사는 아픔을 이해하며, 가톨릭 교회가 이의 해결을 위해 지속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한국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평화의 씨로서, 이를 잘 심고 가꾸어 나가면 한반도는 점차 하나가 될 것이므로 이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으며,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소중한 말씀에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청와대뉴스>

2014-08-15 오후 11:35:24   © worldnews.or.kr

 



천주교 의정부 교구

 


경기도 의정부시 신흥로 261(의정부동) 천주교 의정부교구청
대표전화 : 031-850-1400 팩스 : 031-850-1573


천주교 용현동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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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031) 851 - 9190 FAX : 031) 851 - 9193




 


 


 


 


추석 2013년 9월19일


 위령미사 전 연도 드리는 모습



 

 


 가위 합동 위령미사(제사)


2013년 9월19일 오전10시



신부님 위령미사 집전하는 모습 



  조상님추모분향행열모습  신부님강론하시는모습  
 성체분배하기위한과정모습
성체모시기위한행열모습 
 미사후조상님위패폰카메라에담는모습 
 조상님위패찾는모습



2014년 1월31일 (음력1월1일)


오전9시15분


  합동 위령미사(제사) 전 연도 




 
 


  합동 위령미사(제사) 


위령미사 시작 예식



2014년1월31일(음력1월1일) 오전10시


 



 


말씀 전례 제1독서 



말씀 전례 제2독서 



신부님 강론 



조상님 추모 분향 




신앙 고백 



성찬 전례 



영성체 예식 




영성체 후 기도



강복



파견



조상님 위패 찾는 모습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배은하 타대오(성지 배론 순교자들의 집 소장 · 신부)


 


30여 년의 군정이 종식되고 문민 정부가 출범함으로써 이 땅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개혁과 변화의 깃발을 올린 현정부가 벌이는 일련의 사정 작업을 보면서 그 동안 같은 사회 속에서 살아온 교회는 무엇을 했는지 자책하게 됨은 물론,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2백여 년이 넘게 자라난 큰 교회이고, 기형적인 사회 속에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적응하느라 길들여진 교회를 어떻게 쇄신시켜야 할지 염려하다 보면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과거 우리 나라의 정치 구조와도 같이 획일화된 제도나 성직자 중심으로 이끌려 온 교회라면 의외로 쇄신 작업은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왜냐면 교회의 윗물에 속하는 주교나 신부가 변화되면 교회 전체의 변화는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회의 쇄신이 절박한 이 시점에서 두 번째 방인 사제되신 최양업 신부님의 생애와 영성을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은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생애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홍주 지방의 다래골에 사는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꼬와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사이에서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새터로 불리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신앙 때문에 자주 이사해야 했던 부모님을 따라 이곳저곳 옮겨 다녔고, 1836년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한 뒤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15세 때 마카오로 떠난다. 그곳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 경리부와 요동, 몽고 땅 소팔가자 교우촌 등지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한다.


 


1844년 소정의 신학 공부를 마친 최양업과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삭발례에서 부제품까지 받지만, 교회법이 요구하는 만 24세가 되지 못해 사제품은 받지 못했다. 1846년 1월부터 네 차례나 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와 1849년 4월 15일 드디어 사제 서품을 받는다. 서품 후 육로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요동으로 가지만 요동교구 부주교인 베르뇌 신부의 뜻을 따라 사목 활동을 하다가, 1849년 12월 혹독한 추위로 보초병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변문을 통과하여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는다. 실로 13년 만의 귀국이요, 수년 동안 다섯 번이나 육로와 해상으로 입국을 시도하다가 이뤄진 결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더욱 험난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조선 팔도에 유일한 방인 사제로서 자신의 관할 구역을 사목하기 위해 해마다 5000리가 넘는 먼 길을 순회해야 했다. 130여 개에 달하는 교우촌을 순회하기 위해 피로와 궁핍은 물론 추위와 체포의 위험, 외교인의 습격 등으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던 그는, 1861년 6월 15일 영남 지방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문경새재에서 겹친 과로로 순직하게 된다. 최양업 신부와 절친했던 페롱 신부의 서한 제8신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방금 토마스 신부님의 복사가 내게 와서 신부님의 사인을 자세히 알려 줍니다. ‘신부님은 단지 과로로 쓰러지셨습니다. 사실 작년의 소란(경신 박해)으로 그분의 성사 집행이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루에 80리에서 100리나 다녔습니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떠나곤 했습니다. 나흘 밤 동안 계속해서 과중한 일을 하고 나서 비로소 휴식을 취할 정도였습니다’”(1861년 7월 26일자 서한). 결국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과 교우들을 돌보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헌신하던 최양업 신부는 11년 6개월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40세의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친 것이다.


  


시대적 상황


 


최 신부가 환국하여 활동하던 시기는 대체로 철종 치세(1850~1863년)와 맞물리는데, 이때 공적인 박해는 없었지만 사적인 박해는 계속되었다. 당시의 사회는 양반과 상민의 신분 계급이 철저하게 구별되어 있던 사회로서 계속되는 자연적 인위적 재난으로 인해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백성은 각종 세금과 수탈, 착취에 짓밟혀 극도의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 관원과 지방 두목, 포졸, 양반들이 다 같이 약탈자뿐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일년 내내 일하고 노력하지만 정부 관리들의 탐욕을 겨우 충족시킬 뿐입니다”(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설상 가상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쫓기는 신세였고, 그만큼 더 고통을 견디어야 했다. “교우 촌락을 두루 순회하며 빈민들의 불쌍하고 궁핍한 처지를 목격할 때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나를 원망합니다. 저들은 정부의 학정에 시달리고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무기력합니다. 동포들의 박해, 부모들의 박해, 부부간의 박해,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고 3년이고 간에 마음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사목 활동과 저술


 


최양업 신부는 입국하자 마차 6개월 동안 5000리를 순회 사목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비참한 교우들과 동고 동락하였다. 그가 담당해야 하는 지역은 경기 충청 전라 강원 경상도 등 5개도에 달하며, 해마다 10월경 순회를 시작하여 이듬해 6월경에 마치고 장마철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성교공과” 등의 번역이나 저술 활동을 하였다. 1851년 127개의 교우촌을 돌보았고, 1853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그들을 간호하면서도 전국 각처에 소재한 1만 2000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집전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최 신부는 한 해 동안의 사목 활동을 매년 9~10월에 르그레주아, 리브와 신부 등 은사들에게 보고하였다.


 


박해 이전에는 예비자 증가가 절정에 이르러 그의 관할 구역에서만도 1000명에 달했고, 교우들의 신앙심도 출중하여 경문과 문답을 배우는 데도 아주 열심하였다. 그러나 대규모의 박해로 천주교에 대한 외인들의 인식은 물론이요, 예비자들의 마음까지 뒤흔드는 상황이 되었고, 콜레라나 기근 등으로 사회가 궁핍과 고통에 빠진 상황에서도 최 신부는 교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박해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교우들이 둘이나 셋밖에 없는 공소도 절대 거르지 않았으며, 또 교우 집이 다섯 집밖에 없는 공소를 찾아가기 위해 사흘 길을 걸었고, 다음 공소로 가기 위해 700리를 걸었다.


 


최 신부는 조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선교사들에게 지역 특성에 맞는 사목을 해줄 것을 당부했고, 페레올 주교의 그릇된 처신과 선교사들의 우월주의에 가차 없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선교사들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의 악화된 건강이 자신의 부덕에 기인함을 고백하는 겸손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남긴 주요 저술로는 그가 은사 르그레주아 신부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9통의 서한이 있고, 아직 친저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러 편의 “천주 가사”(“경향잡지” 1991년 5월호 참조)가 있다. 그의 서간은 당시의 사회와 교회의 모습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영성과 사목 방향에도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것이다. 이 밖에도 최 신부는 이미 1847년 부제 시절 홍콩에 머무르는 동안 치명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했으며, 1860년 사본 문답을 준비했고, “천주성교공과”도 번역하여 신자들의 기도 생활을 도왔다.


  


사상과 영성


 


최양업 신부의 서간들 속에서 쉽게 발견되고 자주 눈에 띄는 사상과 영성은 인간 평등 사상과 겸손을 토대로 하는 애주 애인, 그리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길 바라는 순교 정신을 들 수 있다. 이 땅에 천주교가 전래된 초창기에는 주로 남인 계통의 선비들이 앞장서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계속되는 박해로 점차 신자 계층이 당시 사회 속에서 피지배 계층에 속하는 중인, 상민, 부녀자들로 바뀌게 된다. 최 신부는 누누이 양반 제도의 폐습을 거론했고, 그리스도교 정신에 위배되므로 배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 나라의 백성의 제도가 좋다고 합니다. 즉 양반의 모든 권리를 인정할 것이요, 상민은 양반에게 복종할 것이며 자기 처지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 하에서는 우애와 애덕이란 것이 있을 수 없고 천부적 인간 존엄성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천덕꾸러기로 억눌리게 마련입니다. 인권 유린은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실행으로 항상 가난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의 편을 드신 반면 교만한 사람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을 엄히 다루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양반 제도는 인도의 브라만 계급과 같은 고질적 제도라고는 할 수 없고, 가르치고 계몽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신분이나 권좌에 사람을 채용할 때 그 사람의 출생이나 성분을 고려하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 보고 채용한다면 양반 제도는 쉽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합니다”(1857년 9월 15일자 서한).


 


최양업 신부는 이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가 양반 출신 교우들을 가까이해서 교우들의 원망을 사고 있음을 통탄하고 있다. 또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신부께서 우리 나라 실정과 풍속을 미리 파악하셨다가 조선으로 파견되는 신부들에게 이런 지식을 넣어 주어, 조선에 온 후에 민중의 감정을 해침으로 전교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상동).


 


겸손에 대한 그의 영성은 한국 교회의 밑거름이 된 그의 숨은 생애와 순교자적 죽음 속에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는 신학생과 부제 때에 자신이 겪는 고난과 역경이 조국의 동포들이 당하는 박해와 시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좀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언제나 나도 신부님들과 내 동포 형제들이 겪는 고난과 수고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한 것을 기워, 구속 공부를 완성할 수 있을까요”(1844년 5월 19일자 서한).


 


그는 늘 무엇이 하느님 뜻에 합당한가를 분별하여 오직 주님을 위해 일하며 주님의 섭리대로 이루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영성은 장상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4차 입국 실패 후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오 거룩한 운명으로 내가 붙들려 있지 않았더라면 이미 나는 나의 전교 지방에 가 있거나 또는 우리의 아버지(성부)를 따라 다른 세계(천국의 빨마가지 위)에 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않고 다만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행하려 합니다”(1849년 5월 12일자 서한). 그러나 그는 맹목적인 순종은 하지 않고 참된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었으니 페레올 주교의 잘못된 사목 방향과 양반층과 결탁된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해 직언한 일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타고난 심성이 차분하고 조용하며 내성적인 최양업 신부가 그토록 놀라운 사목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토록 깊은 영성과 탁월한 지성을 밑바탕으로 하여 올바른 판단과 이를 실천하여 민족의 구원을 이루어 보려는 뜨거운 열망과 확고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신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사상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모범적인 사제의 삶을 보여 주고 있고, 2000년대를 향하는 한국 교회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시대의 아픔과 혼란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에 의탁하며 선구자적 길을 걸으신 최양업 신부는 난공 불락과도 같은 당시의 사회 구조에 도전하여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봉건 제도와 만민 평등을 저해하는 양반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 계층의 그릇된 세계관을 바꾸기 위해 전력했다. 또한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입장이 되어 배우기 어려운 교리와 기도를 쉽게 생활 속에서 익히도록 “천주가사” 등을 만들어 토착화에 앞장섰으며, 한 마리 양도 잃지 않기 위해 몇 십리 길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교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겸손된 열정으로 사셨으니 우리에게 이런 사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십 평생의 짧은 생애지만 누구보다 큰일을 하신 최양업 산부를 장상인 베르뇌 장 주교는 그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서 그의 훌륭한 분별력으로 그렇게도 소중한 유일한 본방인 신부 최 토마스가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은 성사 집행 후, 내게 자기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12년 간 거룩한 사제의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월주의 사고 방식에 젖어 그릇된 태도를 지닌 서양 선교사들에게 어렵지만 우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최 신부가, 오늘의 교회를 책임진 후배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실지 함께 생각해 보길 바라며, 그분의 영성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 되살아 나길 간절히 바란다.


 


[경향잡지, 1993년 7월호]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우리 한국교회는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103위 성인을 모시고 있다.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거행된 103위 성인의 시성식 이후에도 한국교회는 신앙 선조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다. 비록 순교자의 반열에 들지 못했을지라도 뛰어난 덕행을 남긴 신앙 선조들을 현양하고 그분들의 신심을 이어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땀의 순교자'라 일컫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꼽을 수 있다. 김대건 신부님에 이어 두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올해로 서품 150주년


 


최양업은 1821년 3월 1일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곡)에서 독실한 교우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나, 1861년 6월 15일 나이 마흔 하나에 경북 문경에서 사망하였다.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것은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3동)에서 살던 1836년,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1837년 11월 동료 최방제를 잃었고, 현지의 민란으로 1839년에는 7개월 동안 필리핀의 마닐라와 롤롬보이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유학생활이 계속되었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은 것은 1849년 4월 15일.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인 사제가 태어난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요동에서 생활하다가 1849년 12월 3일 마침내 귀국에 성공하였다. 한국을 떠난 지 꼭 13년 만이었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를 왜 '땀의 순교자'라 하는가? 그것은 귀국 후 그의 사제생활 11년 6개월 동안 걸을 수 있는 날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우촌을 순방하며 사목하다가 결국 과로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저는 조선에 들어온 뒤 한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천 리를 걸어다녔습니다"(최양업 신부의 서한집).


 


최 신부의 사목활동은 귀국하기 전 요동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7개월 동안 병자성사와 고해성사를 주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주일과 축일에는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는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에게 최초로 공식적인 사목을 담당한 한국인 사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관할구역은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 좌 우도, 전라 좌 우도 등 5개 도에 걸쳐있었으며, 때로는 강원도 일부까지 순회하여야 했다.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그가 만난 신자수는 사목생활 첫해인 1850년에는 3천 8백여 명, 1852년에는 5천 9백여 명, 1857년에는 5천여 명으로, 이는 당시 전국의 신자수 35-50퍼센트에 해당할 만큼 높은 비율이었다. 또한 해마다 세례를 주어 입교시킨 어른 영세자 수는 1855년까지만 해도 전국 영세자의 절반이 될 만큼 높았으나, 선교사제 수가 많아지고 관할구역이 축소되면서 점점 낮아졌다.


 


쉼없이 이어진 교우촌 방문


 


당시 조선 교회의 성직자들은 박해 때문에 사목활동에 많은 제약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최양업 신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생활은 마카오의 유학 시절 스승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대로 "항상 사슬에 묶여있는 것이나 진배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박해시기의 모든 난관과 어려움을 하느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일치로써 극복하면서 자신의 사제적 소명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쓰라림을 하느님을 위해서 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요 희망이시며 원의이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죽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교회 안에서 매우 긴밀한 일치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장상 주교들을 언제나 존경과 순명의 정신으로 대했고, 동료 사제들과도 친밀한 형제애를 나누었다. 또한 교우들과도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목자의 사랑을 베풀었다.


 


"우리가 어떤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이고 아이고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인사를 하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준 뒤 교우촌을 떠날 때에는 여행할 옷차림으로 갈아입을 때부터 공소집 전체가 울음바다가 됩니다." 그는 교리 연구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한글을 알지 못해 기초적인 기도문이나 교리를 외우지 못하는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암송하기 쉬운 한글 기도문이나 교리서를 편찬하려고 애썼다는 점이 그의 여러 편지에서 드러난다.


 


최 신부는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으로 조선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며 또한 조선을 개화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복음 전파에 대한 뜨거운 열성을 가지고 "만일 필요하다면 피를 흘릴" 각오를 가지고 교우촌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를 몹시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집행하던 구역에는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우리가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마을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교활동의 과로로 장티푸스에 걸려 숨진 최양업 신부를 애석해 하는 베르뇌 주교의 애도사이다.


 


결코 길지 않은 최양업 신부의 사제생활은 한마디로 사목 순방에서 시작하여 사목 순방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삶은 당시 박해받고 있던 교우들에게 크나큰 증거가 되었으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으로 훌륭한 모범이 되고도 남는다.


 


# 이 글은 지난 4월 17일 서울 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경향잡지, 1999년 7월호, 정리 김진복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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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방한… 프란치스코 교황 4박5일 일정 확정


기사입력 2014-06-19 03:00:00 기사수정 2014-06-19 09:09:25


교황 방한 일정 공식발표
15일 대전…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위로
16일 서울… 광화문서 124위 시복식 주례


《 세계 평화와 청빈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일정을 교황청이 확정해 18일 공식 발표했다. 교황은 8월 14∼18일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시아 지역 방문은 처음이며, 한국 방문은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 89년 방한한 데 이어 25년 만이다. 》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역대 교황으로는 두 번째로 한국을 찾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8월 방문 일정이 18일 공식적으로 확정됐다.

한국천주교교황방한준비위원회(방준위)에 따르면 교황청은 이날 오후 4시 바티칸 뉴스포털을 통해 교황의 한국 방문 일정을 발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시아 지역 방문은 처음이며, 한국방문은 요한 바오로 2세의 1984, 89년 방한에 이어 25년 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14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4박 5일간 한국에 머무른다. 교황의 첫 일정은 이날 낮 12시 서울 자하문로 주한 교황청 대사관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는 개인미사다. 가톨릭 교계에 따르면 교황은 해외 방문 때 첫 일정으로 방문 목적을 되새기고 방문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교황은 이어 청와대를 방문해 공식 환영식에 참석한 뒤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할 예정이다.

방준위는 이날 교황의 방문이 한국 내 가톨릭 교구를 둘러보고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석하는 등 종교적인 차원의 사목 방문이라고 밝혔다. 교황의 방한 일정은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개최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에 대한 시복 미사’ 집전과 대전교구에서 열리는 아시아청년대회 참석에 맞춰져 있다.

방준위는 “교황이 지역 교회를 찾아 시복식을 주례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광화문은 인근에 가톨릭 신앙 선조들이 옥고를 치렀던 형조와 우포도청, 의금부 터 등이 있어 순교로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의 피와 땀, 눈물이 배어 있는 역사적 장소”라고 밝혔다. 방준위는 시복 미사에 가톨릭 신자 20여만 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5일 대전교구를 찾아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며 17일 아시아청년대회 참석자들과의 만남에 이어 폐막식에도 참석한다. 특히 대축일 미사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을 초대해 위로한다. 당초 희생자 가족의 명동대성당 미사 참석이 검토됐지만 더 많은 가족을 초청하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요청으로 초청 장소가 바뀌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6일 소외받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북 음성군 꽃동네를 찾고, 방한 마지막 날인 18일에는 서울 중구 명동길 서울대교구청에서 국내 종교지도자들을 만난다. 이날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되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한국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청빈을 강조해온 교황은 방한 기간에 호텔이 아닌 교황청 대사관에 머무른다. 교통편은 장거리 이동 때는 청와대에서 제공하는 전용헬기, 단거리 이동은 승용차를 이용할 예정이다. 승용차의 경우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방탄장치가 안 된 일반 차량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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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년 만의 만남… “우리는 형제” 교황-러 정교회


                                 총대주교 쿠바회동


전승훈 특파원


입력 2016-02-15 03:00:00 수정 2016-02-15 03:00:00


 

1054년 동-서방교회 분열이후 처음… 화해-불평등 해소 등 공동성명
美잡지 “종교 넘은 정치적 사건”



가톨릭 교회가 서방과 동방으로 분리된 뒤 처음으로 교황과 러시아정교회의 총대주교가 만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왼쪽)과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는 12일(현지 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만나 ‘우리는 형제다’라며 화해의 메시지를 교환했다. 아바나=AP 뉴시스


“우리는 형제이지 경쟁자가 아닙니다. 신(神)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범죄는 없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종교 지도자의 책임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12일(현지 시간) 오후 쿠바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 접견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정교회 수장(首長)인 키릴 총대주교가 반갑게 포옹하며 양 볼에 입을 맞췄다. 거의 1000년 만에 이뤄진 로마 교황과 러시아정교회 수장의 역사적 만남에 두 사람의 얼굴에는 감격 어린 기쁨이 가득했다. 

가톨릭 최고 수장인 교황과 동방정교회 수장인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의 만남은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1054년 상호 파문하면서 갈라선 이른바 ‘교회 대분열’ 이후 처음이다. 2시간 동안 이뤄진 양 교회 수장의 역사적인 만남은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중재로 성사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멕시코 방문 길에 잠시 쿠바에 내려 쿠바를 공식 방문 중인 키릴 총대주교와 만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는 같은 세례를 받은 형제”라고 말했고, 키릴 총대주교도 “열린 마음으로 대화했다”고 화답했다. 두 사람은 회동을 마친 뒤 총 30개 항으로 이뤄진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교황과 총대주교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기독교인들이 극단주의자들의 박해에 시달리는 현실에 우려를 나타내고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 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또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신음하는 가난한 사람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도는 난민들과도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동방정교회의 영적 중심지는 현 터키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이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에 함락되면서 정교회 중심이 사실상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세계 동방정교회 신자 2억5000만 명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러시아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14일 두 교회 수장의 만남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정치적’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FP는 우선 두 사람이 만난 장소가 쿠바라는 점에 주목했다. 가톨릭 국가이면서도 옛 소련과 친했던 쿠바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 이후 동서 간의 신(新)냉전을 중재할 적임자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는 것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는 13일 독일 뮌헨 국제안보회의 연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정교회 키릴 총대주교의 1000년 만의 만남은 국제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동서 간 대화’의 빛나는 예”라고 찬사를 보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사육신·천주교인 목숨잃은 서소문, 역사공원으로



입력 : 2016.02.16 03:00


/서울 중구청 제공

서울 중구는 2018년까지 서울역 옆 서소문 근린공원에 역사 전시관과 순교자 추모 시설 등을 갖춘 역사문화 공간을 조성한다고 15일 밝혔다. 서소문공원은 국내 대표적인 천주교 순교 성지이자 조선시대의 사육신 성삼문·박팽년을 비롯한 혁신사상가,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등이 처형됐던 곳이다.

중구는 서소문공원의 지하 주차장 일부를 리모델링해 지하 4층, 연면적 2만 5000㎡ 규모의 '서소문 역사문화공원 기념공간'〈사진〉을 만들 계획이다. 지하엔 순교 역사 전시장, 강당, 세미나실 등이 들어선다. 지상은 지금처럼 시민공원으로 이용되며, 지하 추모전당과 연결된 '순교 기념타워'가 세워질 예정이다. 2017년 말 완공을 목표로 이달 착공에 들어가며, 2년간 총 46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서소문공원 일대에선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를 거치며 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했다. 이 중 44명은 성인으로 시성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014년 8월 방한했을 때 이곳에서 참배하기도 했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서소문공원을 중구 명동성당, 용산 당고개성지, 마포 절두산성지 등과 이어지는 성지 순례 코스로 만들어 관광 명소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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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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