謹賀新年 慶祝
지난해 도와주신 후의에 깊이 감사 드리며 설 名節을 맞이하여 家庭에 健康과
새해에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幸福이 가득하시길 祈願합니다
최씨선계보崔氏先系譜
※본 최씨 선계보(先系譜)는 조선조말(朝鮮朝末) 고종(高宗)14(1877)년정축(丁丑)에 함경남도(咸鏡南道) 이원군(利原郡) 동서면(東西面) 효우리(孝友里) 강성우(姜聖佑) 댁에서 발견(發見)되었으며 이는 성우씨의 6대조 되시는 율계(栗溪) 강필동(姜必東)씨께서 수집(蒐集)한 제성씨보(諸姓氏譜)가 비장(秘藏)되어 오던 것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 사는 최장환(崔章換)씨께서 강성우씨 댁을 예방(禮訪)하여 최씨성부편(崔氏姓部篇)을 필사(筆寫)하였던 것이다. 그후 충청남도(忠淸南道) 서산(瑞山)에 있는 최홍연(崔弘淵)씨가 서울의 제종(諸宗)과 상의(相議)하고 지난 1937년에 『경주최씨상계보(慶州崔氏上系譜)』라 하여 발간(發刊)하였다. 이를 또한 1949년에 경상북도(慶尙北道) 월성군(月城郡) 천북면(川北面) 손곡리(蓀谷里)에서 중간(重刊)하여 현금(現今)에 전(傳)하고 있다.
그러나 성씨별(性氏別)로 성자(性字)를 일반적(一般的)으로 사용(使用)하지 않던 시대(時代)인 신라건국초(新羅建國初)부터 성명(字諱)또는 계대(系代)를 어떻게 고증(考證)하였는지 의아(疑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선계보(先系譜)에 각본관별(各本貫別) 최씨의 계대를 이어 거의 모든 최씨가 경주최씨 상계(上系) 모후(某后)에서 분적(分籍)되었음을 상세(詳細)히 계도화(系圖化)하여 수록(收錄)하여 놓았다. 그러나 본 통사에는 선계보를 확실(確實)한 고증으로 믿을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후예(后裔)로 하여금 혼돈(混沌)을 막기 위하여 신라말기(新羅末期)에 해당(該當)되는 계대 이하(以下)는 삭제(削除)키로 하였다. 선계보(先系譜)란 당시 (當時)학자(學者)로서 야사가(野史家)였던 율계(栗溪) 강선생(姜先生)께서 증보(增補)한 자신(自身)의 소작(所作)이 아닌가 사료(思料)되며 다만 선계에 대한 정통성(正統性)의 문제(問題) 이전(以前)에 후예(后裔)로 하여금 고증(考證)의 자료(資料)가 될까하여 등재(登載)하였으니 참고(參考)하기 바란다.
2015년도 관가정공 수안공 세일사(시제) 봉행안내
2015-11-03 14:23:26
경주최씨관가정공파의 파조(派祖)이신 최청(諱 淸 /11세)과 아드님이신 수안공(諱 淵止/12세)의
금년도 세일사(歲一祀/시제) 봉행과 정기총회를 아래같이 안내드리오니
시간을 허락하시여 참석하여 주시길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아 래 -
◎ 일 시 ; 2015년11월17일(음력 10월6일/화요일) 오전 10시부터
◎ 장 소 ;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49 파조 묘소
◎ 정기 총회 ; 당일 오후 1시부터 '최치원기념관' 내 서재(西齋/재실)
◎ 점심 식사 ;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진건읍내 '7남매샤브샤브식당'
(진건읍 진건농협 맞은편) 전화 031)528-5310
◎ 연 락 처 ; 병원 회장 010-6711-1991 문규 사무국장 010-2761-0728
◎ 추 신 ; 관가정공 묘역 예하로 이장하여 모신 13세 경동(諱 敬仝) 경충(諱 敬忠)공과
14세 계종(諱 繼宗)공도 함께 봉행하며, 이튼날 (18일)은 참판공(諱 光門/14세) 외
7위 선조의 세일사(시제)를 봉행합니다.
慶州崔氏 觀家亭公 (諱)淸派 大宗會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548 (독정로성지1길34)
TEL:031)573-5274 / FAX:031)573-5273
※ 찾아 오시는 길
→ 사능역 하차,→ 시내버스 202번,165-3번,9번,9-1번,91번승차,
→진건읍 지나서 하독정입구 하차,→ 용정1리(하독정.마을회관) 도보로 15분거리.
☞버 스 편; 서울 청량리역 앞에서→ 202번 오남읍행 승차,진건읍 지나서 하독정입구
하차,→용정1리(하독정) 마을회관 도보로 15분거리.
☞네비게이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550(독정로 성지1길34)
제1회 고운 최치원 선생 남일대 전국백일장 9월 11일 개최
- 제1회 고운 최치원 선생 남일대 전국 백일장이 포스트© News1
제1회 고운 최치원 선생 남일대 전국 백일장이 오는 9월11일 경남 사천시 남일대해수욕장에서 개최된다.
이 행사는 사단법인 남일대 보존회(이사장 최상화)와 남일대차인회가 주관한다.
남일대 전국 백일장을 주최하는 한국문인협회 사천지회는 신라시대 당대 최고의 문인 최치원선생과 삼천포 출신으로 현대 서정시를 대표하는 박재삼 시인과의 문화적인 가교로 승화시켜 지역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남일대보존회 최상화 이사장은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는 국가나 국민은 반드시 부흥한다는 신념으로 이번 행사를 준비한다"며"조선의 국운과 함께 한 선진성, 임진왜란의 애환을 안고 있는 조명군총등 과 함께 관광산업으로의 활로를 모색하는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참가 신청은 남일대보존회 홈페이지(http//namildae.or.kr) 또는 팩스(055-832-0971)로 가능하고 행사 당일 9시30분까지 현장신청도 가능하다. 문의는 남일대보존회(055-832-0970)로 하면 된다.
kglee63@
- 고운 최치원 선생 남일대 전국 백일장
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6두품의 천재
신라 6두품 출신으로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열심히 하거라.”
먼 곳으로 어린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로는 지나치리만큼 매서운 이 말 속에는 대대로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었던 최씨 집안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6두품으로서 느끼는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아들이었지만 신라에서는 그 재능을 다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의 각오도 아버지 못지않았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이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코스였다.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치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중국땅에 문을 연 최치원 기념관. 최치원은 고국인 신라보다는 당에서 더욱 실력을 인정받았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6두품의 한계는 여전히 그의 발을 붙들고…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고 황제에게 인정도 받았으나,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최치원은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정한다. 884년 당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할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귀국시켜 학문적인 전문가로 측근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젊은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46의 제 3장 최치원 부분.
<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1_002_001_0035)
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외직으로 나간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임을 살펴볼 때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펼치던 헌강왕의 측근으로서, 헌강왕의 정책에 반발하던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것일 수도 있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하여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며 대산군∙천령군∙부성군 등의 태수를 역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한 사상가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국보 315호로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새긴 비석이다. |
부산 해운대(海雲臺)의 지명의 유래가 된 최치원이 남긴 글씨 |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최치원은 한국유학사상 최초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으나, 사실 그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통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지증∙낭혜∙진감 등 선승들의 탑 비문을 썼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
한편, 최치원이 왕건에게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라는 글을 올려 고려에 대한 지지를 완곡하게 표현했으며, 심지어 이 때문에 신라왕의 미움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는 말들이 전한다. 그러나 최치원이 은퇴할 당시 왕건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으로 궁예 휘하의 장수에 불과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20년이나 더 지난 뒤의 일이다.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신라에 대한 강한 애착과 호국에 대한 굳은 의지를 글로 표현했던 최치원이 은밀히 왕건을 지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 글
- 윤희진 역사저술가
- <한국사 인물 이야기>, <제왕의 책>, <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등의 책을 썼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 인물을 찾아내고 왜곡된 인물들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 그림
-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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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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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지진 나면… 전기 스위치 만지지 말고, 현관문 열어둬라
최고의 안전 매뉴얼로 꼽히는 일본의 '도쿄방재' 보니
입력 : 2016.10.01 03:05
일본은 지자체마다 알찬 생존 매뉴얼을 펴낸다. 일명 '노란 책'이라 불리는 도쿄도(東京都) 매뉴얼 '도쿄 방재'가 특히 유명하다. 물에 쉽게 젖지 않는 가벼운 종이라, 338쪽 분량인데도 두께가 1㎝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도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해 생존 요령을 일러준다.
◇집·사무실, 장소마다 행동 요령 다르다
체력을 아껴라
사망 1위 압사… 가구에 깔려도
비명 대신 물건으로 소리내야
지진이 발생하면 자택 거실에 있을 땐 탁자 밑에 들어간다. 침실에 있을 땐 이불로 머리를 감싸고 침대 위에 웅크리되, 조명등·창문 파편에 맞지 않도록 주의한다.
용변 보다 지진이 났을 땐, 일단 화장실 문을 열어젖혀야 문이 비틀려 갇히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사무실과 학교에선 책상 밑에 숨는다. 마트에 있을 땐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헬멧처럼 쓰고 가까운 층계참(층계와 층계 사이)·기둥 옆으로 피한다. 극장에선 앞·뒷줄 좌석 사이에 웅크리고,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땐 모든 층의 단추를 다 눌러서 맨 먼저 열린 층에 내린다. 거리에서 지진이 나면 옷·가방으로 머리를 감싸고, 낙하물·건물 붕괴에 주의하며 공원처럼 툭 터진 곳으로 간다.
◇차를 몰고 있다면
차 열쇠는 꽂아두고 대피하라
땅 흔들리면 감속뒤 차 세우고
열쇠 놔둬야 구조차량 길 안 막아
◇평소엔 대비하고, 재난 땐 이웃 도와라
4인 가족 물 3일분은 2L생수 12병
쓰고 버리는 1회용 변기는 30개
비상용품 30개 품목 구체적 제시
'도쿄 방재'는 지진 발생 시 막연하게 "비상용품을 상비하라"고 하지 않고, 약 30개 품목을 구체적으로 찍어준다. 그냥 '생수 3일분'이 아니라 '4인 가족 기준 2L 생수 12병'이라고 쓰여 있다. 딸 있는 집은 생리대 60매, 눈 나쁜 사람은 1회용 콘택트렌즈 1개월분, 고령자는 보청기 전지 6개를 갖춰놓는 게 좋다. 휴대전화·인터넷·현금인출기가 먹통이 되는 상황을 감안해 며칠 버틸 현금도 뽑아놓는다.
◇서울 vs 도쿄 … 경주 vs 교토
도쿄도는 '노란 책' 외에도 여러 종류의 지진 매뉴얼을 펴냈다. 도쿄는 고층 건물이 많아 지진 발생과 동시에 도시를 봉쇄하고 주민들에게 도쿄를 떠나도록 권고한다. 지진 매뉴얼 중 하나는 차를 몰고 외곽으로 대피할 때 지금 사는 동네에 따라 어떤 루트로 어느 피난소에 가는 게 가장 빠른지, 혼잡이 예상되는 구간은 어딘지 지도에 상세히 표시했다.
고층 건물이 거의 없고 문화재가 많은 교토(京都)는 도쿄와 매뉴얼이 전혀 달랐다. '일반 주택'과 '문화재' 보호가 초점이다. 교토시는 문화재가 지진·화재·수해를 당했을 때를 대비해 평소 지역 관광 가이드와 택시·관광버스 운전기사에게 일정 시간 문화재 보호 교육을 실시하고, 만약의 사태에 미술품이나 불상을 어디에 옮겨 보관할지 정해 사전 훈련을 반복한다.
반면 서울소방재난본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지진 대피 요령'은 일반적인 지진 상황만 있지, 서울이라는 장소에서 시간대별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1000만 서울 시민이 한꺼번에 길거리로 쏟아질 경우 어떻게 될지, 연립주택 사는 사람과 초고층 아파트 사는 사람이 각각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무 정보가 없었다. 경주시의 경우, 교토와 비교하고 말 것도 없이 매뉴얼에 문화재 보호 항목 자체가 없었다.
- "손전등·식량·라디오 평소에 챙겨두세요" 최원석 기자
- 한반도 역사 속 1644회 흔들림, 그래도 '지진 안전지대'인가
-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과학기술사
하늘엔 특별기, 땅엔 無진동차… '시진핑의 판다'
특급 수송작전
- 입력 : 2016.03.04 03:00 | 수정 : 2016.03.04 10:16
韓·中 사육사 등 2400㎞ 동행… 국내 적응훈련 거쳐 내달 공개
두 판다는 이날 중국 서부 쓰촨(四川)성의 판다 기지를 출발해 3시간 20분 동안 2400여㎞를 날아왔다. 이송에는 특별 제작한 가로 185㎝, 세로 120㎝, 높이 130㎝ 우리를 썼다. 이들을 돌볼 한국인과 중국인 사육사, 중국 수의사 등 3명도 동행했다.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기내 온도는 섭씨 18도로 유지하고, 비행 도중 8차례 건강 상태를 점검했다. 응급 약품도 27종이나 준비했다고 한다.
두 판다 이름 아이바오와 러바오는 '사랑스러운 보물' '기쁨을 주는 보물'이라는 뜻으로, 공모해서 지었다. 에버랜드는 국내 적응 훈련을 거쳐 오는 4월 판다들을 일반에게 공개한다.
- [인물 정보]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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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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